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58
#857화
“뭐야, 다 어디 갔어. 저기요, 아저씨. 혹시 여기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못 봤어요?”
잔뜩 떡 진 머리와 얼굴 가득한 땟국물.
자리에서 일어나 횡설수설하는 청년의 모습에, ‘아저씨’라 불린 사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봐도 저건 시체가 아닌 것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너무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바람에 그만 착각했던 것 같…….”
“그만. 환궁(還宮)한 뒤에 다시 이야기하지.”
앞서 척후 내용을 보고 했던 금의위 무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사는 삼 년 가까이 모신 자신의 상관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번 사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좌천이라면 다행이고, 자칫하면 삭탈관직(削奪官職)까지도 각오해야 할 상황.
‘빌어먹을.’
입술을 질끈 깨문 무사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내심 억울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실수는 실수.
이미 바닥에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겠지만, 닦아 내는 것쯤은 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닦아 내야 한다.
머지않아 자신에게 떨어질 처벌의 강도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라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 무사가 아직 잠이 덜 깬 청년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어차피 상대는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도 모를 거지 같은 놈. 만약 저항해도 단칼에 베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적어도 무사의 생각은 그랬다.
“무슨 짓이냐.”
저벅.
갑작스러운 사내의 부름에 무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담담하지만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관의 모습에, 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것이, 이대로 놔둘 순 없으니 그냥 제가 직접…….”
“처리하겠다?”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예?”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물었다.”
“그야…… 상황이 상황인 만큼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 연차가 올해로 몇이냐.”
“정 천호(千戶)님을 모신 지는 삼 년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무사가 덧붙였다.
“제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언제나 정 천호님의 지시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진 무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과 그보다 많은 섭섭함이 묻어나 있었다.
수하가 된 지 삼 년이 되어 감에도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상관의 태도도 그랬지만,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인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듯한 처사 때문이기도 했다.
‘금의위에 들어오기 위해 우리 집안에서 쓴 재물이 얼마인데!’
금은보화와 권력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황제 직속의 금의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철저한 심사를 거치는 탓에 만금을 들여서 얻은 자리라고 해도 고작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마저도 들어오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이 한둘인가.
그런 만큼, 무사는 결코 이대로 물러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굳이 아버지를 언급한 것도 일종의 시위에 가까웠다.
저 까다롭고 엄격한 상관에게, 자신의 뒷배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진하게 묻어 있는 시위.
그렇기에 뒤이어 들려온 사내의 한 마디는, 무사가 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삼 년이라, 그만하면 이제 충분하겠군.”
“예?”
“지금 당장 패(牌)를 반납하고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라. 앞서 저지른 실책에 대한 처분은 이것으로 끝마치겠다.”
“……!”
“왜, 아직 할 말이 남았나?”
눈을 부릅뜬 채, 믿지 못할 현실을 마주한 무사가 버럭 외쳤다.
“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누구인지 잊으셨……!”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 년씩이나 수하로 두지는 않았겠지.”
무사의 외침을 가로막은 사내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있는 가문의 후광뿐이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싫다면 그 사실을 몸과 마음에 새기도록.”
“지금 말 다 했소?”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상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더더욱.”
“그게 무슨 헛소……!”
무사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의 귓가에 한 줄기 목소리가 닿은 것은.
“저기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 우선 물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제가 아까부터 너무 목이 말라서.”
“……!”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바로 등 뒤. 숨결에 섞인 단내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도대체 어떻게!’
충격과 함께 전신의 솜털이 곤두선다. 대경한 무사는 번개처럼 돌아서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스릉, 쉭!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寶劍)이 오색 창연한 빛을 뿌리며 등 뒤의 상대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아니, 갈랐다고 생각했다.
보검이 정수리를 파고들려는 그 순간,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두 손이 섬광처럼 움직이기 전까지는.
쩌엉!
합장(合掌)과 함께 울려 퍼지는 굉음. 동시에 무사의 입술 사이로 외마디 탄식이 흘러나왔다.
“공수납백인(空手納白刃)……?”
최소 한 수, 혹은 두 수 이상의 고수가 하수를 상대로나 보일 법한 기예(技藝).
가문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초일류의 경지까지 오른 무사는 이 상황의 의미를 즉각 깨달았고, 단지 거지로만 생각했던 상대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저, 절정 고수!”
그리고 그 경악 어린 외침에, 의문의 절정 고수가 대답했다.
“뭐래, 시벌. 가뜩이나 검기도 못 쓰는 새끼라고 맨날 구박받는데.”
“네,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좆 까. 물이나 내놔. 칼 말고.”
후웅, 퍽!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양 손바닥으로 붙잡고 있던 검을 옆으로 흘림과 동시에, 단단한 무르팍을 무사의 면상에 꽂아 넣은 그는 썩은 통나무처럼 허물어진 무사의 품에서 호리병을 찾아 단번에 들이켰다.
벌컥, 벌컥.
“크으으. 이제 좀 살겠네.”
마치 며칠간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한 것 같은 모습.
사내, 정 천호(天戶)는 호리병을 비우다 못해 탈탈 터는 청년을 물끄러미 바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솜씨가 제법이군.”
잠시만 기다리면 술이라도 나올 거라 생각하는지, 이미 바닥을 드러낸 호리병 입구를 노려보던 청년이 되물었다.
“그 말, 진심이오?”
