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42
#841화
당사독은 나와 적천강을 내원(內院) 깊숙이 자리한 어느 전각으로 안내해 주었다. 혹 불편하거나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는 말과 함께.
“그럼 이만…….”
“잠깐.”
적천강의 나직한 부름에,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황급히 전각을 빠져나가려던 당사독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이내 서서히 고개를 돌린 그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힘겹게 쥐어 짜냈다.
“무슨 연유로 부르셨는지…….”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빛. 말없이 당사독을 응시하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잊어라.”
“예?”
“잊으라고 했다. 지금껏 네놈이 보고 들은 것 전부.”
만독수라(萬毒修羅)고 나발이고, 상대는 화왕 적천강이다.
꼭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와 무림을 뒤집어 놓는 유서 깊은 개깡패 문파, 열화문의 당대 문주.
사문부터가 삼백여 년간 대대로 천하 곳곳에 불을 싸질러 놨으면서, 본인 처소에 불 좀 붙었다고 천 명이 넘는 마교도를 깡그리 전멸시킨 내로남불의 결정체.
또르륵.
언제 맺혔는지 모를 식은땀 한 방울이 당사독의 목덜미를 타고 굴러떨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가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이 후배가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잊겠습니다.”
“잊어? 애초에 보고 들은 게 없는데 뭘 잊는단 말이냐?
“아.”
“조심하자, 어? 눈치 챙기자고.”
당사독의 목덜미를 살살 주무르면서 속삭이는 적천강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싶더니, 나 초등학교 다닐 때 골목길에 죽치고 있던 고등학생 일진 형들이 딱 저랬다.
문제는 당시 그 일진 형들이 열일곱 살 정도였고, 현재 적천강의 나이가 최소 117세는 넘을 거란 사실이다.
‘아니, 무슨 백 년을 회춘해 버리네.’
척 봐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낮은 어조와 게슴츠레하게 뜬 눈동자, 거기에 더해 상황에 맞는 훌륭한 어휘 선택까지.
“노부가 요새 좀 기분이 안 좋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무림에 나돌아. 그러면 어떨 것 같으냐?”
“부, 불쾌하실 것 같습니다.”
“불쾌 정도가 아니지. 아주 기분 잡치는 거지. 완전히 꼭지가 돌아 버리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노야.”
“죽은 네 선친, 독왕과 노부는 그럭저럭 연이 있었다. 절친하다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등을 맡길 만한 녀석이었어.”
몇 달 전, 만독지환을 노리던 서천마군(西天魔君)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독왕은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이자 당사독의 아버지였지만, 그 이전에 적천강과 함께 십왕(十王)이라는 이름으로 정마대전을 승리로 장식한 영웅이기도 했다.
“약간 음울한 구석이 있었지만, 똑똑하고 눈치 빠른 친구였지. 어느 날 노부가 마시려던 술에 독을 탔는데, 벽력도왕(霹靂刀王) 그놈이 신나게 처맞는 걸 보더니 자연스럽게 술잔을 엎지르더군.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아나?”
당사독이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시겠다고 하시더니, 석 달 뒤에 갑자기 제 선친을 두들겨 패셨다고…….”
“노부가 그리 한 이유를 아느냐?”
“모, 모릅니다. 아버님께서도 몇 년 전까지 줄곧 그 이유를 궁금해하셨습니다.”
“기분이 아주 더러운 날이었는데, 주위에 때릴 놈이 없었다. 그래서 때렸어.”
“……!”
“노부가 그런 놈이다. 이제 감이 좀 잡히느냐?”
오십여 년간이나 베일에 싸여 있던 폭행 원인을 알아낸 당사독은 입을 쩍 벌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냥 미친놈 아니에요?”
“…….”
“…….”
“아.”
순간 숨 막히는 침묵이 내리 깔렸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적천강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나가라.”
“예?”
“나가!”
“예, 옛!”
천둥 같은 고함에, 오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사람처럼 시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당사독이 빛살처럼 전각을 빠져나갔다.
아니, 도망쳤다.
나만 두고.
‘도마뱀인가?’
하지만 남 탓하기에는 앞서 혼자 싸질러 놓은 똥이 너무나도 크고 아름답다. 호흡을 가다듬은 내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노야, 오햅니다.”
“뭐가 말이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요.”
“본문의 문규(門規)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소리를 지껄이면 두 배로 처맞는다는 조항이 있다.”
“……정말 그런 문규가 있습니까?”
“있다.”
“어느 정신 나간. 아니, 어느 분께서 그런 문규를 만드셨습니까?”
“노부가 만들었다. 조금 전에.”
좋아, 좆 됐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대처해야 할 때다. 나는 혁무진에게 빙의된 것처럼 빠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인정이 빠르구나.”
“아직 살날도 많은데, 여기서 맞아 죽을 수는 없잖습니까.”
“네놈과는 달리 노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을 것 같다.”
“왜요?”
“그래도 명색이 제자라는 놈에게 미친놈 소리를 들었으니 나가 뒈져야지. 그렇지 않느냐?”
