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5
#84화
임꺽정은 생각했다.
‘미친 짓이야.’
진태경은 C급 헌터다. 반면 미노타우로스는 B급 몬스터.
게다가 한 마리도 아니고 여덟 마리나 된다. 그의 눈에 비친 상황은 무모함을 넘어 절망적이었다.
‘그깟 돈이 뭐라고.’
40억은 분명 인생을 바꿀 수 있을 만한 금액이지만 목숨을 버릴 정도는 아니다. 임창수는 돈으로 진태경의 눈을 가렸고, 진태경은 판단력을 상실했다.
‘내가, 내가 말려야 돼.’
저 악랄한 상동 길드 놈들도, 말리지 않는 김 집사도, 최 팀장도 전부 미쳤다. 아끼는 동생의 개죽음만큼은 막아야 했다.
“태경아!”
임꺽정이 막 창을 꼬나 쥔 진태경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쉭-
“……어?”
바람 소리와 함께 진태경이 사라졌다. E급 헌터인 임꺽정은 닿을 수도,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속도로 질주를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임꺽정은 얼빠진 음성을 토해 냈다.
“어, 어어.”
이게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태경이가 저 정도였나? 아니, C급 헌터가 이렇게 빠를 수가 있나?
쉬이이익!
검은 번개가 동굴을 가로지른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수십 미터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 건 찰나에 불과했고 창날이 번쩍 빛났다.
쐐애애액! 서걱!
미노타우로스. 3미터가 넘는 놈의 거체가 기우뚱거린다.
어깨 위로 있어야 할 굵은 목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인간의 몸과 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평범한 인간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툭.
순식간에 베인 머리가 동굴 바닥에 떨어지고.
쿵.
머리를 잃은 몬스터의 신형이 허물어진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목의 단면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게 무슨……!”
누군가가 토해 낸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다.
보이지 않는 충격과 경악 속에서, 한 사람이 씩 웃었다.
“할 만한데?”
그 한마디가 결정타다.
임꺽정은 다리에 힘이 풀렸고, 임창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발…… 내 40억.”
* * *
미노타우로스는 근접 전투에 특화된 체형이다.
중형 몬스터답게 거구인 데다 엄청나게 단단한 근육으로 똘똘 뭉쳐 있고, 사용하는 무기도 메이스나 도끼 같은 중병기다.
콰쾅!
그러면 뭐 해. 못 맞추면 말짱 황인데.
있는 힘껏 휘둘러 봤자 애꿎은 동굴 바닥만 박살 낼 뿐이다.
‘힘 하나는 인정.’
하지만 싸움은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한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아랫배를 찔렀다.
푸푹.
– 정확한 공격!
– 상태 이상, [출혈]이 발동됩니다!
– 모오오오.
미노타우로스의 울음소리가 애처롭다. 처음처럼 광포하게 달려들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아마 조금 전의 그 공격이 마지막 힘을 쥐어짠 일격이었을 것이다.
– 모오, 모오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송아지 같은 눈망울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기는 개뿔, 이게 다 5억짜리 돈다발로 보인다.
“다음 생에는 부디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라.”
– 모오오!
서걱.
미노타우로스의 숨이 끊겼다. 거대한 피 웅덩이가 여덟 개. 몬스터 사체도 여덟 구로 늘어난 순간이었다.
띠링.
– 레벨 업!
경쾌한 시스템 알림은 영화 BGM이고, 이 영화의 진짜 백미는 따로 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자, 즐거운 정산 시간.”
경악과 침묵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 중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나는 반쯤 얼어붙은 임창수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정산을 시작했다.
“보자, 일단 두당 5억이니까…….”
움찔.
“하나, 둘, 셋, 넷. 여덟 마리. 도합 40억. 와, 몇 마리는 마정석도 떨궜네? 부산물도 다 내 거랬지?”
움찔. 움찔.
“창수야. 왜 대답이 없니? 설마 나한테 거짓말 친 거니?”
임창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아니지.”
“말이 짧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냥…….”
“그냥. 뭐?”
“태경 씨. 잠시만 제 얘기를…….”
“태경 씨?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우리 창수 몇 살?”
“……스물다섯 살입니다.”
“어이구. 요, 요 잔망스러운 새끼. 스물다섯밖에 안 됐으면서 어른들한테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군 거야?”
“…….”
“아까부터 혓바닥이 반 토막이 났나, 반말 찍찍 하길래 아흔다섯은 되는 줄 알았네. 얼굴은 왜 이렇게 삭았냐? 출생 신고 늦게 한 거 아니지?”
계속 이어지는 내 말에 임창수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표정 관리 잘하자. 한 번만 더 홍익인간 되면 진짜 빨갛게 만들어 준다.”
“……죄송합니다.”
가까스로 표정 관리에 성공한 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쭤봐.”
“정말 C급 헌터 맞으신지…….”
“응. 맞는데?”
임창수는 불신에 찬 눈빛으로 나와 널브러진 미노타우로스 사체를 번갈아 바라봤다.
“뭐, 왜.”
“꼭 밝히고 싶지 않으시면 말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그건 뭐 알아서 생각하고.”
“아, 아닙니다.”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평범한 C급 헌터라고 생각했던 내가 B급 몬스터를, 그것도 여덟 마리를 정면 승부로 발라 버렸으니까.
‘그래, 많이 상상해라.’
괜히 상동 길드랑 틀어져 봤자 좋을 게 없다. 저쪽에서 이렇게 알아서 숙여 주니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그럼 혹시 신분 세탁…… 아니시죠. 아니시겠죠. 네.”
헛소리를 지껄이려던 임창수가 내 창을 곁눈질하더니 바로 말을 돌린다. 이거 은근히 반응 재밌네.
