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44
#843화
적천강은 무림(武林)이라는 드넓은 모래밭에 자신만의 족적을 새긴 거인이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림에 한 걸음이라도 걸친 이들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화왕(火王)이라 불리는 위대한 무인이었고, 장장 일백여 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 동안 숱한 전란과 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으니까.
강자가 경외의 대상이라면, 노장(老將)은 존경의 대상이다.
그리고 화왕 적천강은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이 광활한 천하에서 최소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위. 거기에 더해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연륜과 견문.
하지만 그런 적천강조차 자신이 백 년도 넘게 살아온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하물며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일이라면 더더욱.
“좆 됐군.”
제법 긴 침묵 끝에 토해 낸 한 마디와 함께, 적천강은 확신했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적천강을 향해, 마주 앉은 청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 노야께서 하신 말씀이 정확해요.”
청년, 진태경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좆 됐다. 그 말밖에는 딱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현대의 상황은 심각했다.
쉴 새 없이 잇따라 터진 사건 사고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정룡은 선녀다. 무려 삼십여 년에 걸친 미카엘 실베르트와 도플갱어의 합작으로 전 세계가 개판 오 분 전에 접어들었으니까.
아니, 이미 본격적인 개판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그, 뭐라고 했지?”
“몬스터요.”
“그래, 모수타. 그 마교 같은 놈들이 본격적으로 네 녀석이 사는 선계(仙界)로 쳐들어온다는 말이렷다.”
“예. 삼십여 년에 그랬던 것처럼요.”
적천강이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남만야수궁을 떠난 직후 한 번. 그리고 이틀 전부터 지금까지 또 한 번.
그러나 진태경이 처음보다 훨씬 더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음에도, 적천강은 자신이 들은 내용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스무 번을 더 듣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찌 그런 곳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수십, 수백 년을 걷고 또 걸어도 닿을 수 없는 머나먼 세상.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도 보지 못할 미지의 땅.
그뿐인가.
수만 리 밖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대화할 수 있고, 강철로 된 거대한 새가 구름 위를 넘나든다 했다.
일평생 동안 도산검림(刀山劍林)만을 거닐었던 적천강의 입장에서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놀라움과 불신이 동시에 찾아오는 것은 당연했다.
만약 그 말을 한 것이 다른 누군가였다면, 진작 귀싸대기를 갈기고 화염신장으로 지져 버렸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무신(武神)이나 천자(天子)라 해도.
하지만…….
‘저 녀석이 하는 말이니, 믿어야지.’
믿는다. 진태경을.
그것은 적천강에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노인을 청년을, 청년은 노인을 믿는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런 관계가 되어 있었다.
그 어떤 헛소리를 지껄여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법왕(法王), 그 땡중이 살아서 이 자리에 있었다면 기절초풍했겠군. 허구한 날 하늘의 별이나 쳐다보던 놈이 이런 것까지 짐작이야 했겠느냐.”
적천강은 이미 먼 곳으로 떠난 벗을 생각하며 진태경을 바라보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없는 세상이로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곳과 퍽 닮아 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진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마냥 낯설고 다르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아니다.
현대와 무림. 무림과 현대.
두 세계는 서로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문명의 격차가 아닌, 세상을 움직이는 변화의 흐름이.
“무림에 암천이 있다면, 제가 살아온 세상에는 몬스터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곳 모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각자의 세상에서 정마대전(正魔大戰)이 일어났다는 점도 같지.”
“맞습니다.”
“그렇다면 네 녀석은…….”
문득 말꼬리를 흐린 적천강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짧은 침묵이 내려앉은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호롱불을 바라보던 진태경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 * *
별들도 잠든 늦은 밤.
적천강을 뒤로하고 전각을 빠져나온 나는 홀로 내원(內院)을 거닐었다.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 대신, 조금 전 들었던 물음을 마음에 품은 채.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만약 적천강이 좀 더 자세하게 무언가를 물었다면, 나는 답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나조차도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니까. 두 세상에는 아직 무수히 많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저 물음에서만큼은, 나도 확신할 수 있었다.
‘전혀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짧은 침묵 끝에 내놓은 대답이었고, 이를 확신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무림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에 대해 생각해 왔으니까.
그리고 기나긴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연관성이 있다. 확실한 연관성이.’
처음에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엄청난 불운처럼 느껴졌다.
빌어먹을 고물 캡슐에서 잠들었을 뿐인데, 게임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세상에서 온갖 위험과 맞서 싸워야 했으니.
