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71
#870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황궁에 도착한 이후에도 천자와 대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딱히 하지 못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상대는 이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존재.
그에 비하면 나는 호패조차 없는 강호의 무뢰배요, 태원진가라는 변변찮은 무가의 자제에 불과하다.
내가 무림에서 어떤 위치인지, 그동안 태원진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천자라는 두 글자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이곳은 황궁이고, 그는 문무백관과 수많은 백성을 거느린 황제니까.
그런데 용의 핏줄로 태어나 반역으로 천하를 움켜쥔 황제가, 홍진도 허락받지 않은 자리에 나를 부르다니.
‘혹시 개노잼 몰래카메라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우선 몸 상태를 점검했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손바닥으로 힘주어 뺨을 두세 번 두드린 다음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했던 말, 다시 해 봐.”
“뭐?”
“다시 해 보라고.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나를 말 없이 바라보던 정호군이 순순히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상산왕 전하와 태원진가의 진태경. 이 두 사람뿐이라고 했다.”
저 무뚝뚝한 표정을 보아하니 몰래카메라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이 예상치 못한 현실에 잠시 침묵하던 내가 재차 물었다.
“이거 혹시 꿈인가?”
정호군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조금 전에 뺨을 치던데. 그것도 꽤 세게.”
“그랬지.”
“아프지 않았나?”
“아팠지.”
“그럼 꿈이 아니겠지.”
“그렇군.”
두 번째 침묵은 조금 더 길었고,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내가 아닌 홍진이었다.
“어째서죠?”
“모르오.”
짤막하게 대답한 정호군이 덧붙였다.
“우리 금의위는 그저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를 뿐이오. 어떤 이유나 의문도 필요 없지.”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공무원인 금의위들 입장이었고, 내가 처한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왜 갑자기 날 부르는 거지?’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아니, 벌써부터 뒷골이 싸하다.
간밤의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듯하던 정호군의 태도와 역모를 논하던 마삼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왜일까.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입술을 뗐다.
“만약에……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호군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대답했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나?”
“요새 몸이 좀 안 좋아서. 게다가 이미 말했다시피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
“병환이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오. 진짜?”
“물론이다. 이참에 처소도 바꾸는 게 좋겠군.”
“아니,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
“여봐라. 지금 즉시 형부(刑部)에 연통을 넣어라. 가장 넓은 곳으로 준비하라고.”
“응?”
나는 정호군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저 형부가 처제 형부 할 때 그 형부일까. 그렇다면 정호군이 대륙 최초의 트렌스젠더 금위군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기. 그 형부가 혹시.”
“별것 아니다. 그저 금의위가 관리하는 형집행 기관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
존나 별거네. 시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정호군을 노려보던 나는, 상산왕 주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전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금의위들을 따라 전각을 나서는 내 귓가에, 혁무진의 안도 섞인 중얼거림이 닿았다.
“휴,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진짜 잡혀가는 줄.”
개새끼야.
* * *
황궁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학창시절 VR 기기로 체험 학습을 했던 자금성보다도 몇 배나 더.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금의위가 양심껏 가마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오르시지요, 전하.”
“어? 내 건?”
“형부에 다시 연락해야겠군.”
“…….”
물론 나를 위한 가마는 없었고, 황족인 상산왕 주표만이 네 명의 금의위가 들쳐 맨 사인교(四人轎)에 앉아 이동하는 호사를 누렸다.
“이동한다.”
쉬쉬쉬쉭!
정호군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쾌속한 속도로 나아가는 황금빛 물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상산왕의 사인교 옆에 바짝 붙어선 나는 황궁 곳곳을 빠짐없이 시야에 담았다.
‘알고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것 역시 내 오랜 습관 중 하나다.
어느 곳에는 어떤 건물이 있고,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의 숫자는 몇이며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만약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천자가 아닌 수많은 창칼이라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도주로를 파악해 두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 혼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더욱.
– 전하.
은밀히 흘려보낸 전음(傳音)에 상산왕의 몸이 작게 움찔거린다.
하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고, 나는 순식간에 평정심을 회복한 어린 왕을 향해 재차 전음을 날렸다.
–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제게 모든 걸 맡기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상산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 순간, 나는 행렬의 선두에서 앞만 응시하며 달려가던 정호군의 상반신이 돌아서려는 것을 눈치채고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저들은 뭐지?”
다행히 상황과 타이밍은 완벽했다.
반 박자 늦게 상산왕을 힐끗 바라본 정호군은, 내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철벅. 철벅.
보보(步步)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과 피가 뒤섞인다.
또 다른 금의위들에게 둘러싸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어딘가로 끌려가는 수십여 명의 사내를 확인한 정호군이 대답했다.
“보면 알 텐데. 죄인들이다.”
“그건 누구나 알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어본 거야.”
“흠천감(欽天監)에 속한 이들이다. 아니, 한때 속해 있었다고 해야 옳겠군.”
“흠천감?”
“천문(天文)을 읽고 분석하는 기관이 바로 흠천감이다. 그리고 저들은 어젯밤의 낙뢰와 폭우를 예측하지 못한 죄로 처벌받겠지.”
“……!”
“괜한 것에 신경 쓰느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마라.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금세 멀어져 버린 죄인들의 뒷모습은 쉽게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거…… 제대로 미친놈들이네.’