“물론이다. 비록 검기상인(劒氣傷人)의 경지에는 아직 오르지 못한 것 같지만, 조금 전의 움직임은 극히 효율적이고 훌륭했어.”
“고맙소. 나보다 훨씬 고수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눈물이 날 것 같구려. 반말은 좀 거슬리지만.”
“오해한 모양이군. 그대를 비웃은 것이 아니다.”
“알고 있소. 오해한 게 아니고 그냥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한 말인데.”
“……?”
“내가 시부랄, 그렇게 개고생을 해 가면서 욕이란 욕은 다 처먹고. 뭐 빠지게 수련해도 맨날 검기 왜 못 쓰냐고, 그거 못 하는데 사람 구실을 어떻게 하냐고 구박만 받고. 하다 하다 이제는 길바닥에 버리고 가질 않나……. 큼. 크흐흑!”
정 천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진 하소연에 이어 이제는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 청년의 모습에, 그를 비롯한 모두가 같은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뭐지, 저 새끼는?’
겉모습은 영락없는 거지새끼인데, 알고 보니 미친 새끼였던 상황.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희한하게도 저 미친 새끼가 제법 고수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초일류 주제에 흡사 절정 고수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하지만 지금은 작전을 이행하고 있는 상황.
정 천호의 뒤에 늘어선 금의위 무사들은, 서로를 향해 당혹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몰라. 홍 교위(校尉)님은 아실 것 같은데.’
‘나도 모른다.’
‘아니, 홍 교위님이 모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희를 이끄시는 조장이신데.’
‘조장이 무슨 천지신명이라도 된다더냐? 그래도 나보다 선배님이신 갈 교위님은 아실 거다. 훨씬 선배시니까.’
‘아냐. 나도 몰라…….’
‘예?’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시선과 바짝바짝 말라 가는 입술.
그토록 이름 높은 금의위가 언제 이런 상황을 겪어 봤을까.
이제는 급기야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를 내며 통곡까지 하는 저 미친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간 정 천호가 특유의 담담한 눈빛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다 울었나?”
청년이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조금 남았소.”
“상관없다. 갈 길이 지체되고 있으니 이만 옆으로 비켜서라.”
“음.”
잠시 코를 훌쩍거린 청년이 말을 이었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어째서?”
“길을 비키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간 내가 모시는 분이 크게 노하실 거요.”
“이미 버림받은 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분과 함께하다 보면 잠깐 버려질 때도 종종 있소. 여하튼 무슨 이유에서 내가 이곳에 있는지는 몰라도 금방 돌아오시겠지.”
툭. 툭.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이 말을 이었다.
“이래 봬도 내가 오른팔이거든. 뭐, 새끼발가락일 수도 있지만.”
“그렇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 천호가 물었다.
“호패(號牌)는 있나?”
“호패가 뭐요. 국 끓여 먹는 건가?”
“강호의 무뢰한이라는 뜻이군. 천자께서 바로 세우신 지엄한 국법을 헛소리 취급하는.”
“비슷하오만.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본 거요?”
“단지 확인 절차다. 헛된 판단으로 호패까지 소지한 대국의 백성을 해할 수는 없으니까.”
“흠. 꼭 관부(官府)에 속한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구려.”
“비슷하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지.”
“영 애매모호한 대답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알 것 없다.”
“오.”
담담하지만 서늘한 대답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청년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툭.
미세한 소음과 함께, 구리로 만든 동패가 빛을 반사하며 번쩍인다. 흙먼지가 묻은 표면에는 세 글자가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금의위(錦衣衛).
“어이쿠. 실수로 떨어트렸네.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했는데.”
과장된 어투와 목소리. 하지만 정 천호를 응시하는 청년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리병만 찾으려고 했는데, 웬 이상한 게 딸려 나오더라고.”
“강호의 무뢰한답게 손버릇이 좋지 않군.”
“이번 경우는 정당방위라고 합시다. 내가 모시는 분이었으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나지도 않았겠지만.”
그러자 정 천호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무기를 뽑아 든 금의위들이 강철의 파도가 되어 청년을 에워쌌다.
“네놈을 죽이기 전에, 한 가지만 묻겠다.”
“시간 괜찮으면 최대한 많이 물어봐도 괜찮소. 그래도 조금은 오래 살고 싶어서.”
청년을 바라보는 정 천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 뜻밖의 상황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신호가 떨어지면 청년은 찰나 지간에 죽음을 맞이할 테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던 길을 계속 이동할 것이다.
그러나…….
‘물러설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군.’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모습.
그는 청년의 모습에서 무인의 기개(氣槪)를 읽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혁무진.”
청년, 혁무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정 천호가 입을 열었다.
“배후는?”
이 모든 상황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는 처음부터 그들을 기다렸고,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는 길목마다 사람을 배치해 둔 것이 틀림없다.
정 천호는 반드시 그 배후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고, 그가 원했던 대답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배후라고 불릴 만큼 거창하진 않은데, 막상 들어 보니까 느낌은 썩 괜찮네. 약간 성좌가 된 기분 같기도 하고.”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한 청년의 그림자가, 나무 위에서 그들을 향해 드리워졌다.
“드디어 만났네. 그동안 잘 지냈어?”
“나를…… 아나?”
정천호의 굳은 물음에, 청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널 어떻게 아냐, 이 시벌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