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29
#828화
두려움에도 종류와 정도가 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계곡에 빠졌던 기억으로 평생을 물 공포증에 시달리고, 지진을 겪은 이들은 낙인과도 같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깊은 것은 바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다.
지금껏 누구도 본 적 없는, 혹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영역.
미지(未知)란 그런 것이다.
과학과 마법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인류조차 완전히 닿지 못한 우주, 심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온 사방을 찢어발기는 저 한 줄기의 불꽃과 같은.
콰아아아!
그것은 마치 폭풍 같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예리하고,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불의 폭풍.
도플갱어는 아연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열기를 뿜어내는 청백색의 화염이, 그의 두 눈동자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슈화악!
찢고, 가르고, 벤다.
바람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난 삼 년간 공들여 빚어 낸 골렘(Golem)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거대하고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다리도, 대지를 가르며 내려 찍은 무기도 소용없었다.
화륵, 콰드드득!
녹아내린다. 부서진다.
자그마치 일흔두 기에 달하는 골렘이 그저 한낱 돌무더기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고, 그건 도플갱어가 후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온 사방을 찢어발긴 화염에 의해 파괴된 것은, 비단 저 골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콰창.
요동치는 거대한 기운.
휘황한 빛무리를 흩뿌리던 마법진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도플갱어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반투명한 막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이게 무슨…….”
그러나 채 목소리가 이어지기도 전에, 신체 깊숙한 곳에서 울컥 솟구친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입안으로 흘러넘쳤다.
쿨럭.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 낸 도플갱어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지크프리트 바스만의 기억 속에서 떠오른 지식이 그의 텅 빈 머릿속을 후려쳤다.
마나 역류.
수많은 마법진과의 연결이 강제로 끊기자 전신의 기운이 들끓어 오른다.
만약 그가 여러 매개체와 술식을 통해 마법진을 준비하지 않고 직접 마법을 발현시켰다면, 몇 번을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심각한 타격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도플갱어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경악으로 가득 찬 두 눈동자에는 더 이상 한 줌의 여유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미지(未知)처럼 느껴지는 한 인간만이 선명히 비치고 있을 뿐.
‘진태경.’
그가 보인다.
새하얗게 빛나는 은빛 창을 쥔 채 머리 위로 쏟아지는 골렘들의 잔해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그가.
이내 화염에 의해 녹아내린 마법진이 남긴 빛무리 사이로, 자신을 응시하는 포식자의 모습이.
“다시 지껄여 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그러나 용암처럼 들끓는 목소리가 도플갱어의 귓가를 파고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그를 향해 다가온다.
저벅.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온 사방이 굉음으로 가득한데. 기둥을 잃은 신전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한때 골렘이었던 암석들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는데…….
저벅.
저 작은 인간의 발걸음 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는 것이. 뒤이어 들려온 그 목소리에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는 사실이.
“도대체 누가, 이곳의 주인이라고?”
“……!”
그 순간, 도플갱어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려는 비명을 삼켜야 했다.
진태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또렷한 공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괴물. 저 인간은 괴물이었다.
그것도 매번 예상과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앞서 전장에서 무수한 죽음을 겪은 뒤, 진태경을 경시하던 마음을 이미 일찌감치 내버렸던 도플갱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번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모든 것이 문제없이 흘러갈 것이라고.
진태경은 결코 자신을 잡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누구보다 먼저 전장에서 이탈했던 도플갱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진태경이 더 높은 경지로 발돋움했다는 것을 몰랐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다.’
영원한 소멸.
머릿속을 스친 생각과 함께, 서늘한 공포가 등골을 타고 기어오른다.
동시에 이어진 움직임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도플갱어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영혼들을 아낌없이 불태웠다. 마나 역류로 엉망이 된 신체를 치유하고, 다시 충만하게 차오른 기운을 두 손에 담아 펼쳤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저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을 향해.
진태경을 향해.
화아악!
아득한 섬광이 터져 나온 그 순간.
“안 돼!”
