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56
#855화
“어떤 호로 새끼가 불을 질렀냐?”
착 내리깔린 음성.
뒤이어 칼날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은 혁무진이 탄성과 함께 부르르 몸을 떨었다.
“크으. 진짜 그때만 생각하면 저까지 지릴 것 같습니다! 역시 적 대…….”
“주둥이 닥치고 앉아라. 호되게 처맞고 똥오줌 지리기 전에.”
“옙.”
“저놈의 주둥이는 도무지 쉬는 법을 모르는군. 남만에서도 저랬느냐?”
적천강의 한숨 섞인 물음에, 옆에 있던 주화란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혁 소협이야 항상 그랬으니까요.”
“입마개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당장 어디서 구하지도 못하니 미칠 노릇이군.”
적천강은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런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풀과 나무로 가득한 숲길을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드물게 한 번씩 사람을 마주치긴 했어도, 어느 미친놈이 사람에게 채울 만한 입마개를 들고 산을 오르겠는가.
“하나 있긴 한데, 드립니까?”
“……?”
있었다. 그런 미친놈이.
심지어 바로 지척에.
“아니, 도대체 그런 걸 왜 들고 다니나?”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적천강의 물음에, 남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구에게나 입마개를 채우고 싶은 놈 하나쯤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도 어지간하군.”
“여하튼 필요하시면 사양 말고 말씀하십시오. 물론 아예 드리는 건 아니고, 잠깐만 빌려드리는 겁니다. 저도 기회가 오면 바로 써야 해서요.”
남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개울가에서 물속을 빤히 들여다보던 태산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태산이. 도저히 못 찾겠다. 나이 많고 머리 좋은 남호의 도움이 필요하다.”
“흠.”
아무리 싫어도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없는 법.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 소리 하려던 남호가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앞에 말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는데…… 그래, 뭘 도와달라고?”
“고기를 찾고 있는데 안 보인다. 남호는 태산이랑 달리 똑똑하지 않나.”
“오늘따라 맞는 말만 하는군. 한데 뭘 잡으려고 거기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느냐. 잉어? 붕어?”
“둘 다 아니다.”
“그럼?”
“오향장육.”
“이런 씨팔……!”
돌멩이를 움켜잡고 태산을 향해 미친 들소처럼 돌진하던 남호의 질주는 금세 가로막혔다.
적천강의 눈짓과 동시에, 어디선가 빛살처럼 나타난 사마표와 송일섬이 좌우에서 그의 양팔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놔, 이거 안 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진정하시오, 남 노인.”
“우리도 이러고 싶진 않소.”
“지금부터 정확히 셋을 센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노부를 놓아주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자. 하나, 둘, 둘의 반. 둘의 반의반…….”
끝내 완성되지 못한 셋과 함께, 풀숲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남호의 모습을 지켜보던 혁무진이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쉽네요.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무슨 소리냐. 누가 들으면 진짜 죽이기라도 하는 줄 알겠군.”
“헛, 아닙니까? 저는 또 적 대협께서 이미 그런 명령을 내리신 줄 알고.”
“…….”
도대체 이놈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적천강의 타오르는 눈빛에 당황한 혁무진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 며칠 전에 그 많던 산적 놈들을 싹 다 썰어 버리셨잖습니까.”
“노부가 무슨 푸줏간 백정이냐, 썰어 버리게? 그리고 산적뿐 아니라 수적 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엄연히 다르다. 전부 죽어 마땅할 놈들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불을 질러서요?”
“그야 당연……이 아니라 놈들이 애꿎은 인명을 해했기 때문이다.”
적천강은 황급히 말을 바꿨지만, 그 모습을 본 혁무진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불 질러서 그런 거 맞네. 그래서 죽인 거네.’
희한하게도 적천강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죄악 중에서도 방화(放火)를 가장 으뜸으로 쳤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마대전 당시, 정파에 합류해 달라는 검성 매종학의 부탁마저 거절했던 그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는 마교도들의 방화 때문이었으니까.
사흘 전의 전투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니, 사실 그걸 전투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하긴 하지.’
혁무진은 내심 앞서 했던 생각을 정정했다.
전투가 아닌 학살극으로.
그만큼 일방적이었고, 잔혹했다.
자그마치 삼백여 명에 달하던 산적과 수적들은 불과 반 시진 만에 전멸당했다.
그 뒤, 혁무진과 그의 일행은 호북에서 왔다는 상단주들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떠났다.
그 불길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유일한 상선 한 척을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받아 타고.
물론 상대방의 동의는 구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어라,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그 사람들도 호북에 도착했겠는데요?”
“갑자기 무슨 딴소리냐?”
“그 사람들이요. 저희가 구해 준.”
“……그게 칼도 몇 번 안 휘두른 놈이 할 소리냐?”
“그래도 휘두르긴 했잖습니까.”
이런 뻔뻔한 놈을 보았나.
어이없는 눈빛으로 혁무진을 노려보던 적천강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까지 겪은 바에 의하면 화룡각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다. 괜히 깊게 생각해 봤자 간신히 치유한 노환이 도질 것 같았다.
‘그나마 한 사람이라도 멀쩡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적천강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대환장 집단에서 유일한 정상인이라 할 수 있는 주화란이 그곳에 있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아이란 말이지.’
무언가에 쫓기듯이 사천당가를 떠난 지도 어언 칠 주야.
사람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적 드문 험지(險地)만을 골라 이동했거늘, 주화란은 지금껏 불평 한마디 없이 밝은 모습을 보였다.
유일한 여인인 만큼 힘든 점이 한둘이 아닐 텐데도.
‘척 보아하니 무공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은 것 같고, 심성도 아주 올곧아. 표왕이 손녀 하나는 아주 잘 뒀군.’
