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68
#867화
쿠르릉.
하늘이 울었다. 눈부신 낙뢰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폭우에 궁인(宮人)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여러 환관과 궁녀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후궁의 처소에 혹여 빗물이라도 샐까 하는 걱정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갔고, 황궁 곳곳을 지키는 금의위들은 죽립을 눌러쓴 채 제자리를 지켰다.
황궁에 속한 모두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상을, 그 반대라면 벌을 받는다.
그리고 쉼 없이 퍼붓는 빗물 속, 홀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한 사내는 이 드넓은 황궁에서 상벌의 구애를 받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에게는 천자의 재가(裁可) 없이도 다른 누군가에게 상벌을 내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황궁에서 일하는 궁인 중 그 누구도 감히 사내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거나 가까워지려 애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저 빗물조차도.
솨아아아.
폭우 속을 거닐고 있음에도 사내의 전신에는 한 방울의 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반백의 머리카락은 바짝 메말라 있고, 기름 먹인 천으로 닦아 낸 황금빛 갑옷은 여전히 눈부신 광택을 뿜어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하고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사내는 달랐다.
애초부터 그가 가진 것은 막강한 권력만이 아니었으니.
원초적인 힘.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일신의 무력.
비현실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사내에게는 있었고, 중요한 만남을 앞둔 그는 자신의 몸이 젖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
우우웅.
웅혼한 공력에 대기가 파르르 떨렸다.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힌 빗줄기는 이번에도 사내의 몸에 닿지 못한 채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요새 잠잠하다 싶더니…… 한바탕 제대로 퍼부어 대는군.”
낙뢰로 번쩍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사내는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의 앞을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렇듯이.
철컥. 구구구궁.
그저 사내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깊게 눌러쓴 죽립 아래로 예리한 눈빛을 흘리던 금의위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그가 지나갈 때까지 목례를 거두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길을 터라.”
사내가 불쑥 내뱉은 한 마디에,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로 가득했던 넓은 화원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스아아아.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꼿꼿이 서 있던 이국(異國)의 나무와 꽃이 고개를 숙인다.
스르륵 움직이는 무성한 잎사귀와 가지들 사이로, 허락된 자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숨겨진 길이 열렸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
황궁의 화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겉모습에 속아 함부로 발을 디딘 불청객은 무수한 기관진식(機關陣式)에 둘러싸여 벌집이 되고 만다.
아니, 비단 화원뿐만이 아니었다.
황궁은 그 자체로 온갖 위험이 득실거리는 복마전(伏魔殿)이자 진정한 의미의 도산검림(刀山劍林).
허락받지 않은 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설령 일신의 무위가 하늘에 닿은 이라 해도 절대 생사를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사내는 다섯 개의 문과 수십에 이르는 전각을 가로지르며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건청궁(乾淸宮).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힌 현판 아래, 철탑처럼 서 있던 두 중년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
거기에 더하여 같은 날, 한 배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 주듯 서로를 쏙 빼닮은 이목구비까지.
쌍둥이인 그들은 사내를 향해 공손히 말을 이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사내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껏 수없이 당부했음에도 같은 말을 동시에 하는 쌍둥이가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몸에서 풍겨 오는 짙은 피비린내 때문이었다.
“선객이 있었던 모양이군.”
“예.”
“예.”
“죽였나? 배후는?”
“사로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로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그만. 한 번이면 족하다고 몇 번을 말했나. 그래서 침입자를 생포하지 못했다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린 쌍둥이가 작게 웅얼거렸다.
“극독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어금니 아래에요.”
“극독을 숨기고 있었, 아니 최선을 다했지만 막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사내가 작게 혀를 찼다.
이곳까지 도달했다는 것부터가 침입자가 대단한 무위의 소유자라는 증거.
생포하여 배후를 알아내지 못한 것은 뼈아픈 실책이지만, 지금은 질책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설마 궁 안까지 발을 디딘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이군. 내심 중얼거린 사내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안에 계신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머리 위의 현판을 힐끗 바라본 뒤 걸음을 옮겼다.
건청궁. 건청. 맑은 하늘을 뜻하는 저 두 글자가 오늘만큼은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벅. 저벅.
궁 내부는 고요했다.
사람은 물론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는 벽에 걸린 수많은 그림과 공예품들만이 흐릿한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상대가 누구든,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자라면 언제든지 달려들어 자신의 전신을 난도질할 그림자들을.
