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39
#838화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되는 법이다.
물론, 그중 인연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극소수다.
그렇게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한순간의 우연처럼 스쳐 지나가고, 이내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진다. 이름도, 얼굴도.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선착장에 막 발을 디딘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누군가처럼.
“진 공자! 진 공자아!”
내 인생에 있어 저놈은 우연일까, 인연일까.
나는 문득 드는 생각을 뒤로하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청년을 마주했다.
전체적으로 귀티나게 잘생긴 외모지만, 위로 솟구친 눈꼬리 때문에 간교해 보이는 인상.
아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실제 성격도 좀 그런 편이긴 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거의 잃어버린 주인 만난 반려견 수준이지만.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저질 체력이라는 사실을 몸소 입증하듯, 숨만 헐떡이던 청년이 내 중얼거림을 듣고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내 이름도 기억 못 하는 거요?”
당연히 기억 못 한다. 영화 볼 때 엑스트라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놈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기억하지, 당연히.”
“거짓말! 방금 했던 말 똑똑히 들었소!”
“잘 못 들은 거야. 내가 평소에도 얼마나 그쪽 얘기를 자주 했는데. 안 그러냐 무진아?”
아직 파릇파릇한 화룡각 뉴비들과 달리, 혁무진은 구화산에서의 일 년을 제외하면 쭉 내 곁에 머물렀던 고인물.
내 말에 담긴 신호를 읽어 낸 녀석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럼요. 평소에도 주인공 공자님에 관련된 칭찬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들었지? 주인공 공자.”
호의도 심어 주고, 이름도 알아내고.
환상적인 티키타카에 마음이 흐뭇해진 그때, 청년이 짜게 식은 눈빛으로 나와 혁무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원공이오.”
“……?”
“……?”
“주인공이 아니라, 주원공이라고.”
“……!”
“……!”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개명…….”
“했겠소?”
“아니구나, 난 또.”
“어떻게 잊을 수 있소! 나는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 춥고 어두웠던 동정호에서 느꼈던 온기가 떠오르는데!”
서럽기 그지없는 주원공의 외침에, 주위의 시선이 나를 향해 쏠렸다. 물론 한껏 숨죽인 목소리들은 덤이다.
“뭐야, 뭐야…….”
“혹시……?”
“설마……?”
“어느 날 야왕에서 쑥맥으로 돌변한 조장님이 초절정급 남색가가 되었던 건에 대하여……?”
어떤 시벌놈이 웹소설 제목 같은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익히 아는 바로 그 시벌놈이다.
혁무진을 향해 눈빛으로 사형 선고를 내린 나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느새 입을 틀어막고 있는 주화란을 예의주시하면서.
“내가 다 설명할게. 전부 오해야.”
그리고 그 순간.
“어느 날 야왕에서 쑥맥으로 돌변한 조장님이 초절정급 남색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 건에 대하여……?”
나는 오랜만에 이성을 상실했다.
* * *
“이럇!”
마부의 힘찬 채찍질에, 여섯 마리의 준마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는 잘 닦인 가도(街道)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단순한 이동 수단으로 마차를 탄다는 것은 부의 상징이요, 충분한 재력이 있는 이라면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호사였지만 육두마차는 다르다.
특히 그 마차 위로 황금빛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면 더더욱.
두두두두!
“길을 터라!”
“주원공 공자께서 행차하신다!”
수십 기의 기마병이 호위하는 거대한 육두마차. 그리고 황실(皇室)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황금빛 깃발까지 더해지니, 그 결과는 모세의 기적이었다.
“엄마. 저게 모야?”
“쉿!”
길을 지나던 양민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고, 장정 네 명이 어깨에 짊어진 사인교(四人轎)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던 살찐 권세가도 뒤뚱거리며 땅에 내렸다.
‘허, 출발 전에 들었던 말이 사실이었나?’
격자 창문 틈새로 밖을 바라보던 나는 내심 중얼거리며 주원공을 바라보았다.
무림에서의 시간으로 근 넉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잊고 있었던 놈의 얼굴은 전보다도 한층 생기가 넘치는 듯했다.
아니, 사실 좋아지는 게 당연하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주원공의 마지막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단 익사체에 가까웠으니까.
“모든 것이 진 공자 덕분이오.”
못 본 사이에 달라진 건 얼굴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관심법이라도 익혔는지 다짜고짜 말문을 연 주원공이 잘 정리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동정호에서 죽다 살아난 그 날 이후, 난 새롭게 태어나기로 마음먹었소. 주색잡기에만 몰두하던 지난날을 반성…….”
“그런 것치고는 놀잇배 띄우고 신나게 놀던데.”
내 말에 멈칫한 주원공이 말을 바꿨다.
“반성은 했는데 서서히 줄이기로 다짐하면서 신체 단련도 하고…….”
“아까 겨우 삼십여 장 달리고 쓰러지려고 하던데.”
“신체 단련이라는 게 쉽지 않으니 차근차근 진행하면서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
“결국 생각만 하고 실천은 안 하고 있다는 거네.”
대치동 1타 강사도 울고 갈 깔끔한 요약정리에, 잠시 침묵하던 주원공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요?”
“그러는 너는 왜 나한테 그랬냐.”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을 뿐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불러올 줄은 몰랐소.”
“알았어야지. 내 마음이 상처 입기 전에.”
