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6
#85화
“형. 괜찮으세요?”
“안 다치셨어요?”
팀원들의 말에 임창수가 이를 악물었다.
“입 닥쳐, 이 새끼들아. 그동안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구경만 하고 있어?”
“아니, 저 그게…….”
“그때 상황이 좀 그랬어요. 죄송해요.”
“의리 없는 새끼들.”
팀원들과 의리로 묶인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았다고 생각했다. 훈련소 낙제생들을 억지로 길드에 꽂아 넣고, 차도 사 주고 용돈도 준 게 누군가.
그 대가로 충성을 받았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외면당하니 뒤통수가 얼얼했다.
‘시발,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수십 억? 분명 큰돈이긴 하지만 임창수로서는 감당 못 할 금액은 아니었다. 그의 명의로 잡힌 건물 한두 개만 팔아도 충분히 지급할 수 있다.
그러나 자존심이 짓밟힌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쳐 죽일 놈.’
임창수가 부릅뜬 눈으로 한 사람의 등을 노려봤다.
검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저놈, 진태경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어디서 뭐 하다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 주마.’
놈의 정체가 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확실한 건 결코 평범한 C급 헌터는 아니라는 거다.
B급 몬스터 여덟 마리를 정면 승부로 박살 낼 수 있는 C급 헌터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정체는 왜 숨긴 거지? 혹시 도피 중인 범죄자? 아니면 부정 등록자? 일단 게이트에서 나가기만 하면 싹 다 털어 주마.’
임창수가 은밀히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던 그때였다.
휙!
돌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진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먹이를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에 임창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야.”
“예, 예?”
“너 방금 내 욕 했지.”
“아, 아, 아닌데요.”
“아니긴. 말 더듬는 것만 봐도 사이즈 나오는데. 어쩐지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끔따끔하더라.”
임창수는 대격변 시대의 헌터이자 전쟁 영웅인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위험한 상황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해라.
“진짜 아닙니다.”
“내 관심법은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알려 주는데?”
“관심법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마법도 있는데 관심법이 왜 없어.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버려.”
“어쨌든 맹세코 아닙니다.”
“아냐. 맹세코 맞아. 그리고 너도 한 대 맞아.”
빡!
눈물이 핑 돌았다. 스무 살 이후로는 아버지한테도 맞아 본 적이 없는 꿀밤이다. 그런데 기껏해야 또래로 보이는 놈한테, 그것도 팀원들과 여자들 앞에서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제법 손맛이 있네. 딱 혁무진 때릴 때 느낌인데, 이거. 아무튼 조심해라. 응?”
혁무진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임창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예.”
“근데 이놈의 미로는 끝도 없네. 야, 여기 보스 존 얼마나 남았어?”
“저도 몰라요. 미로라서.”
“몬스터도 더 이상 안 나오고. 심심해 죽겠다.”
“…….”
보이는 족족 때려잡으니까 안 나오지!
임창수와 팀원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저 다섯 명만으로도 충분, 아니 진태경 한 명으로도 충분했다.
‘괴물 같은 놈. 진짜 A급 헌터라도 되나?’
진태경 혼자서만 서른 마리는 넘게 쓰러트린 것 같다. 좀 지쳤나 싶다가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는 또 펄펄 날아다녔다.
‘레이드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어.’
보통은 레이드의 끝으로 갈수록 피로 축적으로 느려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도 같은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레이드 속도가 빨라진다는 건…….
‘계속해서 강해진다?’
임창수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무슨 게임 캐릭터가 레벨 업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되나. 꿀밤을 맞더니 머리가 고장 난 기분이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팀원들이 우물쭈물 다가왔다.
“창수 형…….”
“오빠, 괜찮아? 어떡해. 이마에 혹 났어.”
“기분 안 좋으니까 다 꺼져. 너희는 나가기만 하면 싹 다 모가지야. 알아?”
아무리 체면을 구겨도, 이빨이 뽑혀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임창수의 으름장에 팀원들이 숨을 삼켰다.
‘할부 안 끝났는데.’
‘상동 길드 나가면 어디에서 받아 주나.’
‘이번 달 카드값이…….’
이제껏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임창수의 원조 덕분이다. 그들 모두 헌터니만큼 굶어 죽을 일은 없겠지만 어디를 가도 지금 같은 대우는 기대하기 어렵다.
“거기서 끝낼 줄 알아? 기대해. 어딜 가더라도 상동 길드 이름으로 전화 한 통씩 꼭 넣어 줄 테니까. 이 바닥 좁은 거 알지?”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앞길까지 방해한다는 말에 팀원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창수 형, 그건 좀.”
“형? 너 좋을 때만 형이냐?”
“오빠,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러니까 이 자식들아. 사람 잘 보고 줄을 댔어야지.”
당장 모두 뺨이라도 한 대씩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큰 소리를 냈다가는 언제 또 진태경이 돌아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발, 내가 어쩌다가…….’
꿀밤이 무서워서 화도 마음대로 못 내는 꼴이라니. 임창수가 바닥에 침을 탁 뱉고 돌아선 그때였다.
덥석.
“창수 형. 아니 임 팀장님, 이러시면 어떡해요.”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줘, 오빠. 응?”
“놔라. 두 번 말하기 싫다.”
“이번엔 진짜. 진짜로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예?”
“……시키는 거 다 한다고?”
동료의 손을 뿌리치려던 임창수가 문득 동작을 멈췄다.
힐끗 고개를 돌리니 길드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거리가 벌어져 저 멀리 앞서가는 진태경 일행이 보인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송송이의 환상적인 뒤태도.
‘잠깐.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의 눈에 비친 진태경은 괴물이지만 딱 한 가지 약점이 있어 보였다. 송송이라는 여자.
