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27
#826화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렇다.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인류가 있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저마다의 상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잣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을 목격했을 때, 비로소 경악이라는 감정을 품게 된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부터 갑작스럽게 두 세상을 오가게 되었어도, 시스템이라는 믿지 못할 힘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감정에 사로잡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조차 잊고는 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저게…… 뭐지?’
모든 사고 회로를 정지시킨 한 가지 의문.
나는 아연한 눈빛으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다.
“이게 무슨.”
도플갱어를 향해 재차 쏘아지려던 스켈레톤 킹조차 멍하니 뇌까렸다.
[영웅의 검]을 찬란하게 물들였던 황금빛 마력은 어느새 사그라진 지 오래.우리는 도플갱어를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고, 동시에 발아래의 폐허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울림을 들었다.
구궁, 구구궁.
‘이건.’
익숙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울림은 그저 시끄럽기만 한 굉음 따위가 아닌, 보다 깊고 본질적인 무언가였다.
마땅한 단어를 찾자면, 그래.
‘감응(感應).’
내가 떠올렸으면서도 순간 미친 소리라고 느껴졌다.
비록 무림에서는 일류에 이른 검객이 검명(劍鳴)을 이끌어 낼 수 있다지만, 이건 그저 땅이다.
나무 한 그루, 잡초 하나 자라나지 않는 황무지였고, 이제는 그 누구도 찾지 않는 폐허였다.
그런 죽음의 땅이, 그것도 온 사방의 폐허 전체가 감응하듯 떨리고 있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미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참이나 이 해결되지 않는 의문 앞에서 머뭇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늘 그래 왔듯이, 해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마법.”
신음과도 같은 한 단어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순간.
쿠웅!
마치 심장 박동처럼 깊은 울림을 토해 내던 폐허가 물결친다. 동시에 지금껏 본 적 없는 휘황한 빛 무리가 사방을 물들이며 터져 나왔다.
화아아아악!
앞서 겪었던 텔레포트 마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섬광.
나는 망설임 없이 눈을 감으며 몸을 비스듬히 굽혔다.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 창대가 파르르 떨렸다.
‘온다. 분명히.’
이미 오래전부터 뼛속 깊이 각인된 본능이 지친 몸을 움직인다.
나는 곧 들이닥칠 도플갱어의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더불어 놈의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
몸과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그러나 이 격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라고 해도, 도플갱어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일격(一擊).
누가 쓰러지건, 단 한 수에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스켈레톤 킹 역시 나와 같은 마음으로 놈을 기다리고 있겠지.
‘와라.’
호흡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감각을 끌어 올렸다.
지그시 감은 두 눈. 그러나 날 선 오감을 통해 부르르 떨리는 공기와 죽어 버린 폐허의 흙내음이 전해진다.
얇은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온 눈부신 섬광이, 망막을 어루만지다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빛이…… 사그라졌다고?’
어째서, 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했다.
그만큼 조금 전의 상황은 도플갱어에게 있어서 완벽한 타이밍이었고,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예상했던 기습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느덧 익숙해진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들었을 뿐이었다.
“보기보다 겁이 많군, 선택받은 자여.”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저 말의 의도는 함정일까, 아니면 단순한 방심일까.
그러나 고민은 찰나였고 내게 남은 선택지는 명확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선명해진 시야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도플갱어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완전히 달라진 주위의 모든 것이.
“……!”
“……!”
도플갱어의 어깨너머, 두 눈을 부릅뜬 스켈레톤 킹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니, 어쩌면 나 역시 녀석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생각해 본 적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이건…….”
“어때, 멋지지 않나?”
스켈레톤 킹의 말꼬리를 잡아챈 도플갱어가 과장된 동작으로 두 팔을 떨쳤다.
놈의 손끝을 따라 두둥실 솟아오른 빛의 구(球)가 폐허를,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폐허였던’ 공간을 비추었다.
“영광으로 알아라. 이 경이로운 신전의 첫 손님이 된 것을.”
도플갱어의 말에는 거짓과 진실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이곳은 분명 신전(神殿)이라 부를 만한 구색을 갖추었으나, 경이롭다기보다는 기괴하다는 표현이 훨씬 어울렸다.
당연한 일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화 속 신전의 모습을 본뜬 것처럼 웅장하고 거대했지만, 웅대한 기둥은 썩은 식물의 뿌리로 감겨 있었고 하늘을 가로막은 천장은 햇빛 한 점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으니.
문득 이 신전이 마치 도플갱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의 겉가죽을 그럴듯하게 베껴 왔을 뿐, 그 안은 온통 썩고 죽어 있었으니.
그나마 신화와 흡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직경만 수백 미터에 이르는 이 드넓은 공간을 빼곡히 채운 괴물들의 거대한 석상뿐이었다.
“걸작이지, 안 그래?”
나는 대답 대신 담담한 눈빛으로 도플갱어를 응시했다.
