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52
#851화
유난히도 좋은 날이었다.
따스한 햇볕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새하얀 조각구름까지.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잘 정돈된 대로(大路)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듯 살아온 누군가가, 서둘러 출발하려는 마부에게 불현듯 한 마디를 건넨 것은.
“오늘은 좀 천천히 갈까요? 딱히 급할 거 없잖아.”
“예?”
“그냥 돌아갈 때는 천천히 가고 싶네. 바깥 구경도 하면서.”
평소와는 다른 고용주의 분위기에, 마부는 의문을 뒤로하고 고삐를 늦추었다.
어차피 하라는 대로 지시만 따르면 그만이다.
마부로서도 사람들에게 썩 비키라며 호통치는 것보다는 천천히, 안전하게 말을 모는 것이 백배 나았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이상하시네.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마부는 슬쩍 옆을 곁눈질했다. 마치 성벽처럼 이중, 삼중으로 높게 쌓아 올린 단단한 담벼락이 그의 시야에 닿았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 속도대로라면 꼬박 일각(一刻)을 몰아야 저 담벼락이 끝날 것이다.
‘거참. 언제 봐도 대단하긴 하단 말이지.’
마부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 거대한 장원이 자리 잡은 이곳은 외곽도 아니고 한 성(城)의 중심부다. 그야말로 알짜배기 중의 알짜배기.
그런 중심부에서 저 정도 면적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권세가 있다는 증거였지만, 마부가 놀라워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몰락한 명가(名家).
아마도 이 이상으로 적합한 표현은 없었을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냉정한 현실이었고, 마부뿐만 아니라 인근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서서히 몰락해 가던 가문이, 불과 이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만에 한 성을 주름잡는 패자(霸者)로 거듭나리라는 것은.
‘이래서 세상일은 모른다니까.’
내심 중얼거린 마부는 석벽 위로 높게 솟아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 펄럭이는 비단 위, 용사비등한 필체로 써 내려간 네 글자가 그의 눈에 틀어박혔다.
태원진가(太原進家).
저 거대한 장원의 주인이자, 산서성의 상징이 되어 버린 가문.
태원진가를 둘러싼 변화는 급격하고도 확실했다.
마부가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낡고 허물어져 가던 전각과 담벼락은 마치 요새처럼 단단하게 보수되었고, 질 좋은 무기와 영약을 지원받은 무인들의 눈동자는 전에 찾아볼 수 없던 정기(正氣)로 번뜩였다.
어디 그뿐인가.
한때 망나니 삼 공자의 외상값을 요구하러 온 빚쟁이들로 붐볐던 문전은, 이제 다른 의미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진가표국에 의뢰를 맡기고자 찾아온 타지의 거상(巨商)들. 매달 말일만 되면 상납을 위해 줄지어 늘어선 온갖 점포의 주인들과 태원진가 산하의 무림 문파 및 지부장들까지.
워낙에 산서성에서 내로라하는 온갖 거물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기에, 어느 하릴없는 이들은 태원진가 인근을 어슬렁거리며 보고 들은 것을 떠들어 대기도 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길가 옆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내처럼.
“오늘도 안 왔나?”
“안 왔냐니, 누구?”
“어허, 이 사람. 내가 누굴 기다리는지 뻔히 알면서 자꾸 이러네.”
“자네, 설마 또……?”
“설마라니. 난 처음부터 일편단심이었는데.”
“헛소리 좀 작작하게. 괜히 이러다가 자네 마누라한테 걸리는 날에는 나까지 맞아 죽어.”
“괜찮네. 까짓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아니, 내가 안 괜찮다니까. 자네 마누라 팔뚝이 내 종아리보다 굵어.”
“거참, 사내가 돼서 쫄기는. 묻는 말에나 대답하게. 오늘도 안 왔나?”
“겨우 나흘 전에 왔다 가셨는데 오늘은 당연히 안 오셨지. 그분이 뭐 우리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날백수인 줄 아나?”
“이런 제기랄. 이번에야말로 좀 가까이서 보나 했는데.”