날씨 한 번 예측 못 했다고 사람을 반 시체 꼴로 만들어 놓다니.
단지 시대상의 분위기라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훨씬 가혹하게 느껴졌다.
‘아니, 아무리 그런 시대라고 해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생각을 바꾸면 더 많은 것이 보이기 마련.
나는 금의위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와중에도 지금껏 눈여겨 보이지 않았던 궁인(宮人)들의 표정을 살폈다.
목각인형처럼 딱딱한 얼굴과 움직임. 사방 어디에나 깔린 군사들을 힐끗거리는 시선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떨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다.’
황제의 뜻으로, 혹은 단순히 내뱉은 한 마디로 누군가가 고문당하거나 죽어 나간다.
아무리 담 큰 자라고 한들 감히 거부할 수도, 불만을 내비칠 수도 없을 것이다.
이곳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황궁이고, 수많은 고관대작은 물론 피붙이마저 살해하며 옥좌에 오른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일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피부에 와닿는 싸늘하고 무거운 공기는, 단지 전제군주(專制君主)의 시대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공포 정치.’
어질고 현명한 현군(賢君)은 하해와 같은 인덕으로 사람을 포용한다.
그러나 폭군(暴君)은 창칼과 공포로 사람들을 자신이 만든 가시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는다.
숱한 이야기만 들어봤을 뿐 직접 겪어 본 바는 없지만, 작금의 천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내가, 그 폭군을 만나기 위해 제 발로 찾아가고 있다는 거지.’
습관처럼 품 안을 더듬자 곧바로 이물감이 느껴진다. 신의(神醫)가 제조한 단환이 들어 있는 작은 꾸러미다.
그 단환에서 풍겨 오는 끔찍할 만큼 고약한 냄새를 떠올리자, 우습게도 약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만약, 만약 내가 이곳에서 일전을 치른다면 어떻게 될까.’
이걸 다행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확인한 바로는 황궁에 주둔하고 있는 금의위의 숫자는 수천에서 많게는 일만 남짓.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군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나, 황도 전체와 그 인근의 병력을 모두 합친 숫자에 비하면 선녀나 다름없다.
‘중요한 건 황제에게 충성하는 초절정 고수들의 존재. 그리고 업데이트로 인한 시스템의 부재(不在).’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엄청난 패널티다.
시스템이 멈췄다는 것은 경험치 획득은 물론이고, 레벨 업을 통한 회복도 불가능하다는 뜻.
거기에 더해 예측하지 못한 공격 방식으로 언제나 쏠쏠하게 재미를 봤던 인벤토리마저 지금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림에서 마지막으로 로그아웃했을 때 백염(白炎)이라도 꺼내 놨었어야 했는데. 아니, 하다못해 화룡갑(火龍鉀)이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과감한 전투 방식은 레벨 업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나보다 높은 경지의 고수들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인벤토리의 성능과 신병이기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위험한 순간마다 내 목숨을 구해 주었던 시스템도, 신병이기도.
유일하게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옆집 누렁이도 먹다 뱉을 단환 한 꾸러미와 그 썩은 내 풍기는 단환이라도 꾸역꾸역 처먹어야 악화되지 않는 몸뚱어리뿐이다.
아, 물론 그 외에도 몇 개 더 있긴 하다.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어린 왕과 환관. 그리고 코골이가 심한 어느 시벌 놈.
‘끝내주는군.’
이쯤 되면 차라리 상산왕에게 천자 암살을 부탁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앞서가는 정호군을 불러세웠다.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촉법소년이라고 아나?”
“촉법, 뭐?”
“촉법소년.”
“그게 뭐지? 처음 들어보는데.”
“……아냐. 됐다.”
생각해보니 연좌죄로 줄줄이 엮여 죽어 나가는 마당에 촉법소년은 개뿔이.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상상을 떠올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황제. 비명을 듣고 사방에서 몰려온 금의위. 그리고 단검을 든 채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상산왕의 모습까지.
– 폐하! 폐하!
– 응. 형님 폐하 내가 죽였쥬?
– 상산왕 전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 금의위 아무고토 못 하쥬? 이제 내가 황제쥬?
– 폐하께서 시해되셨다! 지금 당장 역적 주표를 추포하라!
– 응. 나 아직 촉법소년~
“…….”
달콤하면서도 아쉬운 상상이긴 한데, 생각해 보니 이건 이것대로 심각할 것 같기도 하다.
촉법소년이라서 황제가 되다니.
만약 여기가 서구권 세계관이라면 잼민 1세 정도로 불리지 않았을까.
“진태경. 그대는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가?”
“아, 아닙니다.”
내가 의문을 표하는 상산왕에게 차마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둘러댄 그때였다.
우우우웅.
거칠게 떨리는 공기.
만근과도 같은 중압감과 함께 등장한, 서로를 쏙 빼닮은 두 중년인이 행렬을 막아섰다.
“멈춰라.”
“멈춰라.”
같은 얼굴, 같은 체격을 한 쌍둥이가 동시에 한 목소리로 말하는 광경은 언뜻 보면 퍽 우스웠으나 나는 웃지 않았다.
‘초절정 고수.’
확실하다. 이곳은 복마전(伏魔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