‘어느 날 야왕에서 쑥맥으로 돌변한 조장님이 초절정급 남색가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 건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한 식경이나 해명을 해야 했던 나는, 짐짓 슬픈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내 수하도 다쳤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주원공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도 쉴 틈 없이 달려가는 마차 한구석에는, 호화로운 내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피떡. 아니, 혁무진이 처박혀 있었다.
“아니, 저자가 저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닌데.”
“네가 했어.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진짜 죽은 거요……?”
“살아 있지. 아직은. 하지만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그, 그건 진 공자가 때려죽일 기세로 두들겨 패서 그런 것 아니오!”
“기억 안 나. 눈을 떴을 때는 저 모양이었으니까.”
“당연하지! 그때는 이미 눈깔이 뒤집혀 있었으니까!”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야? 황족이면 이렇게 막, 죄 없는 사람 겁주고 그래도 돼?”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안 되겠다. 나 진짜 상처받았어. 너 마차에서 내려. 이 길로 바로 고향으로 낙향할래.”
“내 마차인데 왜 나보고 내리라는, 아니. 그리고 고향이라면 산서성인데 갑자기 거긴 어째서……?”
“꼬맹, 아니 상산왕 전하나 만나러 가야지. 지금쯤이면 많이 장성하셨겠네. 한 이 년 전쯤에 봤을 때는 내가 똥 기저귀도 갈아 주고 그랬는데.”
“사, 상산왕 전하! 똥 기저귀!”
같은 천룡인에도 급이 있는 법.
천자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유일한 친왕(親王)이며, 내 개인 팬클럽 회장직을 역임 중인 상산왕 주표의 이름에 기겁했던 주원공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상산왕 전하의 세수(歲壽)가 이미 몇 해 전에 열 살을 넘기셨고, 그 무렵에서야 진 공자와 연이 닿았다고 알고 있는데 똥 기저귀라니?”
어, 그러네?
그러나 허술한 설정 오류를 발견한 독자의 예리한 지적에도, 나는 당황하는 대신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지금 설마…… 상산왕 전하께서 그 나이에 기저귀 찬다고 놀리는 거야?”
“어?”
“역모다.”
“어어?”
“이건 역모야! 반역이라고!”
“이런 미친! 입 다무시오!”
“모두 들어라! 황족 주인공이 상산왕 전하를 모욕했다!”
“주인공이 아니라 주원공이오! 그리고 제발 좀!”
물론 아무리 크게 외쳐 봤자 저 밖의 누구도 내 외침을 듣지 못한다. 이미 공력으로 마차 안의 소리를 꽁꽁 틀어막아 놓았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주원공은 냅다 무릎부터 꿇었다.
“부탁이오! 진 공자 말이라면 뭐든 할 테니, 제발 그만 좀 하시오!”
“황족 망신 다 시키는 상산왕 전하를 황실 족보에서 파 버릴…… 아, 진짜?”
“지, 진짜로.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만 나 좀 살려 주시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뭐 이렇게까지 설설 기나 싶겠지만, 작금의 천자는 황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피붙이를 축출해 낸 화려한 이력이 있다.
한 마디로 같은 핏줄 죽이는 것에 도사를 넘어, 원시천존에 버금간다고 볼 수 있는 냉혈인.
그런 천자의 귀에 역모의 역자라도 들어간다?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사천당가로 직행하는 게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최소한 그 동네 사람들은 곧 도착할 사약보다 덜 고통스럽게 죽는 독극물을 수십 종류쯤 알고 있을 테니까.
“뭘 또 울고 그러냐. 누가 보면 진짜 역모라도 꾸민 줄 알겠네.”
나는 이미 반쯤 울먹거리고 있는 주원공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살짝 안쓰럽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손에 틀어쥐고 있으면 편해지니까.’
마차가 출발하기 전 들었다.
뇌물을 받은 죄로 호북성을 벗어나지 못했어야 할 녀석이, 왜 뜬금없이 사천에서 놀잇배를 띄우며 놀고 있었는지.
“아직 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오. 자비로우신 황상께서 잠시 내 유배지를 사천으로 옮겨 명을 따르고 있을 뿐이란 말이오. 한데 역모에 관련된 이상한 구설수라도 도는 날에는 진짜, 진짜…….”
“그래, 그래. 네 맘 다 알아. 그런데 아까 했던 말 사실이지?”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주원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 뭘 말이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주원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임시 사천성주라는 거.”
주원공이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황명이었소.”
사천을 떠난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병환을 얻어 쓰러진 사천성주. 그리고 거대한 땅덩어리와 군사력을 맡길 만큼 믿음직스럽지 않은 관료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주원공이 선택받았을 것이다.
황위에 대한 명분을 주장하기에는 턱없이 거리가 먼 방계 황족.
그럴 만한 배짱이나 능력, 배경도 없는 데다가 그나마 있는 재주라고는 주색잡기뿐이니 잠시 빈 자리에 앉혀 두기에는 이만큼 적당한 인사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주원공에게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다.
비록 임시직에 불과하지만, 사천성주라는 직함이 가진 권위와 개인의 무능함은 별개니까.
‘적어도 내가 사천에 머무르는 한, 암천(暗天)에 대한 방비만큼은 철저히 하고 갈 수 있겠지.’
관과 무림은 불편한 공존 관계를 오래토록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무림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관의 인력을 동원한다면, 혹시 모를 암천의 계획을 사천에 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야, 사천당가로 가자.”
잠시 헤어졌던, 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