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30
#829화
도플갱어.
수백여 년간 존재해 왔던 최후의 심연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느꼈다.
쇄도하는 스켈레톤 킹.
거리를 벌리기 위한 블링크 마법.
그리고…….
슈확.
불현듯 귓가에 닿은 나직한 파공성과 함께, 시야를 가득 메운 황금빛 검광(劍光).
그 모든 것은 그야말로 찰나에 이루어졌고, 찰나에 끝났다.
마계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탄생한 심연의 괴물이, 어떤 반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서걱.
뜨겁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던 일격이 정수리를 가른다. 살과 뼈를 도려내고, 장기와 마나를 집어삼키며 사타구니까지 내달렸다.
마치 한 줄기의 벼락처럼.
‘아.’
도플갱어는 소리 없는 탄식과 함께 뒷걸음질 쳤다.
아니, 걸음을 떼었다고 느낀 순간 피 분수를 흩뿌리며 허물어졌다.
푸화아악!
선홍빛 핏물로 뒤덮인 시야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도플갱어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을 인지함과 동시에, 지난 삼 년간 단단히 옭아매었던 영혼의 고리가 뜯겨 나갔다.
‘지크프리트 바스만.’
도플갱어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한때 영웅으로 칭송받던 대마도사의 마나가, 기억이, 아끼고 아껴 왔던 귀중한 생명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는 마지막 비행기의 티켓이, 지금 막 매진됐다는 것을.
철퍽.
정확히 두 갈래로 나뉜 몸뚱어리가 피 웅덩이에 처박혔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죽음.
그리고 순리를 거스른 부활.
팟!
새로운 생명, 새로운 몸뚱어리에서 다시 태어난 도플갱어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텔레포트 마법으로 도주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아직 활로는 남아 있었다.
‘최대한 멀리 떠난다. 남은 목숨을 모조리 바쳐서라도!’
지금껏 살아온 세월만 장장 수백 년이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살아남기 위해 왕의 발치에 엎드렸고, 머지않아 도래할 그날에 확실한 보상을 약속받았다.
마계 72군단장? 오만하고 강대한 그들조차도 감히 자신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차피 그중 상당수는 이미 죽기까지 했다.
군단장 중 하나였던 레비아탄이 진태경에게 죽임을 당한 걸 알고 얼마나 비웃었던가.
그런데 그런 자신이, 위대한 왕의 오른편에 설 그가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할 수는 없다.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 수 없어.’
도플갱어는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숨겨 놓았던 신전의 출입구를 향해서.
머지않은 미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무수한 영광을 향해서.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살기 위해 달려가는 것은 자신의 하반신뿐이라는 것을.
서걱-
뒤늦게 울려 퍼진 절삭음이 귓가에 닿았다.
이미 잘려 나간 도플갱어의 상반신이 허공에서 기울어졌다.
몸이 분리된 것도 모르는 채, 처음의 힘 그대로 달려 나가는 하반신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동자에 아득함이 깃들었다.
“이런 개 같…….”
쉬쉬쉬쉭!
채 끝맺지 못한 한마디가 거센 파공성에 파묻힌다.
수십여 개의 육편(肉片)으로 화한 상반신이 허공에서 흩어짐과 동시에, 스켈레톤 킹의 검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푹!
“끄읍.”
억눌린 비명.
조금 전의 처참한 죽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잘게 조각난 신체의 한 부위에서 새로운 몸뚱어리를 얻어 재탄생한 도플갱어가 몸부림쳤다.
가슴이 관통당한 상황에서도 붉게 핏발 선 눈동자는 오직 입구만을 향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으을!’
도플갱어는 들리지 않는 욕설을 내뱉으며 후회했다.
지난 삼십여 년간 인간들에게서 갈취한 영혼이 몇이던가. 또 그중 강자라 불리는 이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모른다. 도플갱어 자신조차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단지 일종의 수확에 가까웠다. 양계장의 주인이 매일 아침 암탉이 낳은 알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도플갱어는 인간들의 영혼을 모았고 그중 대부분을 거리낌 없이 소모했다.
상관없었다.
아무리 줄어들어도 채워 넣으면 그만이었고, 채우지 않아도 충분했다.
아니, 충분했었다.
적어도 오늘,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을 만나기 전까지는.
슁.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예리한 칼날이 가르고 지나간 목의 단면에서 죽음과 탄생이 동시에 찾아온다.
아니, 도돌이표처럼 끝없이 반복되었다.
서걱! 푹! 쉬쉬쉭!
베이고, 찔리고, 수십 조각으로 분해되어 흩어진다.
그럴 때마다 도플갱어는 사내, 여인, 노인의 모습으로 죽고 되살아났다. 그들에게서 빼앗은 힘과 기억을 바탕으로 입구를 향해 가까워졌다.
백여 미터의 거리가 수십여 미터로.
수십여 미터의 거리가 수 미터로 좁혀질 때까지.
이제는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게 된, 하나하나가 귀중해진 목숨을 내던지며.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잃어선 안 된다.’
소멸(掃滅)이라는 단어와 함께 공포가 고개를 든다.
일천을 헤아리던 수많은 생명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는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생명력을 느끼며, 도플갱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또 다시 일어났다.
스륵. 쏴아악!
마치 옛 동화 속에 등장하는 콩 나무처럼 순식간에 재생된 신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탄생과 함께, 도플갱어는 황급히 몸을 굴렸다.
촤악!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등줄기를 훑는다.
하지만 고통의 잔재보다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컸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몸을 날리는 도플갱어의 모습에, 스켈레톤 킹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푸푸푹!
순간 비틀거리는 신형.
도플갱어는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삼켰다.