‘아까 보니까 완전 뻑이 갔던데.’
눈치채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누구나 한 번 본 것만으로도 그가 송송이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니까.
‘분명 C급 힐러라고 했지.’
힐러를 제압하는 것은 닭목 비트는 것보다 쉽다. 좋아하는 여자가 붙잡혀 있다면 진태경도 쉽게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끝이지.’
진태경을 제외하면 나머지 셋은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길드장이라는 노인네는 B급이지만 마법사라 근접전은 쥐약일 테고, E급 탱커인 아저씨는 논할 가치도 없다.
약간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최민우. 그놈인데…….
“방금 그 말, 믿어도 되냐?”
“물론입니다.”
“저희만 믿으세요.”
“오빠, 사람을 왜 이렇게 못 믿어? 우리가 이 정도 사이밖에 안 돼?”
그에겐 명령에 복종할 B급 헌터 넷과 C급 헌터 다섯으로 이루어진 레이드 팀이 있다. 모두 임창수가 주는 먹이만 먹도록 길들여진 녀석들이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들어…….”
짤막한, 그리고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팀원들은 긴장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될까요?”
“가능성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오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사람 죽이는 거면 나는 좀.”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도 그건 좀…….”
“됐어.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내가 그 정도로 막 나가는 놈은 아니야. 일단 카메라 뺏고, 저 빌어먹을 놈한테 씻지 못할 굴욕을 안겨 줘야지.”
“휴우. 다행이다. 그럼 난 무조건 오빠 편이지.”
“잘해. 이번에 망설이거나 조금이라도 뒤로 빼는 놈 있으면 알지?”
“당연하죠.”
“저희만 믿으십쇼, 팀장님. 아니, 형님. 헤헤.”
임창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내 자존심을 짓밟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곧 나오는 보스 존(Boss Zone)에서 겁도 없이 누굴 건드렸는지 똑똑히 깨닫게 해 줄 생각이었다.
마침 진태경에게 대적할 만한 몬스터도 그곳에 있다.
‘미노타우로스 대전사.’
이곳,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의 보스 몬스터.
B급 몬스터 주제에 육체 능력만큼은 A급에 맞먹는다는 괴물 같은 놈이다.
‘대전사가 놈의 힘을 소진시키면 그때 결행한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는 오랑캐로. 괴물은 괴물로 물리친다.
양쪽 모두 지친 그때가 바로 기회다. 어이없이 잃게 될 돈도, 땅에 떨어진 자존심도 한 번에 회복할 수 있다.
“야, 빨리 와! 보스 존이잖아!”
다음 순간 진태경의 외침이 들려왔다. 임창수가 활짝 웃었다.
“예! 갑니다!”
보스 존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 * *
“일섬(一殲).”
콰아아아.
창날 끝에서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닿는 모든 것을 찢고 집어삼키는 백색 와류가 근육질의 가슴에 닿았다.
– 모오?
콰드드득.
살았는지, 죽었는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놈의 가슴에서 창을 뽑아낸 순간 시스템 알림이 울렸으니까.
띠링.
– [Lv.70 미노타우로스 대전사]를 처치했습니다!
– 레벨 업!
– 퀘스트, [B급 게이트 클리어]를 완료했습니다!
– 당신의 기여도를 계산 중입니다…… 완료되었습니다!
– 퀘스트 성공 보상이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휴우.”
역시 마지막은 큰 거 한 방이지. 몸이 엄청 피곤하긴 하지만. 나는 창에 묻은 피를 털며 돌아섰다.
“빨리 부산물 챙겨서 나가죠. 배고파 죽겠…… 다들 왜 그러세요?”
임꺽정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그걸 몰라서 묻냐?”
그가 죽은 보스 몬스터의 사체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한 방에 B급 보스 몬스터를 끝장냈으니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눈빛이다.
“음, 운이 좋았던 걸로 해 두죠.”
“운?”
“네, 운.”
정말 운이 좋아서다.
내가 고시원에 살았던 것도, 고시원 앞에 캡슐이 버려진 것도. 전부 다.
“허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구먼. 됐다.”
다른 사람들도 임꺽정과 비슷한 반응이다. 이미 나와 레이드를 경험한 적 있는 최 팀장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지금 알면 됐죠.”
“이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더 중요한 볼일이 남았거든.
나는 최대한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송이 씨, 저 힐 좀 부탁드려도 될…… 너희들은 거기서 뭐 하냐?”
“아.”
“뭐냐고. 왜 여기 있어?”
“그냥, 그냥 있는데요.”
“저, 저는 언니가 너무 예쁘셔서.”
송이 씨 옆에 붙어 있던 상동 길드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한다.
‘뭐야, 이것들.’
나랑 송이 씨 사이에서 방해되니까 꺼지란 소리였는데. 내가 그렇게 무섭게 보이나?
“임창수 어디 있어?”
한마디에 상동 길드원들이 홍해처럼 쫙 갈라졌다. 임창수가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너 얼굴 왜 그래? 어디 아파?”
“모, 몸살 기운이 조금.”
“쯧쯧. 포션도 챙겨 먹고 그래, 인마. 너 집에 돈 많잖아.”
“…….”
“어쨌든 빨리 부산물 수거하고 가자. 피곤하다.”
“네, 넵.”
임창수가 방해꾼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기다렸던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송이 씨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배고프시죠? 저녁으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어떠세요?”
송이 씨도 나를 따라 웃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채식주의자라.”
“이상하네. 어제 고기 잘 드셨던 것 같은데. 그럼 샐러드 바 가실래요?”
“제가 육식주의자라.”
“…….”
이거 까인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