그보다 한발 앞서 도플갱어를 향해 쇄도해 가던 스켈레톤 킹이 황급히 신형을 틀어 섬광의 앞을 가로막았다.
팟!
평소의 스켈레톤 킹이었다면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을 것이다.
말로는 온갖 허풍을 떨어 대도, 진태경이 자신을 뛰어넘는 강자라는 것쯤은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간악한 인간을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이 몸뿐이다.’
지킨다. 설령 자신이 위험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스켈레톤 킹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유?
그런 것 따위는 어느 날부터인가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는 어떤 이유도 없는 법이니까.
쏴악!
스켈레톤 킹은 [영웅의 검]을 내리그었다.
마력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마치 햇빛처럼 환한 황금빛 마력이 섬광을 갈랐다.
아니.
갈랐다고 생각한 그 순간, 검신을 안개처럼 통과한 섬광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후웅.
‘이게 무…….’
뇌리에 떠오른 의문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빛이 스켈레톤 킹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아아악!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단번에 시력을 상실했을 그 아득한 섬광 속에서, 스켈레톤 킹은 뒤늦게 의문에 대한 답을 떠올렸다.
‘제기랄.’
틀림없다.
이건 중하급 정도의 마법사들도 손쉽게 발현시킨다는 라이트(Light) 마법이다.
그러나 살상력이 떨어지고 빛의 농도도 옅은 편이기에 실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순한 편의성 마법.
적어도 스켈레톤 킹은 그렇게 알고 있었고, 헌터계에서는 정설(定說)처럼 받아들이는 내용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지크프리트 바스만이라는 학구파 대마도사가 은신처에 틀어박힌 채 숱한 마법을 연구했으며, 그중 라이트 마법의 위력과 효용성을 몇 단계나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 뼈아픈 실수는 스켈레톤 킹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스켈레톤 킹의 본질은 언데드고, 이는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력을 지녔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도플갱어라는 강적과 맞서 싸우는 도중에, 그것도 다른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잠시나마 시력을 잃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어. 내가 막아설 걸 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세상 속에서, 스켈레톤 킹은 검을 치켜세웠다. 시력의 상실과 함께 한껏 청각이 주위의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다.
뒤늦게 떨어진 돌무더기로 인한 굉음.
저 허공 위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금 가는 소리.
그리고…….
다른 존재는 들을 수 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 놓치지 마.
“……!”
진태경의 전음(傳音)을 들은 스켈레톤 킹은 깨달았다.
분명 자신을 쓰러트릴 절호의 기회임에도, 왜 어떤 마법도 날아들지 않았는지.
동시에 공기를 타고 은밀하게 전해지는 이 기운이 무엇인지.
‘텔레포트!’
스켈레톤 킹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도플갱어는 지금, 혼신의 힘을 다하여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려 내고 있었다.
걸출한 대마도사의 영혼을 취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후회를 동시에 느끼며.
‘이런 개 같은……!’
도플갱어의 본질이 마력과 친숙한 몬스터라고는 하나, 지금은 한낱 인간의 몸.
당장 진태경이라는 괴물에게서 완전히 멀어지기 위해 텔레포트 마법을 마법진 없이 사용한다면, 부활의 기회조차 없이 먼지처럼 바스라질 것이 뻔했다.
스아아아.
허공을 내저은 손을 따라 흘러나온 마나가 도플갱어의 전신을 조금씩 휘감았다.
비록 마법진을 완성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위험성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다.
육체가 흔적도 없이 산산이 분해되는 수준에서, 상반신 정도는 건질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도플갱어가 살아남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심연의 괴물은 자신의 소멸이 걸린 이 신중한 문제에 방해꾼이 끼어드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쉭, 카앙!
순식간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날아든 뼛조각이, 빠르게 펼쳐 낸 방어 마법에 막혀 튕겨 나간 것은.
쉬쉬쉬쉭! 카가강!
얼마 남지 않은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던 도플갱어가, 쉼없이 뼛조각을 쏘아 보내는 스켈레톤 킹의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뭐지? 아직 지속 시간은 한참 남아 있을 텐데.’
