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32
#831화
분명,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콰창.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
그것은 내 주위를 둘러싼 허상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였고, 깊이 잠들어 있던 정신을 일깨우는 알람이었다.
화아악.
주위의 풍경이 아이스크림처럼 빠르게 녹아내린다. 또렷하게 들리던 함성이 메아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 돌겨억!
이 대전쟁의 마지막, 어쩌면 인류의 운명이 걸렸을 최후의 전투.
영웅의 검을 높게 치켜든 채 앞으로 나선 최 팀장과 그 뒤를 따르는 무수한 헌터들이 물결처럼 나아가고 있었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저 어딘가를 향해.
그곳에 홀로 우뚝 선, 짙은 어둠을 망토처럼 두른 한 존재를 향해.
‘안 돼.’
아직은. 아직은 안 된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오롯이 내 것이 된 몸뚱어리를 움직여 놈을 향해 걸음을 뗐다.
마왕 아스모데우스.
거대하지도, 흉측하지도 않은 재앙의 뒷모습이 보인다.
비록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허상이라 해도,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그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짙은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놈의 모습을, 그 안에 웅크린 힘을 잠시나마 느끼고 싶었다.
‘더. 조금만 더!’
모르겠다.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내 간절한 외침이 닿았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보고 느낀 이 모든 게 허상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인지.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소리도 없었던 내 외침에 어떤 존재가 반응했다는 것뿐이었다.
스륵.
천천히 돌아서는 신형. 넘실거리는 어둠.
“……!”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마왕은 분명 나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고, 그것이 곧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파앗.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최 팀장과 샤오 쉔, 수많은 헌터들. 그리고 마왕 아스모데우스까지.
그러나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심연(深淵)과도 같은 기운이 사방을 옥죄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혼란스러웠다.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또 다른 허상인지. 아니면 이미 한계에 달해 있던 내가 의식을 잃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의문에 사로잡힌 그 순간.
띠링.
– 당신은 선택받은 자. 방주의 주인.
– [시스템]이 자동으로 방화벽을 실행합니다.
– [시스템]이 새롭게 감지된 바이러스를 차단합니다.
– [심연의 늪]이 해제되었습니다.
– [심연의 힘]이 흩어집니다.
– [Lv.10 “최후의 심연” 도플갱어]가 차단되었습니다.
띠링. 띠링. 띠링.
맑은 종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던 어둠이 빠르게 흩어졌다.
두려운 무언가를 마주한 듯이, 거칠게 몸서리치며.
그리고 나는 이 심연의 정체를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내게 들이닥친 그 수많은 허상을 불러온 존재도.
‘도플갱어.’
문득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가 떠오른다.
당신이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도 당신을 바라본다.
그 짧은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달랐으나 내게 벌어진 일이 그와 같았다.
나는 도플갱어를 바라보았고, 도플갱어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는 놈이 만들어 낸 심연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니, 그랬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것이 현실 속의 또 다른 허상이라는 것을. 도플갱어가 지닌 권능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화륵.
텅 비어 있던 두 손에서 솟구치는 열기. 눈부시게 타오르는 청백색의 화염에 어둠이 몸부림친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던 사람처럼, 열양지기로 타오르는 손을 뻗어 어둠을 움켜쥐었다.
콰득.
동시에 힘주어 찢어발긴 순간.
촤아아악!
나는 보았다.
화염에 의해 잿더미가 된 어둠이 힘없이 스러지는 모습을. 그 너머로 내가 기억하는 세상이 나타나는 광경을.
후욱.
먼지가 뒤섞인 공기가 코와 입을 통해 흘러들어 온다.
허공에서 잠시 멈춰 있던 돌 부스러기가 다시 떨어져 내리고,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는 스켈레톤 킹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찰나였어.’
현실에서는 1초 남짓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하지만 나는 최소 몇 시간 동안, 수년간의 허상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아마도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이들 중 살아남은 자는 없을 것이다. 모두 도플갱어에 의해 흡수당했을 테니까.
“이게 무슨…….”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고, 설명할 시간도 없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스켈레톤 킹에게 대답 대신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녀석을 뒤로 한 채, 넋 나간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도플갱어와 마주했다.
– 넌, 너는 도대체…….
스르륵.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몸뚱어리가 조금씩, 동시에 계속해서 흩어진다.
앞서 내가 화염이 깃든 두 손으로 찢어 낸 것은 단순한 허상이 아닌 놈의 몸뚱어리였고, 생명 그 자체였다.
“마지막 발악, 잘 봤다.”
– ……!
“그래, 아까부터 왕왕거리면서 열심히 짖어 대던 개새끼가 너무 쉽게 협조한다 싶었지.”
툭 던지듯 건넨 한마디에 도플갱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치 핏물처럼 울컥거리며 샘솟는 어둠이 잿가루처럼 흩어질 때마다, 놈의 육신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솔직히 시도는 괜찮았어. 평소 몸 상태 같았으면 애초에 어림도 없었겠지만…… 어떤 시벌놈이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올 줄은 몰랐거든.”
–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너 같은 새끼도 있는데, 나 같은 새끼라고 없을 건 또 뭐냐.”
도플갱어가 신음처럼 뇌까렸다.