그리고 어느덧 멈춘 그의 발걸음 끝에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거대한 공간과 그곳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광활한 천하의 주인이.
“신, 금의위 지휘사 백연.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나이다.”
그 순간.
사락.
사방에 드리워진 형형색색의 비단이 흔들렸다.
은은한 향을 머금은 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속, 얇은 비단 사이로 눈부신 백의(白衣)를 걸친 누군가의 뒷모습이 비쳤다.
“왔는가.”
나직한 음성이 내부를 울렸다. 언뜻 들어보면 담담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
대국의 천자(天子)는 혼잣말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 다른 누군가가 과인을 해하려 하는 꿈을.”
“……!”
“그렇게 피를 뒤집어쓴 채 한참을 싸웠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끝없이 몰려왔고, 과인 역시 그들을 끝없이 베어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깨어난 후에야 그것이 한낱 미몽(迷夢)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말없이 고개를 든 사내, 백연은 천자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여 또 다시 앵속(罌粟)에 손을 대신 겝니까.”
“그대는 이것이 앵속으로 보이는가?”
“송구하오나, 소신의 눈에는 틀림없이 그리 보입니다.”
“틀렸다. 이것은 앵속이 아닌 약이다. 과인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지.”
그 순간, 백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폐하, 신이 긴히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길고 넓은 소매를 펄럭였다.
스륵.
스치는 소리와 함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인기척이 썰물처럼 사라진 그때. 천자를 향해 굽혀져 있던 백연의 허리가 곧게 펴지고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업(大業)의 완성이 코앞이거늘,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추태를 보이시오.”
만약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자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을 것이다.
그만큼 백연의 어조는 군주를 대하는 신하가 보일 수 없는 날 선 것이었고, 무엄한 것을 넘어 도전적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천자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세상의 주인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불쑥 입을 열었다.
“대업이라, 그래. 대업이 있었지.”
“부디 잊지 마시오. 그날의 약조를.”
“잊어?”
천자가 실소하듯 중얼거렸다.
“과인은 잊지 않았다. 그날 이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
마치 병을 앓는 이처럼 힘없는 목소리.
그러나 천자를 바라보는 백연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동시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미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전에,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잠시 침묵하던 천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멀리 와 버렸다. 사 황자에 불과했던 그는 어느덧 광활한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었고, 앵속 따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광야를 달리는 말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했던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치에 오른 천자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말이었다. 더는 자신의 의지로 멈출 수 없게 된, 피를 토하며 쓰러지더라도 목적지를 향해 내달려야 하는 한 마리의 말.
우두둑.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 손아귀에서 화려하게 치장된 곰방대가 부러진다. 천자는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굳게 말아쥐었다.
푹.
손을 파고드는 거친 감촉과 불에 덴 듯한 통증. 그리고 아주 조금씩 깨어나는 정신.
“아.”
하늘에게 경배하듯, 천장을 향해 고개를 높게 들어 올린 천자는 눈 감은 채 신음했다.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연이 물었다.
“어의를 불러드리리까.”
“필요 없다, 어의 따위.”
눈을 뜬 천자는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대전에서 그 아이를 만나겠다.”
“그 아이라면.”
“주표. 과인의…… 하나뿐인 동생이 얼마나 장성했는지 궁금하구나.”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해도 좋을 거요. 폐하께서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장성하셨으니.”
“그만큼 더 위험해졌다는 뜻이군.”
“…….”
백연은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천자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에는 온갖 벌레가 꼬이는 법.
상산왕 주표가 황도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적들은 소매 밑에 숨겨 두었던 칼날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바로 오늘, 백연보다 앞서 이곳을 찾았던 이름 모를 암살자처럼.
“백연,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얼음장처럼 서늘한 목소리에 멈칫한 백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신, 폐하의 말씀을 뼈에 새기겠나이다. 부디 지금까지의 불충함을 용서하소서.”
펄럭.
대답 대신 내저어진 천자의 소맷자락에, 백연은 천천히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몇 걸음 만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한데, 그자는 어떠한가?”
“그자라면…….”
“주표. 그 아이와 함께 온 무림인 말이다.”
열화신룡 진태경.
불현듯 떠오른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백연이 입을 연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모르겠습니다.”
전장에서 수만을, 황궁에서 또 수만을 취조하고 죽였다.
그러나 그것이 백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