“그냥 이쯤에서 포기하게. 자네가 가까이 봐서 뭐 하려고?”
“아니, 산서제일미(山西第一美)를 보겠다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반년 전에 멀리서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침침하던 눈이 다 맑아졌다니까.”
“자네 마누라한테 한 대 얻어맞으면 눈앞이 캄캄해질 건 생각 못 하나? 그리고 말이 좋아서 산서제일미지, 여인의 몸으로 항산검문(恒山劍門)을 이끄시는 출중한 분이야. 괜히 잘못 걸리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릴 걸세.”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사내가 문득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웬 노인네가 성깔이 대단하다던데.”
“대단한 게 성깔뿐이었으면 항산호(恒山虎)라는 별호가 어찌 붙었겠나. 괜히 깝치지 말고 두 다리 멀쩡할 때 집에 들어가서 자식놈이나 돌보게.”
“돌보긴 뭘. 이미 다 컸어.”
“벌써? 세월 빠르군. 내 기억으로는 작년 이맘때쯤에 막 태어났던 것 같은데.”
“어. 맞는데.”
“……자네 미친놈인가?”
두런두런 들려오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진다.
두 사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부는 피식 웃으며 잠시 느슨하게 풀어놓았던 말고삐를 잡았다.
다그닥. 다그닥.
네 마리의 준마가 이끄는 마차는 고용주의 바람대로 천천히 대로변을 가로질렀다.
예전 같았다면 사두마차 하나로도 거리의 절반을 차지했겠지만, 몇 배나 넓어진 거리에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은 슬쩍 비켜서며 하던 대화를 이어 갈 뿐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신변잡기에 불과했으나, 마부의 입장에서는 꽤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다들 소문 들었소? 그 왜, 태원진가가 운영하는 대장간에서 요새 병장기만 만들고 있다던데.”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네. 그거야 한참 되지 않았나? 태원진가야 무림 문파니 이상한 일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 한데 반년 전부터는 아예 병장기만 취급하고 있다고 하오. 농기구를 사려면 적어도 고현(古縣)까지는 가야 할 것 같소.”
“허어. 고현이면 꼬박 사나흘은 걸어야겠군. 다행히 미리 들여 놓은 것들이 워낙 튼튼해서 따로 살 일은 없겠지만.”
“그야 뭐, 장 노인이 데려온 장인들의 솜씨가 좀 좋아야지.”
“예끼. 장 노인이 뭔가, 장 노인이. 태원진가에서도 믿고 중책을 맡기는 분이신데, 이제 장태보 어르신이라고 불러야지.”
“아, 하도 입버릇이 돼서 그만.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걱정이오. 요새 강호의 분위기가 흉흉하다던데,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나려는 것인지…….”
“걱정일랑 접어 두고 바둑이나 마저 두게. 암천인지 뭔지가 날뛰어 봤자 결국 무림의 일이야. 멀게는 대국(大國)이 있고, 가까이에는 태원진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들이 심상찮으니 해 본 소리요. 지난 일이 년간 잠잠하던 북부 고원 쪽 상황도 그렇고. 강호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소.”
“북부 고원은 또 왜? 마적들이야 태원진가에서 나서서 싹 쓸어 버렸을 텐데?”
“마적이란 것들이 한번 뿌리 뽑는다고 사라지는 종자들이오? 워낙 잡초 같은 놈들이니 계속해서 생겨나는 게지. 그리고 지난달에 북부로 상행(商行)을 떠났던 상단 몇몇이…….”
제아무리 고용주의 지시라고는 해도 말을 천천히 모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거, 빨리빨리 좀 얘기하지.’
마부가 미처 듣지 못한 뒷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내심 입맛을 다시던 그때, 마차가 대로변을 빠져나올 때까지 줄곧 말없이 바깥 풍경만을 바라보던 고용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다들 걱정이 많네. 하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모를 수가 없긴 하겠지.”
“예, 예?”
“저 사람들 말이에요. 아까부터 귀 쫑긋 세우면서 들어 놓고 뭘 그렇게 놀라?”
