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38
#837화
퍼버버버벙!
화염과 함께 피어오르는 새하얀 연기.
동시에 이백여 장의 거리를 격하고 쇄도한 쇳덩이들이 쾌조선을 부수고 그 위의 사람들을 잘 다진 어육(魚肉)처럼 짓뭉개……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이 세상이 21세기의 현대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공이지, 과학이 아니니까.
퍼엉, 촤아아악!
쾌조선이 아닌 수면을 후려친 쇳덩이에, 힘을 이기지 못한 물줄기가 파도처럼 솟아오른다.
그 여파에 휘말려 재수 없게 갑판까지 날아온 생선을 허공에서 잡아챈 태산이 울상을 지었다.
“태산이. 슬프다. 이거 오향장육 아니다.”
“…….”
오향장육 원산지가 언제부터 장강이었나.
짜게 식은 눈빛으로 태산을 노려보던 나는, 어느새 다른 수적들처럼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아 있는 수룡채 부채주의 뒤통수를 툭 쳤다.
“일어나요. 수적이라는 양반이 뭘 그렇게 바짝 쫄아 있어.”
“헉. 저 살아 있습니까?”
“그럼 다 같이 죽었겠냐?”
“아니, 분명히 쏘는 걸 똑똑히 봤는데…….”
“쏘기야 쐈지. 조준은 엉망이었고.”
적어도 하루에 한두 번씩은 꼭 싸는 오줌도 간혹가다 조준이 빗나가는 마당에 구식 대포 쏘는 게 그렇게 쉽겠나.
백여 발의 쇳덩이 중 제대로 발사된 건 절반 정도고, 그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그나마 기적적으로 쾌조선 가까이 도달한 것들은 파도풀 체험을 위한 제물로 쓰였을 뿐이다.
‘하긴 뭐, 가끔 훈련할 때나 몇 번 쏴 봤을 테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온갖 군벌이 들불처럼 일어나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린 지 오래.
대격변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은 현대의 인류도 불과 삼십여 년 만에 평화에 젖고, 헌터라는 두 글자는 사명이 아닌 직업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니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이 통일 왕조의 군사들이 느슨해지는 건 당연했다.
단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왜 갑자기 우리를 향해 대포를 쏴 대냐는 건데…….
“물어보면 알겠지.”
“예?”
“그냥 혼잣말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배나 몰아요.”
“예?”
“전진하시라고. 여기서 날 샐래?”
“예?”
이 정도로 말귀 못 알아듣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얼빠진 얼굴로 되묻기만 하는 수룡채 부채주의 모습에 혀를 찬 나는 가까이에 있는 수적 하나를 불렀다.
“거기 아저씨.”
“저, 저 말입니까?”
“그래. 당신이 지금부터 임시 선장이니까 배 몰아요. 아, 혹시 모르니까 백기도 잘 보이게 걸어 두고.”
잠시 남만으로 넘어가 있던 사이 사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근처에 대포알 몇 개 떨어졌다고 관군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
제아무리 관과 무림이 불가침의 관계라지만, 무림인도 결국 이 땅의 백성. 자칫하면 반역(反逆)이라는 거창한 죄목이 붙을 수도 있으니까.
‘최근에 인근 수적 놈들이 사고라도 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쾌조선이 선착장을 향해 나아감과 동시에 수적 중 하나가 외쳤다.
“놈들이 재장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걱정되는 소식도 아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구식 대포쯤은 손쉽게 막아 낼 인간 방패들이 함께 있으니까.
“밥값 좀 하자.”
그 한 마디를 툭 던진 순간.
퍼어엉!
두 번째 발포를 알리는 굉음과 함께, 내 등 뒤에서 미세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쐐애애액!
사마표, 태산, 송일섬.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화란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갑판을 가로지른 그들이 불러낸 휘황한 빛이, 쾌조선을 향해 들이닥친 쇳덩이와 맞닿았다.
서걱! 콰아앙!
* * *
둥. 둥. 둥.
퍼버버벙!
다급함이 느껴지는 북소리와 함께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폭음.
수십 척의 놀잇배 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배에서 가기(歌妓)의 춤사위를 감상하던 청년이 피식 웃었다.
“어느 잡놈들인지는 몰라도, 운 한번 더럽게 없구나.”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와 한껏 풀린 눈꼬리. 평소 청년의 성정을 아는 탓에 눈치만 살피고 있던 이들이 그제야 따라 웃었다.
“하하, 못 배운 것들이 다 그렇지요.”
“지금이라도 공자님이 이곳에 계신 걸 알게 된다면, 배도 버리고 천 리 밖으로 도망칠 게 뻔합니다.”
“한데…… 저 깃발이 좀 마음에 걸립니다.”
누군가의 말에 청년이 반응했다.
“깃발? 깃발이 왜?”
“혹 장강수로맹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장강수로맹이라.”
술잔을 든 채 잠시 기억을 더듬던 청년이 문득 탄성을 흘렸다.
“아, 그 수적 놈들 말인가? 알지. 내가 일전에 머무르던 곳에서도 장강수로맹이라는 단체가 있었네.”
“예, 맞습니다. 강호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무뢰배 집단이지요. 한데 지금 우리 수군이 공격하는 저 배가 바로 그 장강수로맹의 깃발을 달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저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장강수로맹의 수괴는 그 성정이 흉포하고 간악하기로 유명한데. 혹여 이 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막힘 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서서히 흐려졌다.
어느새 조용해진 놀잇배 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청년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흐릿해졌다.
탁.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손길에, 담겨 있던 술이 어지럽게 튀었다.
“문제라.”
하나같이 윤기가 흐르는 비단옷에 귀티 어린 얼굴들.