가슴 한복판에 비죽 솟아 있는 새하얀 무언가가 보였다. 동시에 종아리를 관통해 지면 깊숙이 틀어박힌 또 다른 뼛조각도.
“어딜 도망가려고.”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등 뒤로 불어닥치는 바람.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스켈레톤 킹의 기척을 느낀 도플갱어가 이를 악물었다. 종아리와 지면을 꿰뚫은 뼛조각은 말뚝처럼 견고했다.
으득!
스켈레톤 킹에 비하면 한참이나 떨어진다고는 해도, 새로운 육신 역시 A급 헌터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수준.
스스로 무릎 아래를 뜯어낸 도플갱어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외다리를 움직였다.
온 힘을 끌어 올려 지면을 박찼다.
쾅!
굉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전신을 스친다.
어느덧 코앞까지 가까워진 신전의 입구를 바라보는 도플갱어의 눈동자가 열망으로 들끓었다.
이곳만. 이곳만 빠져나간다면.
어떻게든 소멸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맹세코, 너희가 지키고자 했던 이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비밀의 문을 향해 손을 내뻗은 순간.
쐐애애애액.
저 멀리 어디선가.
콰직!
공간을 가르며 날아든 섬광이 도플갱어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산산이 찢고 부수었다.
까맣게 물든 시야 속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도플갱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씨벌 새끼가, 손님 불러 놓고 어딜 가.”
그 음성이 어찌나 서늘하던지.
반면 몸 안을 파고든 창날에서 터져 나온 불길은 어찌나 뜨겁던지.
화륵.
콰아아아!
온통 푸르고 희게 물든 시야 속, 청백색의 화염에 휩싸인 도플갱어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한때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던 육신이, 생명력이 모조리 재가 되어 타들어 갈 때까지.
그리고 지금껏 쌓아 왔던 모든 거짓이 불타오른 그 자리에, 단 하나의 진실이 남을 때까지.
저벅, 저벅.
솨아아아.
비틀비틀 나아가는 발걸음을 따라 불어온 바람이 잿가루가 흩날린다.
소복하게 쌓여 있던 그것의 틈바구니에서 검고 희뿌연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래.”
스켈레톤 킹의 부축을 받아 앞에 선 진태경은 은은한 빛이 어린 눈으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온통 거짓으로 점철된 존재의 유일한 진실. 그 하찮은 본질을 꿰뚫었다.
[Lv.10 도플갱어]“고작 이 정도였구나. 너는.”
– ……!
그림자가, 아니 도플갱어가 몸을 떨었다.
* * *
단지 서 있는 것뿐인데도, 그뿐인데도 호흡이 가쁘다.
서서히 멀어지는 감각과 흐릿한 시야 속에서는 가파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진다.
쿵. 쿵쿵.
마지막 일격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대가일까.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만약 스켈레톤 킹이 나를 부축하지 않았다면 진작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마(睡魔)을 밀어내고, 스켈레톤 킹의 부축마저 풀어 내며 두 다리로 우뚝 섰다.
그리고 굽어보았다.
어린아이처럼 작고, 어린아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순수한 악(惡)으로 이루어진 그림자를.
이제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된 끔찍한 존재를.
“그래, 고작 이 정도였어.”
앞서 했던 말을 혼잣말처럼 뇌까린다.
겁먹은 듯 부르르 몸을 떠는 도플갱어의 모습을 보자, 놈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레벨 창을 보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Lv.10 도플갱어]레벨 10.
그게 전부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헌터로 치면 F급 중에서도 밑바닥이고, 무림인으로 치면 이제 막 공력을 겨우 느끼기 시작한 삼류 칼잡이 수준.
그것이 [진실의 눈]으로 확인한 도플갱어의 본질이었다. 근원이며 오직 하나뿐인 진실이었다.
‘겨우 이런 놈한테.’
차오르는 말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감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는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처참하게 파괴당한 도시.
곳곳에서 솟구친 연기 사이로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인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귓가에 울려 퍼진다.
도플갱어가 벌인 테러로, 몬스터들로 인하여 도대체 몇 명이 죽었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터전을 잃고, 소중한 가족과 친구를 떠나보내야 했나.
수십만? 수백만?
모른다.
도플갱어가 세상에 스며든 지 어언 삼십여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으니, 놈이 장막 뒤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까드드득.
한껏 힘이 들어간 두 주먹.
손톱이 깊게 파고든 살갗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지만, 어느 것 하나 사라지지 않았다.
폐허가 된 도시도. 죽은 이의 눈에 깃든 공허함과 살아 있는 이들의 울부짖음도.
그 모든 것을 머리가 기억한다.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눈과 귀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중 유일하게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콰득.
– 컥. 커허헉.
공력이 실린 발끝이 그림자를 짓누른다.
이런 저주받은 형태로도 고통을 느끼는지, 억눌린 신음과 함께 몸부림치던 도플갱어가 애원했다.
– 사, 살려…….
“살려 달라고?”
– 그래, 뭐든. 뭐든 할 테니까! 그럴 테니까!
문득 멍해진 나는 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남아 있는 공력을 끌어모아, 발끝을 향해 거세게 흘려보냈다.
우득. 우드득!
– 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는 도플갱어의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던 그때.
스켈레톤 킹이 불현듯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인간.”
“왜?”
그저 반문했을 뿐인데, 내 얼굴을 마주한 스켈레톤 킹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지치고 힘들어하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껏 본 적 없는 분노로 일그러져 있을까.
아마도 후자였을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도플갱어가 내 표정을 보고 비명을 멈췄으니까.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으니까.
– 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다! 모두 왕께서 시킨 일이라는 사실을 잊었단 말이냐!
왕.
마왕 아스모데우스.
놈의 외침과 함께 떠오른 그 존재의 이름에,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분노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