지금 놈이 보이는 태도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수많은 적들과 마주하며 자연스럽게 체득한 본능은, 저 느긋한 태도가 방심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여유.’
틀림없다. 현재의 도플갱어는 잠시 잃어버렸던 여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텅 비었던 한쪽 어깻죽지에 새로운 팔이 생겨서, 혹은 괴물들의 석상으로 가득한 신전이 세워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온 이유가 있었어.’
내심 중얼거린 나는 조용히 감각을 퍼트렸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사방에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언젠가 매직 존슨이 지크프리트 바스만에 대해 지나가듯 언급했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바스만은 훌륭한 대마도사였어. 비록 나 정도의 워 메이지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학구열이 뛰어났고 특히 마법진을 잘 활용했지.’
나 역시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영혼을 흡수하며 경험을 쌓은 도플갱어가, 생전의 대마도사보다 더욱 강력하게 거듭났으리라는 확신도 함께.
‘삼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애매한 시간.
그러나 대마도사의 힘과 영혼을 취한 도플갱어가 여러 안배를 끝마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플갱어가 문득 혀를 찼다.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우웅.
힘주어 내뱉은 한 마디와 함께,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공명음(共鳴音).
찰나의 순간 스켈레톤 킹과 시선을 교환한 내가 입을 열었다.
“병신이냐? 사람도 아닌 새끼가 물어보니까 대답을 안 하지.”
“흠. 위아래가 없군. 지크프리트 바스만이면 이 세상에선 제법 존경받는 영웅일 텐데.”
“그렇지. 내가 아는 그 대마도사라면. 하지만……”
나는 창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몬스터 새끼는 예외로 쳐야지.”
지크프리트 바스만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른다. 본 적도, 직접 겪어 본 적도 없다. 교과서와 주위 사람들의 증언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낱 껍데기를 뒤집어쓴 놈의 조롱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더러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금 내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이유는, 그것이 도플갱어가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반응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비록 도플갱어를 겨누고 있던 창날은 내렸지만, 마음속에 품은 또 다른 창은 아직도 놈을 향하고 있다.
나는 대기의 기운을 서서히 끌어모았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그리고 조용히.
그것은 이번에 중단전(中丹田)의 효용을 일부 깨달으며 얻게 된 묘리 중 하나였다.
‘텔레포트 마법의 여파를 수습하기도 전에 너무 큰 힘을 소모했다.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
이건 스켈레톤 킹도 마찬가지다. 다만 녀석은 이미 죽어 있는 몸이었기에 오히려 나보다도 상황이 나았고, 대기에 분포된 마력을 조금씩 흡수하고 있었다.
만약 내 신호가 떨어진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껄이고 있는 도플갱어의 목을 쳐 날릴 수 있도록.
“몬스터라. 그래, 그랬지. 근 수십 년 동안은 하도 인간들이랑 어울려서 그런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었단 말이야.”
턱을 긁적이던 도플갱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한 가지는 잊지 않았지. 바로 이곳. 이곳에서 들었던 주인님의 명령.”
나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도플갱어의 주인.
놈이 미카엘 실베르트를 허수아비로 내세웠듯이, 도플갱어를 이 세상에 뿌리내리게 한 바로 그 존재.
“설마…….”
흐려지는 말꼬리.
문득 차오른 의문에 가슴이 울렁였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단번에 눈치챈 것처럼, 도플갱어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지금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한번 맞춰 볼까?”
그 미소에, 가슴 한구석이 덜컥 가라앉는 것은 어째서일까.
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가리 닥쳐.”
“왜, 궁금해하지 않았나?”
“누구든 상관없어. 만에 하나…….”
마치 모래알을 한 움큼 집어삼킨 것처럼, 입 안이 꺼끌거린다.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주인이 마왕 아스모데우스라고 해도.”
“……!”
공기가 흔들린다. 스켈레톤 킹의 동요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마왕(魔王).
인간 중 누구도 닿지 못한 죽음의 땅, 마계의 주인이자 몬스터들의 군주.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인류에게 있어 화인(禍因)과도 같은 존재인 동시에, 재앙 그 자체로 각인된 존재다.
놈의 등장으로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고, 문명이 뒤집혔으며, 수많은 이들이 소중한 사람을 잃어야 했다.
바로 나처럼.
‘아버지.’
그리운 얼굴이 눈앞을 스친다. 우리 가족에게 들이닥친 불행은 찰나였지만, 슬픔과 그리움은 영원했다.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때보다 냉정해야 할 지금,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이유는.
눈앞에서 웃고 있는 저놈의 아가리를 찢어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대답을 원하는 이율배반적인 이 충동은.
우득.
어느새 한껏 힘이 들어간 손아귀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도플갱어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놈은, 마왕은 이미 죽었어.”
그리고 그 순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더욱 짙어지는 도플갱어의 미소를. 뒤이어 되묻는 목소리에 담긴,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을.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