그러나 주위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면서 생각도 변화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F급 헌터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힘과 부를 양손에 움켜쥐었다.
그것도 현대와 무림. 두 세상에서 동시에.
‘불운이 행운으로 변한 거지.’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냐며 한탄하던 시절은 금세 스쳐 지나갔다.
불운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알고 보니 하늘에서 내려 준 행운이었고, 어쩌면 그 이상인 천운(天運)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끼기 전까지는.
‘산서성에서부터 하남. 사천을 넘어 호북까지.’
암천(暗天)이라는 먹구름 아래, 피를 머금은 불길이 솟구쳤다.
가슴 한구석에 복수심을 간직하고 있던 태원진가의 대장로가 긴 세월 동안 숨겨 두었던 검을 뽑았고, 놀라운 무위와 지혜로 존경받던 고승은 죽음을 맞이했으며, 소림사를 휩쓴 불길은 사천과 호북으로까지 번졌다.
‘그리고 마침내 저 머나먼 남만에 닿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사방으로 번진 불길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불길을 피할 수 있었고, 나는 그 끔찍한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성을 상실하고 미쳐 버린 수신룡.
마치 몬스터처럼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어부와 물고기들.
단순한 사술이나 진법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현대의 텔레포트 마법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암천의 이동진(移動陳).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만에서 발생한 균열.’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아니, 잊을 수조차 없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던 그 어둠을, 무림인들이 마기(魔氣)라 칭하는 그것에서 몇 번이고 느꼈던 익숙함을.
‘마력이었어, 분명히.’
처음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선명한 윤곽은, 내게 현실을 받아들이라 종용하고 있었다.
‘단순히 명칭의 차이가 아니야.’
마나와 공력의 본질은 완벽하게 같다. 바로 기(氣)다.
어디에도 있으며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것.
푸른 바다와 산림에도, 매연 가득한 빌딩 숲에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형의 것.
그러나 마력은 다르다.
죽음을 품은 그 악한 기운은 또 다른 세상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다.
마나와 공력이 본래에도 존재했던 원주민이라면, 마력은 몬스터와 함께 저 너머에서 건너온 낯선 이방인이자 침략자였다.
한데 바로 그 마력이 등장했다.
현대도 아닌 바로 이곳, 무림에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받아들이긴, 어차피 애써 부정하고 싶어도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암천(暗天).’
틀림없다.
현대와 무림을 잇는 진짜 연결고리는 암천뿐이다.
지금껏 놈들과 얽히기 시작하면서 직접 목격한 모든 것들이 증거였고, 검사인 동시에 판사였다.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이 세상에, 무림에 발을 디뎠을까.
정마대전(正魔大戰)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결국 천하 무림의 패권을 둘러싼 하나의 전란에 불과했다.
만약 대격변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내가, 아니 적어도 그 시절을 온몸으로 헤쳐 나왔던 적천강이나 다른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온갖 흉측한 괴물들이 천하를 휩쓸었다는 소문은 궁벽한 촌구석에까지 퍼질 테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건 암천이 마교의 후신(後身)이고, 기이한 사술을 쓴다는 것 정도밖에 없지.’
그리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가 무림에 나타났다. 정마대전이라는 혼란의 시기가 이어지던 도중. 혹은 그 직후에.’
그렇다면 시기가 정확히 맞물린다. 암천이 처음 대장로에게 접근했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으니.
하지만 아직 근본적인 원인이자, 해결되지 않은 가장 큰 의문이 남아 있었다.
‘천주(天主).’
암천의 주인.
아니, 그들이 모시는 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절대자.
놈이 어떻게 무림에 존재할 수 있는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 삼십여 년 전 일어난 대격변의 시작 역시 그러했으니까.
문제는…….
‘천주의 진짜 정체.’
저벅.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세상을 둘러싼 어둠은 깊고 내원 곳곳에 세워진 횃불은 붉게 타오른다.
그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불현듯 정수리를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설마……?”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흘러나온 목소리가 어둠에 섞여 흩어진 그때.
스륵.
일렁이는 횃불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내 발끝에 닿았다.
마치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느 저주받은 존재처럼. 영원한 소멸을 맞이하면서도 웃었던 누군가처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기억 속에 잠겨 있던 대화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위대한 왕께서는 신의 저주를 극복하신 분. 흔들리되 꺾이지 않으며, 스러져도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상 모든 흙과 물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뭐?’
‘그것만이 진실이다.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진실.’
“……!”
나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도플갱어와 마주했던 그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