나는 한껏 조아렸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최소 E컵은 되어 보이는 적천강의 우람한 대흉근이 보였다.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통해 과거의 젊음과 총기를 되찾은 그다.
저 정도면 어디 가서 나가 뒈지는 게 아니라, 나 빼고 다 뒈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닙니다. 노야는 장수하실 겁니다. 이미 장수하셨지만요.”
“그렇구나. 한데 노부가 보기에 네놈은 단명할 것 같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섭섭합니다.”
“섭섭한 건 노부가 더 섭섭해야지. 멀쩡한 머리털까지 박박 밀고 땡중 행세해 가며 남만까지 갔는데, 감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적천강의 기습 태양권 공격에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이쿠. 눈 부셔.”
“…….”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노야께서 절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늦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하기에 가장 좋을 때라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다. 그런 헛소리를 한 놈은 이미 옛날옛적에 뒈졌을 거고.”
“그렇다면 거듭 죄송합니다.”
“뭘 하든,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나를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노부가 보기에 네 녀석은 사람보다 소신선(小神仙)에 가깝다. 그럼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아니, 그런 흉악한 질문을 왜…….”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그런 걸 궁금해하시는데요…….”
“네 녀석은 선계(仙界)에서 왔다 했으니, 달라도 뭐가 다를 것 아니냐.”
“죽습니다. 진짜 죽어요.”
“선계에 있는 네놈도?”
“뒈져요. 저 1코인밖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이게 찐찐막이었어요.”
“또 요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니, 제발. 왜 저런 걸 물어보는 건데.
오금이 저린 나는 벌떡 일어나서 적천강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딱 한 번으로 끝내면 부족할 것 같아서 두 번이나 했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자마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제사 지내냐?”
“아.”
“이 꽉 깨물어라. 깔끔하게 끝내자.”
후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문득 혁무진을 떠올렸다. 만약 살아나가면 전보다 훨씬 잘해 줘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를 악물고 호흡을 삼켰다.
‘흡……!’
그리고 그 순간.
툭.
화아아악!
이마에 닿은 미세한 감촉과 함께, 미친 듯이 휘몰아친 바람이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
‘어?’
서서히 가라앉는 열풍(熱風) 속, 의문을 느끼며 눈을 뜬 나는 볼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누른 채,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적천강의 모습을.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애정과 반가움이 묻어나오는 그의 눈빛을.
“이 천인공노할 놈 같으니. 엄살떨지 말고 냉큼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예?”
“할 거면 제대로 하란 말이다. 이를테면…… 그래, 절이라든지.”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고, 적천강은 햇빛이 쏟아지는 창가로 슬쩍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거, 날씨 한번 좋다.”
모르겠다. 왜 갑자기 그 순간 웃음이 흘러나왔는지.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도, 그제도.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하하.”
“이놈이, 웃어?”
“아닙니다. 제 절이나 받으세요. 야무지게 구배지례(九拜之禮) 한번 올리겠습니다.”
구배지례라는 말에 잠시 움찔한 적천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식으로 사제지연을 맺은 것도 아닌데 그따위 허례허식은 무슨. 평소에나 잘해라.”
맞다. 적천강과 나는 정식으로 맺어진 사제지연이 아니다.
한때 피붙이 같던 제자를 없애기 위해 세상으로 나온 노인에게는 사문의 가르침을 이어 갈 새로운 계승자가 필요했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어느 청년에게는 더욱 강한 힘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들은 서로가 가진 것을 필요로 했기에 맺어졌고, 그렇기에 구배지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례허식에 불과했다.
그래,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살짝 서운하네. 막상 저런 말을 들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당연했던 것이 서운해지고, 서운했던 것은 당연해졌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한 감정은 오롯이 나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불현듯 귓가에 닿은 한 마디.
적천강은 햇빛이 쏟아지는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저 멀리 떨어진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나중에 때가 온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조금씩 흐려지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흩어진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끝맺어지지 않은 그의 뒷말을,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노야.”
“왜 부르느냐.”
내 부름에 적천강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어쩌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노야.”
“아, 왜.”
뻔히 예상되는 그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한 마디를 건넸다.
“좋네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여전히 가까이에 계셔서.”
“……!”
“다녀왔습니다.”
그 순간, 덜컥 굳어 있던 적천강의 어깨가 부드럽게 풀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처럼 억지로 눈살을 찡그리기도 하고, 입술을 삐뚜름하게 실룩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는 법.
아무리 스스로가 부정하고, 낯설게 느껴져도 결국 진심을 감출 수 없다.
천하가 화왕(火王)이라 이름 붙인, 뜨겁고 단단한 철면을 뒤집어쓴 채 한 세기가 넘는 삶을 살아온 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잘…….”
머뭇거리는 목소리.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감정이 뒤섞인 표정.
그러나 다음 순간, 고집스럽던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햇빛 만큼이나 따뜻한 음성이 산들바람이 되어 귓가에 닿았다.
“잘 돌아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