그중에는 청년 또래의 젊어 보이는 이들도, 족히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중년인들도 있었지만 모두 청년의 일거수일투족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그대는 무슨 문제를 걱정하는 거지?”
“그, 그것은.”
가장 처음 말을 꺼낸 상인이 말을 더듬었다.
사천에서 제법 규모 있는 상단을 운영하는 그는 이미 괜한 말을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청년의 눈에 들기 위해 뇌물까지 써 가며 참석한 자리다.
상단을 운영하다 보니 보고 들은 것이 있어 별생각 없이 말을 꺼낸 것인데, 이제는 눈에 드는 것이 아니라 눈 밖에 나게 생겼다.
“소, 송구합니다. 공자님.”
뒤늦게 건넨 사과. 그러나 한 번 뒤틀린 청년의 심기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던 그의 눈매는 평소처럼 간교하게 위로 솟구쳐 있었다.
‘천한 상인 놈 따위가 감히…….’
청년은 고개 숙인 상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평소에도 권위와 위엄을 가장 중시하는 그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앞에서, 그것도 강호의 무뢰배 집단 따위가 걱정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장강수로맹?
이름만 거창하지, 결국 냄새나고 못 배운 수적들이 모여 만든 곳 아닌가.
제아무리 관과 무림이 불가침이라지만, 청년에게는 보는 즉시 때려잡아야 할 도적놈들에 불과했다.
특히나 몇 달 전 ‘그 일’을 겪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굳혀진 청년이었다.
“저 강호의 무뢰배들도 엄연히 대국(大國)의 백성에 불과한데, 그대들은 무엇이 걱정된단 말인가.”
차갑게 식어 버린 청년의 목소리에, 눈치만 살피던 이들도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 그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소인은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관군의 기세는 칼 같고, 이리 영명하신 공자께서 계시온데 어찌 강호인들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풍악(風樂)은 이미 화포의 폭음에 가려진 지 오래요, 나비처럼 하늘거리던 가기의 옷자락도 주위의 분위기와 함께 가라앉은 상황.
홀로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은 오만한 눈빛으로 고개 숙인 이들을 굽어보았다.
‘한심한 것들. 그깟 강호인들이 뭐라고.’
일각 전만 하더라도 기분 좋게 느껴졌던 취기는 오히려 불쾌했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던 기녀들의 자태도 전만 못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끔찍한 기억들 때문일까.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은 청년은 손을 들어 장강을 가리켰다.
“모두 고개를 들어 저 수적 놈들을 보아라! 대국의 힘 앞에 산산이 부서지는 놈들의 최후를!”
그리고 외침과 함께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어?”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그것이 가장 처음 청년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옷소매로 눈을 뽀득뽀득 문지르고 다시 보아도, 눈앞의 광경은 여전했다.
아니, 변화가 있긴 했다.
이미 진작 침몰했어야 할 놀잇배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어?”
“어머?”
“뭐여, 저게.”
고용주의 눈치만 살피던 기녀들도, 청년의 명령에 마지못해 고개를 든 이들도 눈을 깜빡이며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지?’
‘대포 안 쐈나?’
‘아닌데, 쐈는데?’
‘그러고 보니까 아까부터 계속 쐈던 것 같은데?’
‘어? 지금도 쏘고 있는데?’
누군가의 생각처럼, 십여 척의 군선은 지금도 바쁘게 포탄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처음보다 훨씬 다급하고, 정신없게.
“이, 이놈들이 미쳤나. 똑바로 쏴라!”
“똑바로 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맞아!”
“아닙니다! 분명히 맞았습니다! 소리도 났습니다!”
“그럼 왜 멀쩡해!”
“아니, 싯팔 저희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병졸의 욕설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쏘고, 쏘고, 또 쐈다. 지금까지 모든 군선에서 퍼부은 대포알만 족히 수백 발은 된다.
하지만 평소 훈련량이 부족했고, 조준을 아무리 병신같이 했어도 이쯤 되면 한 발 정도는 적중해야 예의고 상식 아닌가.
그런데…… 멀쩡하다.
어둠 너머에서 새카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저 날렵한 선박의 모습이,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도대체 왜!’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함께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두려움.
뱃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다. 포탄으로도 침몰하지 않고, 죽여도 죽지 않는다는 망자들의 배를.
‘지, 진짜 유령선인가?’
‘아니, 여긴 바다가 아니라 장강인데.’
‘그럼 장강이 바다였나?’
병졸들의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때. 어느새 놀잇배의 뱃머리에 바짝 붙은 청년은 바로 오늘 선물 받은 천리경(千里鏡)이라는 귀물의 쓰임새를 몸소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런 미친…….”
자신도 모르게 상스러운 말을 중얼거린 청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천리경을 통해 확인한, 믿을 수 없는 광경 때문이었다.
쾅! 쾅! 콰아앙!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가는 대포알들.
아니, 정확히는 선박을 향해 짓 쳐드는 대포알을 튕겨 내는 사람들.
“고, 공자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문득 귓가에 닿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잠깐 청년은 고민했다.
지금 본 이 광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혹시 미친놈이라고 오해받지는 않을지.
하지만 청년의 그 고민조차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천리경을 통해,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 어어, 어어어!”
말하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이상한 소리를 흘린 청년, 주원공이 군선을 향해 외쳤다.
“공격 중지! 중지잇! 이건 황명, 아니 황상 폐하의 팔촌 되는 몸으로서 내리는 황족명이다!”
그리고 저 멀리서 주원공을 알아본 진태경은, 그 외침을 듣고 중얼거렸다.
“황명은 들었는데, 황족명은 또 뭐야?”
박학다식한 남호가 대답했다.
“황족명은 무슨. 그냥 족 까는 소리지. 그런데 혹시 아는 놈이냐?”
“예. 그냥 뭐…….”
진태경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오다가다 목숨 한번 구해 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