대마도사의 기억에 따르면 마법은 완벽했고, 허점을 정확하게 찔러 시야를 뺏었다.
전투에서 시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도플갱어가 굳이 더 나서서 스켈레톤 킹을 무력화시키지 않은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만만치 않은 강자일뿐더러, 무슨 짓을 더 벌일지 모르는 진태경을 피해 멀리 도망치는 것이 더욱 급선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스켈레톤 킹의 움직임은 도플갱어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고 있었다.
콰창!
가파른 속도와 강한 힘.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한 방향으로 쏘아진 뼛조각이 마침내 방어 마법을 산산조각 낸다.
찰나의 틈을 타 블링크 마법으로 위험을 벗어난 도플갱어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도대체 어떻게…….’
상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면 알 수 있다. 저건 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공격들이다.
분명 라이트 마법에 직격당했음에도, 지금의 스켈레톤 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팟.
흐릿해진 신형이 공간을 가로질러 쇄도한다. 동시에 황금빛 마력을 머금은 검신이 유려한 선을 그렸다.
주인의 뜻대로.
그리고 주인의 귓가에 닿은 누군가의 목소리대로.
― 좌로 일 보(步).
그 순간.
슈확!
거침없이 쏘아지던 스켈레톤 킹의 신형이 흔들렸다.
흩날리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를 스쳐 지나간 얼음의 창이 돌무더기를 강타했다.
쾅! 쩌저적!
서늘해진 공기. 스켈레톤 킹은 자신의 감각과, 귓가로 전해지는 전음을 따라 움직였다.
― 우로 삼 보. 횡격.
서걱!
덩굴 식물을 불러내 상대를 속박하는 마법인 바인딩(Binding).
그 쇠사슬처럼 두껍고 단단한 식물의 줄기가 단번에 끊어지고.
― 숙여.
수십여 발의 매직 미사일이 텅 빈 허공을 관통했다.
― 십 보 전진. 꿰뚫어 버려.
퍼퍼펑!
대마도사의 힘으로 펼친 마법답게, 위력은 강력하고 폭발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 어떤 마법도 스켈레톤 킹에게 닿지 못했고, 도플갱어는 어느새 불과 열 걸음 안까지 들이닥친 그의 모습을 보며 헛숨을 삼켰다.
‘벌써……!’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스켈레톤 킹은 쉴 새 없이 뼛조각을 쏘아 보내며 마법진의 완성을 방해했고, 공격 마법을 피하거나 베어 가르며 모조리 파훼했다.
‘이 정도였나? 저 변종이?’
하지만 도플갱어가 떠올린 의문은, 스켈레톤 킹의 초점 잃은 눈동자를 본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이, 의문의 빈자리를 채웠다.
‘놈이었어. 처음부터.’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간신히 서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걸까.
도플갱어는 혼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블링크 마법.
그 찰나의 깜빡임이 다시 한번 스켈레톤 킹과 거리를 벌렸다.
아니, 벌렸다고 생각했다.
수 미터의 공간이 사라지기 직전, 블링크 마법의 발현보다 앞서 스켈레톤 킹의 귓가에 닿은 음성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 다섯 시 방향. 나아가면서…….
도플갱어의 신형이 흐릿해지기 전, 방향을 틀어 쏘아져 온 스켈레톤 킹이 검을 들어 올렸다.
솨아아아.
느려진 세상 속.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 마력이 파도처럼 솟아오른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공간을 갈랐다.
― 하늘부터 땅끝까지. 내리그어.
슈확!
황금빛 섬광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텅 빈 공간이었던 그곳에 우뚝 서 있던 심연의 괴물을 갈랐다.
서걱, 푸화악!
정수리로 시작하여 가랑이까지 이어진 붉은 선.
이내 터져 나온 핏물과 함께, 탄식과도 같은 전음이 스켈레톤 킹의 귓가에 닿았다.
― 아, 시발. 맞다. 내 경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