“어, 그게. 그러니까…….”
마른침을 꿀꺽 삼킨 마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머, 먼저 이렇게 말을 거셨던 적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하. 뭐,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마부는 힐끗 등 뒤를 곁눈질했다. 진주로 이루어진 주렴(珠簾) 사이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고용주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새하얗게 분을 칠한 피부와 앵두처럼 붉은 입술도.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단 말이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벌써 일 년 가까이 모셨지만, 그간 마부가 보고 겪으면서 알게 된 고용주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늘 웃고 있긴 하나 어째서인지 진짜 웃음 같지 않았고,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 때는 단 하나의 경우뿐이었다.
바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수고했어요, 라는 짤막한 인사가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먼저 말도 거시고, 이동 중에 죽간도 안 보셨단 말이지.’
높은 신분의 고용주는 언제나 바빴다.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였고, 여기저기 만나야 할 사람들도 많았다.
지난 일 년간 그런 모습만을 지켜본 마부였으니, 오늘따라 고용주의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절대 내비치지 않았을, 쓸데없는 호기심이 본능적으로 그의 입술을 움직였다.
“저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응?”
“아, 그게.”
마부는 질문을 내뱉는 동시에 후회했다. 자신의 고용주, 그것도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런 마부의 후회가 무색하리만큼, 그의 고용주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관대한 사람이었다.
“흠. 일이라. 있긴 하죠. 얼마 전에 썩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거든.”
“죄, 죄송합니다.”
“아냐, 뭘 이 정도로 사과까지 해. 너무 굽신거리면 나까지 기분이 안 좋아져요. 괜히 옛날 기억이 떠오르거든.”
“예?”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기억 말이에요. 예를 들자면…….”
말꼬리를 흐린 고용주는 문득 창밖을 응시했다.
격자무늬로 이루어진 나무 창틀 너머로,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꼬박 사흘을 굶고 길거리에 나와서, 비단옷 입은 사람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 노래를 부르던, 뭐 그런 기억들.”
“……!”
“아, 오해하지는 말아요.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도 아니고, 그냥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거니까.”
마부는 저 높으신 분의 믿을 수 없는 과거에 입을 떡 벌렸고, 고용주는 천천히 지나치는 풍경 속 사람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보기 좋네, 다들.”
아주 오래된,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화인(火印)이기도 했다.
가난. 죽음. 슬픔. 분노.
태어나면서부터 목을 옥죄었던 굴레를 벗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든 해냈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작은 뇌까림이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마부는 더 이상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을 몰았고, 고용주는 천천히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땅의 말발굽 자국을 보며, 마침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 말씀이십니까?”
불현듯 입을 연 고용주가 반문하는 마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탁. 지금까지 살갑게 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도 겸해서.”
“그, 그런 말씀은 당치도 않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뭐든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 대감.”
고용주, 아니 산서성 도지휘동지 홍진(洪進)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이곳에서 내릴 테니. 그대는 지금 즉시 홍화루(紅花樓)로 가서 전해요. 아니, 하오문 산서지부라고 해야 하나?”
“……!”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보네. 하지만 그쪽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챘을 거야. 금의위(錦衣衛)가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다 해도, 그 많은 이목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홍진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황제의 명으로만 움직인다던 금의위의 존재.
마부는 이중 어느 것에 더 놀라야 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지만, 이내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깨달았다.
“도지휘동지께서는…… 제가 어찌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모든 상황을 전해요. 그리고 하오문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라도 한 사람을 찾아줘요.”
“한 사람이라고 하신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아니 상산왕 전하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 무림인 중에서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홍진은 천천히, 그러나 힘주어 말을 이었다.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
“가요, 어서.”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차는 바람처럼 떠났고, 멀어지는 마차를 끝까지 지켜보던 홍진은 불현듯 돌아섰다.
이내 거센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황명이오. 함께 가 주셔야겠소. 도지휘동지 대감.”
“상산왕 전하께서는?”
“안심하시오. 아직은 무탈하시니.”
“아직이라…… 그래, 그러지 뭐.”
홍진은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주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