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65
#864화
“수하의 죄는 곧 소신의 잘못. 부디 용서하소서. 전하.”
백연은 빙그레 웃으며 눈앞의 어린 왕을 바라보았다.
유난히도 또렷하게 빛나는 상산왕의 눈동자에는 수하의 피를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와 같은 모습이.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백연, 당신이 감히……!”
곧장 어린 주군의 앞을 가로막은 홍진이 끓어오르는 듯한 외침을 토해 냈지만 백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 쓰지 못했다.
어느 환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누군가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 양반 이거, 좋게좋게 넘어가나 싶더니 선 세게 넘으시네.”
청년이 툭 던진 한 마디에, 백연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태원진가의 진태경.”
“문제, 있지. 그것도 큰 문제가.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턱을 긁적인 진태경이 지면에 떨어진 목을 가리켰다.
소름 돋을 만큼 깔끔하게 잘려 나간 단면에서는 쉴 새 없이 핏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전하가 보고 계신 앞에서 살인을 저질러? 원래 금의위 지휘사쯤 되면 이렇게 막 나가도 되나?”
“물론.”
“뭐?”
“그래도 된다고 했네. 아무리 큰 권세를 누리는 고관대작(高官大爵)도, 그것이 설령 황족이라 해도 나와 금의위는 오직 한 분만을 섬기며 그분의 뜻에 따르니까.”
백연은 손을 들어 어둠에 잠긴 하늘을 가리키고, 이어 자신의 등 뒤로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건물들을 향해 두 팔을 펼쳤다.
“천자(天子). 하늘을 대신하여 이 천하를 다스리시는 황제 폐하를 제외한다면, 그 누가 감히 금의위를 사사로이 벌할 수 있겠나.”
“……!”
“내가, 아니 우리 금의위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폐하를 위해서야. 만약 그분의 권위를 해하거나 맞서려는 자가 있다면…….”
입은 여전히 웃고 있으나, 눈은 아니다.
백연은 착 가라앉은 눈동자로 주위를 훑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동창의 환관들. 긴장하고 있는 홍진과 혁무진. 마지막으로 자신과 상산왕 사이를 가로막은 진태경의 모습을 눈에 담은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것이 누구라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할 걸세.”
툭.
백연이 걷어찬 목이 데굴데굴 굴러 누군가의 발치에 닿았다. 피에 젖어 들어 가는 가죽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진태경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가 반역이라도 저질렀다고 우길 셈인가?”
“상산왕 전하께서 반역을? 허, 이 친구. 무서운 소릴 하는군.”
소리 내어 웃은 백연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지, 아니야. 나는 다만 손수 처벌했을 뿐일세.”
“처벌이라.”
“감히 상산왕 전하가 보시는 앞에서 검을 뽑았으니 이는 죽어 마땅한 중죄. 앞서 들었던 누구의 말처럼 완전히 조져 놔야 하지 않겠나.”
“내 의견까지 반영해 주니 고맙긴 한데,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조져야 할 놈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네.”
진태경이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족 앞에서 검 뽑은 놈은 뒈졌고, 피를 본 놈은 어떻게 되려나.”
“글쎄. 반역자가 될지도 모르는 자를 즉결 처분했으니, 그에 마땅한 치하와 상이 내려지겠지.”
“누구 마음대로?”
“자네는 모르겠지만, 금의위 내에서 벌어진 사건은 통상적으로 신속하게 마무리된다네. 결정권자가 두 명뿐이거든.”
진태경은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감이 잡힌다.
두 명의 결정권자 중 한 명은 금의위의 존재 이유나 다름없는 천자일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금의위 지휘사?”
“정답. 생각보다 명석하군. 태원진가의 진태경.”
“빌어먹을.”
“다른 방법도 있으니 벌써부터 애석해하지 말게. 만약 나를 처벌하고 싶다면, 황제 폐하께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리면 될 테니까. 대국의 모든 백성들은 그럴 권리가 있거든. 아, 물론.”
백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호패(號牌)조차 없는 강호의 무뢰배라면 곤란하지만.”
“……허.”
“또 다른 방법도 있긴 한데, 듣고 싶나?”
잠시 생각하던 진태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래도 곤란하지.”
“어째서?”
“죽이고는 싶은데, 죽기는 싫거든.”
“전자는 허무맹랑한 헛소리에 가깝지만, 후자는 제법 그럴듯한 이유로군. 그리고 지금 그 대답이 자네 목숨을 살렸어.”
철컥, 철컥.
백연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슬리는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황금빛 갑옷을 걸친 채 진태경의 앞에 선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그의 옆구리 사이로 보이는 어린 왕을 응시했다.
“상산왕 전하. 혹여 전하께서도 소신의 행동이 불손하다 생각하십니까?”
“…….”
“전하. 소신이 이리 여쭙고 있지 않습니까.”
파르르 떨리는 숨결이 전해진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것은 백연의 갑옷뿐만이 아니었다.
“그대는…… 실로 오만무례한 자로구나.”
상산왕 주표는 몸을 떨면서도 백연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나, 짐은 그대를 탓하지 않겠다. 형님 폐하께 그대의 죄를 청하지도 않을 것이다.”
백연이 과장되게 허리를 굽혔다.
