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50
#849화
한 시진.
우리가 사천성주의 거처인 동시에 관청인 성주부(星州府)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두두두두!
주원공에게 마차를 빼앗, 아니 빌린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척 보기에도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육두마차에는, 끔찍한 교통 체증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정지! 정지! 당장 멈추시오!”
“신분과 용무를 밝히…… 잠깐, 이 마차 어디서 많이 봤는데.”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대로변을 순식간에 아우토반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멀리서도 눈에 띄는 것은 당연지사.
미친 듯이 질주해 오는 마차를 확인한 관병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이내 어디선가 터져 나온 고함은 잠깐의 시간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열어!”
“예, 예?”
“문 열라고, 이 등신들아!”
“아, 알겠습니다! 개문(開門)!”
구그그그긍!
앞서 무슨 지시라도 있었던 것일까.
마차가 멈추는 일도, 마땅히 거쳐야 할 확인 절차도 없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마차의 속도에 맞춰 거대한 철문이 열렸고, 마부석에 앉은 혁무진이 말고삐를 늦춘 것은 자그마치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한 후의 일이었다.
푸륵. 푸르륵.
쉴 새 없이 전속력으로 달려온 여섯 마리의 준마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던 그때.
막 마차에서 내린 나와 화룡각 대원들을 향해 낯선 얼굴들이 다가왔다.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소협?”
조금의 시간 낭비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대뜸 건네 온 물음.
그러나 그 속에는 일반적인 관인(官人)들과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다.
설령 문관이 아닌 무관이라 할지라도, 관아에 속한 이들이라면 지금처럼 무림에서의 별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기피하기 마련이니까.
‘무림인?’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무장을 한 선두의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
송일섬의 전음이 귓가로 전해졌다.
― 아는 얼굴이다. 저자는 날 못 알아보겠지만.
― 아는 얼굴? 누구?
― 낭인으로서는 제법 유명했지. 나중에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완전히 무림을 떠나 관에 투신한 줄은 몰랐군.
― 그래?
― 그렇다. 내 기억력은 정확해.
― 그런데 왜 또 은근슬쩍 반말하냐. 너 나보다 나이 많아?
―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아는데.
어, 맞네.
잠시 깜빡했다. 현대 나이로 쳐도 송일섬이 나보다 몇 살은 연상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면 화룡각의 기강이 무너진다. 나는 각주의 위엄을 실어 전음을 날렸다.
― 나이 많은데 어쩌라고. 혁무진 꼴 나고 싶냐?
― …….
― 꼬우면 니가 각주 하든가.
짜게 식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송일섬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낭인 출신이라는 선두의 사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진태경 소협, 아니십니까?”
“맞는데요.”
“앞서 오신 분들께 미리 언질을 들었습니다. 우선 이리로.”
뒤이어 사천성주의 호위장이라는 짤막한 자기소개를 덧붙인 그는 우리를 성주부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일련의 사정은 이미 들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만.”
호위장을 따라 걷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요.”
“많이 당황하셨겠군요.”
“처음에는 조금 그랬죠. 제가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아, 혹시 임시 성주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현재 이 땅의 성주는 두 명이다.
아니, 두 명이었다.
나와는 이전부터 나름대로 인연이 있는 방계 황족인 주원공.
그리고 몇 달 전부터 앓아누웠다는 기존의 사천성주.
‘이번에 죽은 그 양반 이름이 뭐였더라. 원균?’
육지에서라면 몰라도 바다에서는 개 트롤짓할 것 같은 이름이라 엑스트라치고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출산 임박을 넘어 임신 20개월쯤 되어 보였던 그 엄청난 뱃살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일전에 한번 가까이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저를요?”
“사천혈사(四川血史)가 일어나기 직전이었지요. 상산왕 전하의 증표와 함께 지원을 청하러 성주님을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맞아요. 그럼 그때도?”
“예. 명색이 호위장이니, 성주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요.”