– 선택받은 자…….
선택받은 자. 방주의 주인.
왜 도플갱어와 시스템이 나를 이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누가 나를 선택했는지도, 방주가 무엇인지도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를 지칭하는 저 두 개의 단어가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면, 도플갱어가 보여 준 그 좆 같은 광경을 막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리라는 것쯤은 안다.
– 각오해라. 네가 본 그 모든 광경이 곧 미래이자 현실이 될 테니.
“확실해? 내가 천재는 맞지만, 딱히 요절할 생각은 없어서.”
내 대답을 들은 도플갱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미 완전한 소멸을 받아들인 놈에게서 숨길 수 없는 허탈함과 광기가 묻어났다.
– 왕께서 돌아오신다면, 그때에도 네놈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허상에서 봤던 그 짙은 어둠을 떠올렸다.
끝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로 떠나보내야 했던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마지막 모습을, 단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던 강대함을 떠올렸다.
‘만약 놈과 맞붙는다면, 과연 내가 승리할 수 있을까.’
공허한 질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까.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강하다. 아니, 강함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존재다.
허상이 아닌 현실이었다면, 내가 느낀 그 힘이 진정 사실이라면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굳고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되고는 한다.
그 문제를 푸는 사람이 바로 나라면 더더욱.
“지금의 나라면 틀림없이 죽겠지. 제대로 된 상처도 못 입히고 처참하게.”
내 대답을 들은 도플갱어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이미 절반도 넘게 사라진 제 몸뚱어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 그래, 그것이 진실이다. 왕께서 내리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네놈이 할 수 있는 전부…….
“전제(前提)를 빼먹으면 안 되지.”
– 뭐?
말을 멈춘 도플갱어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게 가장 중요한 전제야.”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바뀌었다. 살아남기 위해, 지키기 위해 바뀔 수밖에 없었다.
F급 헌터로 살아오며 간직했던 조심성을 내던졌고, 때로는 과감하고 그 이상으로 무모하게 적과 맞섰다.
그리고 내가 목숨을 건 싸움을 치를 때마다 위험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얻어 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지금의 나와 훗날의 나는 다르다.
그러니 미래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어떤 위험을 치르더라도,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내 힘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며,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선택한 이유일 테니까.
“허상은 그저 허상일 뿐이야.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당장 뒈질 것 같은 어떤 새끼는 이미 세상에 없을 테니 알 바 아니고.”
중단전을 움직이는 것은 심력(心力)이며, 심력은 곧 마음의 굳건함.
나는 끔찍한 허상 따위에, 도플갱어가 지껄이는 말 몇 마디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걸 잊었나 본데.”
피곤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하지만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는 도플갱어를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었다.
“그 미래는 이미 바뀌었어.”
나는 핏물에 굳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쏟아지는 졸음을 견뎌 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세웠던 계획을, 내 손으로 끝장냈으니까.”
도플갱어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얻고자 했는지는 모른다.
놈을 통해 직접 전해 듣고 싶었지만, 불과 몇 초 후면 완전히 소멸할 테니 이제 와서 물어봤자 헛수고일 것이다.
그러나 전부 알아내면 그만이다.
전 세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도플갱어의 흔적을 좇고, 놈이 어딘가에 남겨두었을 잔뿌리들을 뽑아내면 허상은 허상으로 남을 것이다.
끔찍한 재앙으로 가득하던 미래에는 평화가 깃들 것이다.
‘할 수 있다.’
이건 단순한 바람이 아닌, 확신이다.
마침내 세계가 하나로 모였다. 나는 평화에 취해 방심하고 있던 이들에게 경종(警鐘) 울렸고, 현실을 외면하고 있던 권력자들의 면전에 찬물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인류의 검과 방패라 불리는 이들을, 수많은 헌터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에 세웠다.
세계 헌터 연맹.
성별과 인종.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집단.
나는 그 거대한 연맹의 정점에 선 맹주(盟主)다.
모두가 나를 추대했고, 모두가 나를 믿고 따른다. 그렇기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마음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힘을 잃은 말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의지와는 반대로 천천히 기울어지는 시야 속, 아무런 말도 없이 불현듯 다가온 스켈레톤 킹이 팔을 뻗어 나를 부축했다.
아직 끝맺지 못한 말을 이어 나가도록 도왔다.
“더 이상 개지랄 떨지 말고, 먼저 떠난 네 친구 새끼랑 어깨동무하고 구경이나 해.”
후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힘차게 내리찍은 발끝.
그리고 그 순간. 문득 흐릿한 시야에 잡힌 알 수 없는 광경.
‘웃……어?’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놈이 웃었다고 느낀 것이 피로가 불러온 허상이었는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는지.
그리고 그 찰나의 의문을 미처 되짚어 보기도 전에, 이미 미약한 화염이 깃든 발끝이 그림자를 짓밟았다. 아득한 세월을 살아왔던 괴물을 소멸로 이끌었다.
쾅!
굉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그림자. 그 사이로 울려 퍼지는, 도플갱어의 소멸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
띠링.
끝났다. 마침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곧이어 귓가를 파고든, 불쾌한 소음을 듣기 전까지는.
삐빅.
– 메인 퀘스트, [격변]이 실패했습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