객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길거리 왈패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이른바 후기지수라 불리는 명문 대파의 제자 중에서도 한심한 놈들은 널리고 널렸다.
타고난 재능만을 믿고 노력을 게을리하며, 사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어깨에 힘이나 주고 다니는 멍청한 것들.
적천강으로서는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지긋지긋하게까지 느껴지는 부류였다. 그렇기에 주화란이 더 기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흑심(黑心)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 구파일방의 장로니, 장문인이니 하며 꺼드럭거리는 것들도 젊었을 적에 싹수가 노란 놈들이 한 바구니였거늘. 이 정도면 태경이 녀석한테는 과분……. 아니지. 그 녀석이 뭐가 부족해서? 인물 훤칠하고 풍채 좋지, 무공은 말할 것도 없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접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소면 국물부터 들이켜고 있던 적천강은, 다음 순간 불현듯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적 대협, 괜찮으신가요?”
“으, 응?”
“다름이 아니라 표정이 복잡해 보이셔서…….”
“그게 그러니까. 크흠.”
걱정스러워하는 주화란을 향해 무심코 대답하려던 적천강이 황급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냥 손녀뻘도 아니고, 최소 증손녀뻘인 어린아이에게 늙은이의 괜한 주책까지 들키고 싶진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강소성까지 남은 거리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아, 지금 같은 속도라면 닷새 안에는 도착할 거예요. 만약 사정이 생겨 늦어진다 해도 칠 주야 정도로 예상합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이 년 전에 근방으로 표행(鏢行)을 온 적이 있거든요. 조부님 때부터 내려오는 지도도 따로 챙겨 두었고요.”
“호오. 대단하구나, 대단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적 대협께서 과찬하실 수준은 아니에요.”
얼마 전까지 몸져누운 아비를 대신해서 몇 년간 표국을 이끌었다더니, 대답부터가 아주 딱 부러진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주화란의 모습에, 적천강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그 녀석과는 다르게 아주 야무져.”
“네? 그게 무슨…….”
“그냥 혼잣말이었다. 그나저나 자꾸 듣다 보니 호칭이 너무 딱딱하게 느껴지는데, 앞으로는 편하게 할아버님…….”
슬쩍 주화란의 눈치를 살핀 적천강이 말을 바꿨다.
아무래도 할아버님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직 너무 이르다. 모든 관계는 천천히 한 걸음씩 시작해야 한다.
괜히 한참 앞서갔다가 주화란이 경계심이라도 품게 되면, 하나뿐인 제자와 그녀의 관계에도 분명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
“……이 아니라 노야라고 부르거라.”
“정말요?”
적천강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이들은 이미 과거부터 선대와의 인연이 있거나, 구파일방 혹은 오대세가의 주인 된 자들뿐.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제안에 주화란이 눈을 동그랗게 뜬 그때,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혁무진이 환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감사합니다, 노야.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호칭이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
“바위보다 딱딱한 노부의 주먹에 처맞을 테냐. 아니면 그 주둥이를 닥치고 있을 테냐.”
“…….”
“네놈은 안 된다. 꿈도 꾸지 말거라.”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못 박은 적천강이 험악한 얼굴로 혁무진을 노려보던 그 순간이었다.
“참나, 왜 애를 괴롭히고 그러세요? 불쌍하게.”
저 멀리, 그러나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한 누군가의 목소리.
하지만 적천강은 그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심후한 내공을 지닌 절정 고수라 해도 듣지 못할 미세한 발걸음 소리와 호흡.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만약 그의 이름 앞에 화왕(火王)이라는 별호가 붙지 않았어도, 혹은 초절정 고수가 아니었더라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에게 있어 하나뿐인 제자의 존재란, 언제나 그런 것이었으니까.
“허어, 저 느려터진 놈 보게.”
그러나 적천강은 습관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반가운 기색을 최대한 숨겼다. 조금 전 주화란을 대할 때와는 달리 퉁명스러운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뭐 하다 이제야 설렁설렁 기어 오느냐? 네놈 때문에 꼬박 반나절은 기다렸다.”
“반나절이요?”
‘조장님!’을 외치며 달려든 혁무진의 정강이를 호되게 걷어찬 진태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과장이 심하시네. 반나절은 무슨. 끽해야 겨우 한 식경 지났는데. 안 그래요?”
침이며 약재가 한가득 든 보따리를 들고 뒤따라오던 신의가 점잖게 대꾸했다.
“저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진 소협.”
“왜요?”
“뻔하지 않습니까. 굳이 대답해 봤자 말이 통할 리도 없고…….”
“이야, 의술만 뛰어나서 신의가 아니시네. 통찰력이 아주.”
“별말씀을. 그저 누구나 겪으면 알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지요.”
“……아주 지랄들을 하는구나.”
가늘어진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던 적천강은 한바탕 쏘아붙이는 대신 입맛을 다셨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버릇없는 젊은 놈은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하나뿐인 제자고, 바로 옆의 늙은 놈은 그 젊은 놈의 치료를 위해 먼 길까지 동행하기로 한 의원이다.
더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걱정을 숨기며 이렇게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 몸은 어떠하냐?
적천강의 전음(傳音)을 들은 진태경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지, 괜찮은 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들었던 신의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을 터.
‘지금 당장은 괜찮다. 언제 벽에 가로막힐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리고 문득 말이 없어진 적천강의 모습에, 살짝 쓴웃음을 흘린 진태경은 굳어 있던 몸을 풀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죠? 사흘? 나흘?”
주화란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흘 정도요.”
“사흘이라……. 초하루까지 시간은 남았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한데?”
진태경은 동쪽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남은 시간. 이틀로 줄여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