씁쓸한 얼굴로 대답한 호위장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성주의 거처인 동시에 업무를 보는 관청인 성주부답게, 잘 갖춘 관복을 걸친 이들이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분위기가 그리 삼엄하진 않네요. 이미 한바탕 난리가 났을 줄 알았는데.”
등 뒤에서 따라오던 주화란의 중얼거림에, 호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주부에서 근무하는 이들이라면, 성주님의 병환을 일부나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경내의 분위기가 이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건, 그만큼 성주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증거.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자연스럽고 평범한 사안이라면, 굳이 적천강과 신의가 움직일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일부나마 파악하고 있었다는 건, 아직 외부에까지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얼마나 이동했을까.
걸음이 이어질수록 인적은 드물어졌고 그 흔했던 관병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호위장의 앞에는, 전각보다는 장원에 가까운 으리으리한 석조 건물이 있었다.
“이곳이 성주님께서 머무르시던 거처입니다. 저 역시 더 안내해 드리고 싶지만, 앞서 들은 명령이 있어서.”
“명령이라면…….”
“임시 성주님께서 내리신 명입니다. 진 소협을 포함해서 단 두 분만 출입을 허락하라 하시더군요.”
두 분?
아예 나 혼자라면 모를까,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의문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린 그때, 호위장의 입술 사이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혹시, 함께 오신 일행 중 남호라는 분이 계십니까?”
“어?”
“응?”
모두가 크게 뜨인 눈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 있는 거한, 태산을 본 호위장이 감 잡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분이 남 대협이시군요. 역시 이름처럼 호랑이 같으신 풍모…….”
호위장의 목소리가 이어지려던 그때.
퍽! 퍽!
오늘따라 유난히도 앙증맞아 보이는 두 주먹으로 태산의 허벅지를 후려친 남호가, 그 커다란 덩치 뒤에서 씩씩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비켜라! 썩 비키란 말이다! 이 식충이 같은 놈 같으니.”
“히히. 그만해라, 남호. 태산이 간지럽다. 히히히.”
“이런 씨팔……!”
차라리 진짜 바위라면 모를까. 계란으로 태산 치기가 통할 리가 있나.
간지러움에 꺄르르 웃는 태산과, 그런 녀석에게 한바탕 쌍욕을 퍼부으려던 남호가 자신을 응시하는 호위장을 향해 허허 웃어 보였다.
“본인이 바로 그 남호요. 남쪽에서 온 호랑이. 남호.”
“…….”
“……뭐요, 그 눈빛은?”
“그, 아닙니다.”
“아니, 설명을 해 보라니까.”
남쪽에서 온 개미. 뭐 그런 걸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호의 위아래를 훑어본 호위장은 말을 아끼며 수하를 향해 눈짓했다.
끼이익.
새로운 불청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좌우로 열린 문.
당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내 옆으로 바짝 따라붙은 남호가 작게 속삭였다.
“도대체 반응이 왜 저러지? 호랑이가 그렇게 웃겨? 응?”
“…….”
노인 공경 차원에서, 차마 진실을 말해 주진 못했다.
* * *
본래 성주란 직책의 위상이 높기 때문인지, 아니면 죽은 성주의 부정부패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각 내부는 실로 넓고 호화스러웠다.
저벅. 저벅.
값비싼 청석(靑石)이 깔린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겹쳐서 울린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십여 명의 남녀가 나와 남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사라졌다.
“의원과 의녀들이군. 시신을 살피러 온 모양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진 남호가 중얼거렸다. 그는 전각에 들어옴과 동시에 주위의 모든 것을 파악해 나가고 있었다.
“허, 천장에 야명주(夜明珠)를 박아넣다니. 모르긴 몰라도 백성들의 고혈을 어지간히 쥐어짰겠어.”
“잘은 모르지만, 제가 사천에 있을 때만 해도 죽은 성주에 대한 평이 그리 좋지는 않았죠.”