“참으로 감사한 이야기입니다만,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그대는 형님 폐하의 신하이지, 짐의 신하가 아니니까.”
“……!”
“짐도, 그대도 결국 폐하의 신하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짐의 신하였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군주(君主)란 불충한 신하를 용서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백연의 얼굴 위로 뜻 모를 감정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고, 곧 아무런 대답 없이 그대로 돌아선 그는 수하들을 향해 턱짓했다.
“긴 여정으로 피로하신 모양이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충(忠)!”
“아, 정 천호는 잠시 남고.”
잠시 제자리에 멈춰 있던 금의위 무사들이 다시금 일행을 에워쌌다.
호위인지 포위인지 알 수 없는 그 움직임 속에서 백연은 나직한 전음(傳音)을 흘려보냈다.
―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마치 흘러가듯 내성(內城)으로 향하는 황금빛 물결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진태경의 답신이 날아들었다.
― 이미 내 인생이 후회다. 남 신경 쓰지 말고 좆이나 까 잡숴.
감히 그 누가 금의위 지휘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매번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젊은 무뢰배의 대답에 헛웃음을 흘린 백연은, 동창의 환관들을 남겨 둔 채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명령으로 남아 있던 정호군 역시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따로 하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그렇다. 하나 명을 듣기에 앞서 미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 또한 금의위가 지녀야 할 덕목이다.”
“상산왕 전하와 그 일행들을 빈틈없이 감시하겠습니다.”
“원했던 대답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렇다면…….”
“빈틈없이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게, 그러나 동시에 빈틈이 있도록 만들어라. 누군가는 반드시 그 틈을 비집고 접근할 수 있도록.”
“……!”
철컥. 철컥.
백연은 끝없이 위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자그마치 수백, 수천 개나 되는 계단은 바로 천자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 어떤 고관대작이라 해도 등청(登廳)할 때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 계단을 올라야 했다.
자신이 지닌 권세도, 금은보화도 내려놓은 채.
하늘과 맞닿아 있는 천자의 위엄을 상기하며.
“그들이 누굴 만나는지. 누가 그들을 찾아오는지. 그 모든 것을 감시하고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우선 넓게 펼쳐야 한다.
촘촘하게 에워싼 채 낚아 올리는 것은 그다음이다.
물론 체구가 육중하거나,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무언가가 그물을 뜯을 가능성 역시 생각해야 했다.
“일전에 맡긴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떨군 정호군의 모습에 백연이 작게 혀를 찼다.
“영악한 놈들이로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상관없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할 것이다.”
“이를 말씀입니까.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반드시 빈틈없이 이행하겠습니다.”
“빈틈없이? 그 어떤 명령이라도?”
“예.”
문득 걸음을 멈춘 백연이 돌아서서 정호군을 응시했다. 작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 만약, 네게 상산왕 전하를 시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리 하겠느냐?
“……!”
부릅뜬 두 눈동자와 흔들리는 동공. 그런 수하의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백연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리 놀랄 것 없다. 단지 농일 뿐이니까.”
“농……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하지만 네 대답이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언제 맺혔는지 모를 식은땀 한 방울이 정호군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목숨 바쳐 따르겠습니다. 그것이 황명(皇命)이라면.”
백연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천천히 흩어졌다. 묘한 표정으로 수하를 응시하던 그가 다시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네 말이 옳다. 실로 금의위다운 대답이로군.”
“……송구합니다.”
“무엇이 송구하단 말이냐. 금의위란 본래 황명에 죽고 사는 이들. 오직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것을.”
백연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횃불과 황금빛 갑옷들이 보였다.
비록 지금은 볼 수 없으나, 저 철통같은 호위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용의 핏줄도.
‘상산왕 주표.’
어린 왕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늙은 무장은 똑똑히 기억한다.
천자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암투 속에서 목숨을 건진 유일한 직계 황족을.
장장 십여 년 만에 마주한 그 어린아이는 훌쩍 자라나 있었다. 몸도, 마음도.
“……그래서 더 위험해졌지.”
마치 속삭이듯 흘러나온 백연의 혼잣말에 정호군이 고개를 든 그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은 백연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어느새 웃음기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냉엄한 얼굴로.
“한 가지만 기억하거라.”
“하명하십시오.”
“이 황궁에 한번 발을 디딘 이상, 그 누구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정호군은 즉각 깨달았다.
저 말은 비단 상산왕 주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의위가 주시해야 할 이는 용의 핏줄뿐만 아니라, 감히 신룡(神龍)이라 칭해진 강호의 무뢰배 또한 있었으니.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용은 오직 천자만을 상징하는 신화 속 영물.
하지만 어린 왕은 다름아닌 천자가 기거하는 황궁에 허락받지 않은 신룡을 들였다.
대국의 법도를 무시하는 저 무뢰배를 자신의 호위로 삼고, 두둔하며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 선택이 불러올 결과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정호군은 물론이고, 이 상황을 예상하고 묵인한 백연조차도.
그들이 아는 열화신룡 진태경은 늘 그래 왔으니.
언제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사방을 휩쓸 폭풍과 불길을 불러왔으니.
화르륵.
어둠 속, 어디선가 불어온 거센 바람에 횃불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