“그래서?”
“예?”
“예는 무슨. 돈 줘야지. 40억.”
사실 배 째라 식으로 나올까 봐 살짝 걱정이다.
4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일반인들은 평생 벌어도 만져 보기 힘든 거금 아닌가.
하지만 임창수는 달랐다.
“아, 물론 드려야죠.”
“……확실해?”
“예. 약속은 지킵니다.”
너무 시원시원한 대답이라 의심이 갈 정도다.
제아무리 B급 헌터라고 해도 평균 수입이라는 게 있는데, 임창수는 수십억을 주머니 속 천 원처럼 말한다.
“이렇게 말해 놓고 잠수 타는 거 아니지? 계약서 없다고 쌩 까고 그러면 나 많이 섭섭하다.”
은근슬쩍 창을 쓰다듬자 녀석이 화들짝 놀란다.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됩니다.”
“흐음. 돈 좀 버나 보네. 상동 길드에서 대우 잘해 주나 봐?”
“아뇨. 남들이랑 다를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다를 게 없겠지. 네가 무슨 길드장 아들이라도 되냐? 뭐 잘났다고 잘해 줘?”
“…….”
“……?”
“…….”
이거 뭔가 공기가 묘한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아버님 성함이?”
“임, 춘 자에 수 자 쓰십니다.”
“상동 길드장님 성함은?”
“임, 춘 자에 수 자 쓰십니다.”
기묘한 우연이다. 임창수의 아버지와 상동 길드장의 이름이 같다니. 하긴, 세상은 넓고 동명이인은 많은 법이니까.
“야, 이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실례지만 아버님 직업이 어떻게 되시냐?”
“헌터신데요.”
“그냥 헌터?”
“길드 운영하고 계십니다.”
“아, 그래.”
이 자식 상동 길드장 아들이었구나.
짧은 침묵이 흘렀고, 그 잠깐 사이 나는 임창수에게 느꼈던 낯익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네가 걔야?”
“개요?”
“아니, 너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어서.”
재작년 이맘때쯤인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이야기다. 상동 길드장의 하나뿐인 늦둥이 아들이 B급 헌터로 각성, 아버지 길드에서 한자리 꿰찼는데 여자를 그렇게 밝혀서 골칫거리라더라.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껄떡쇠. 맞지?”
임창수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긴 사람들 앞에서 듣기에는 쪽팔린 별명이긴 하다. 하지만 40억을 수금해야 하는 나는 따뜻한 목소리로 녀석을 위로했다.
“괜찮아, 인마.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전에는 너처럼 사는 게 꿈이었어.”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었고, 꿈은 100TB USB로 스며들었다. 야동계의 이름난 권위자인 진호 형은 내 USB를 빌려 간 후, 퀭한 얼굴로 나타나 한 줄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어야 한다.’
뭐 어쨌든.
내 따뜻한 위로에 임창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십니까?”
당연히 아니지. 내가 아무 여자한테나 들이대는 그런 놈으로 보이니? 나야말로 이 시대의 해바라기. 오직 송이 씨 한 사람만 바라보는…….
잠깐만, 이 새끼 아까 전에 송이 씨한테 집적거렸잖아.
“이 자식이.”
“헉!”
지레 겁을 먹은 임창수가 반사적으로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스릉. 탁.
그러나 검날은 채 반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도로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번개처럼 다가간 내가 놈의 검 자루를 내리누름과 동시에 다리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쿠당탕!
중심을 잃고 넘어진 녀석의 목을 지그시 누르자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컥, 커컥!”
“이 새끼가. 어디서 연장을 꺼내?”
진무경에게 얻어맞으면서 배운 보람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처럼 간단히, 부드러운 동작으로 B급 헌터를 제압할 수는 없었을 텐데. 임창수도 놀랐겠지만 내가 더 놀랐다.
“여기 게이트야, 인마. 아까 네가 했던 말인데 벌써 잊었어?”
“죄,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지만 미수에 그쳤으니 봐주기로 했다. 40억을 못 받아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위자료.”
“컥. 네?”
“검 뽑았잖아. 살인미수 몰라? 거기에 나랑 송이 씨. 아니지, 우리 길드원들 모두에게 정중한 사과.”
“그게 무슨!”
임창수가 억울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봤지만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임창수의 팀원들은 내 눈이 닿기만 해도 찔끔 물러날 뿐이었고, 오히려 구경하고 있던 우리 길드원들은 한 술 더 떴다.
“협력 길드의 길드원을 상대로 검을 뽑다니. 이것 참.”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김 집사.
“돈 주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세상에, 창수 씨 너무 저질이다. 안 그래요, 아저씨?”
“응? 으응. 젊은 친구가 아주 악질이네!”
송이 씨와 임꺽정의 저질, 악질 콤보에 이어서.
“자, 다들 제 투구를 봐 주시겠습니까? 이 제품은 핀란드의 유명한 장비 제작사 자일리톤에서 제작한 맞춤 투구로서…… 온갖 기능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영상 녹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최 팀장의 마지막 한 방까지.
배신감과 황당함에 입을 딱 벌리고 사람들을 바라보던 임창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겠습니다.”
“뭐라고?”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요!”
기다리던 대답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녀석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자식, 잘 생각했다. 위자료는 천천히 논의해 보자.”
“……미치겠네. 우리 꼰대가 알면 저 죽어요.”
“여기서 죽을래?”
“40억 받기 싫으세요?”
“어쭈.”
다시 한숨을 푹 내쉰 임창수가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됩니까?”
“하나당 1억.”
“…….”
“농담이야. 해 봐.”
“진짜 뭐 하시는 분입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했나?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투잡 뛰는 사람.”
헌터 겸 무림인.
이 세상에 하나뿐인 투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