“저 값비싼 야명주를 쓴 미친놈이 이번에 죽은 성주라면, 그럭저럭 잘 뒈졌군.”
“내돈내산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게 뭔데?”
“본인 돈으로 산 거요.”
남호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이럴 때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 따로 없군. 이참에 노부가 하나 가르쳐 주지. 대저 돈 많고 힘 있는 부류들은 언제나…….”
“내가 가진 것을 쓰지 않고, 남의 재물로 배를 불리죠.”
“어? 아네? 혹시 산서성도 그 모양인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딜 가나 똑같으니까요. 사람 사는 곳은.”
내 대답을 들은 남호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희한하군.”
“뭐가요?”
“아니, 그렇잖나. 산서성에서의 일도 아니라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마치 꼭 다른 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 같아.”
은영각 요원다운 날카로움.
간혹 남호가 슬쩍 내비치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 확실히 짬밥이라는 게 있구나 싶다.
‘하지만 짐작도 못 하겠지. 진실이 어떤 건지.’
그간 여러 사건을 겪으며 늘어난 건 무공 실력뿐만이 아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똥인지 춘장인지 꼭 찍어 먹어 봐야 압니까?”
“약관 언저리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이지. 누구나 겪는 시기야.”
“누구나 겪는 시기지만, 그들 모두가 약관쯤에 열화신룡이라는 별호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죠. 아, 이쪽으로.”
천연덕스러운 대답과 방향 전환.
잠시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남호는 이내 군말 없이 뒤를 따라왔고, 나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목소리들을 빼놓지 않고 귓가에 담았다.
― 그럼, 신의께서 보신 바에 의하면 자연사인 거요?
―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급사(急死)로 보는 게 정확합니다. 급격한 체중 감소 또한 가장 큰 이유 중 중 하나겠지요.
― 저런. 그러니까 평소에 살 좀 빼라니까.
― ……여하튼 저 역시 다른 의원들의 진단에 동의합니다. 성주, 아니 이제는 전임 성주로군요. 그분의 죽음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습니다.
― 아, 감사하소. 호위장이라는 자가 하도 유난을 떠는 바람에 본 공자의 입장에서도 내심 당혹스러웠는데, 천하에 이름난 신의께서 이리 나서 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구려.
― 과찬이시군요. 의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어허, 겸손이 너무 과해도 좋지 않소. 이번 일을 잘 처리해 주었으니 본 공자, 아니 본 성주가 아주 큰 상을 내리겠소.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굽이진 복도를 돌아 선 내가 대답했다.
“있어.”
“당장 재정관을 불러 신의께 재물과 곡식을…….”
문득 흐려지는 말꼬리.
급격하게 어두워진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주원공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언제…… 오셨소?”
“지금. 혹시 볼일 남았냐?”
“……조금.”
“그럼 가라. 할 얘기 있으니까.”
“……남았는데?”
“미뤄. 어차피 헛소리나 할 거 뻔하니까.”
내 단호한 대답에 주원공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이내 힘없이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본 적천강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네 녀석이 일각만 늦었다면, 난생처음으로 황족 아가리를 찢는 진귀한 경험을 할 뻔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을 드리자면, 절대 그러지 마세요.”
“노부가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느니라.”
“…….”
그 정도로 미친 것 같아서 문제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몸은 어떻냐 묻는 적천강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신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정확히 뭡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저런 병신한테 모든 걸 곧이곧대로 말했을 리는 없잖아요. 두 분 다 여기 계신 거 보면 견적 나오는데 뭘.”
내 시큰둥한 대답에, 신의가 쓰게 웃었다.
“역시, 적 대협의 제자시군요.”
저거 무슨 뜻이지.
내가 좋아해야 하나, 기분 나빠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신의가 소매 속에서 꺼내 든 무언가를 본 남호가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네? 저게 뭔데요?”
“고독이다. 그것도 남만 깊은 곳에서나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혈혼고(血魂蠱)라는 놈이지.”
그 모습을 본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까지 부른 보람이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