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74
#873화
같은 말이라도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황제가 내뱉은 말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부터는, 짐이 널 보살펴 주겠다.”
“……!”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상산왕은 엎드린 상태에서 번쩍 고개를 쳐들었고, 나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침음성을 참지 못했다.
“음.”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발치에 오체투지한 상산왕을 굽어보던 황제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진 것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할 말이라, 많지.
하지만 상대는 대륙의 지배자인 황제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최대한 예의 바른 어투로 대답했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폐하.”
“스스로 외람된다 생각하는 말이라면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좋겠지. 그 목이 계속해서 붙어 있길 바란다면 말이다.”
“……!”
“허나 좋다. 어디 한번 지껄여 보거라. 지난 십여 년간 짐의 인내심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권력자의 변덕은 종종 인내라는 단어로 포장되고는 한다.
바로 지금처럼.
‘아주 갖고 노는군.’
나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황제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모르게 악물어진 잇새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과연 저 광오한 황제의 인내는 어디까지일까.
만약 그가 정한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다면, 내가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들이 뇌리를 스쳤으나, 지금은 어떻게든 상산왕을 향해 뻗은 황제의 마수(魔手)를 쳐내야 할 때였다.
‘침착하자.’
작게 심호흡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의 뜻은 참으로 황송하지만, 상산왕 전하께서는 이미 충신들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고 계십니다. 아니, 더 이상 누구의 보살핌도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갑자기 예법이 늘었구나. 말에 뼈를 감추는 법은 아직 한참이나 미숙하지만.”
비웃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이 묻건대, 앞서 말했던 충신이 대관절 누구냐. 음흉하기 그지없는 환관? 아니면 대국의 법도를 무시하고 천하를 종횡하는 강호의 무뢰배?”
전자가 홍진이고 후자가 나라는 것쯤은 지나가는 똥개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동요하지 않고 길게 읍하며 대답했다.
“황공하오나 폐하께서 말씀처럼 저는 강호에 속한 몸입니다. 가문과 사문이라는 뿌리가 있지요.”
“내 아우의 신하가 아니라는 뜻이군. 그렇다면 무슨 자격으로 감히 짐의 앞에서 세 치 혓바닥을 놀리는 것인가?”
“비록 신하는 아니지만, 빈객(賓客)의 자격으로 상산왕 전하의 부름을 받았고, 또 폐하께서 허락하셨기에 이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점점 재미있어지는구나. 허나 축생(畜生)에게 의복을 입힌다 한들 사람이 될까. 어울리지도 않는 쓸데없는 허례허식에 짐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본론을 말하라. 짧고, 간단하게.”
짧고 간단하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하지만 지금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한 번 더 굽혀야 할 때. 나는 부드러운 융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일각(一刻)이면 충분하겠지.”
“예?”
“일각 동안은 네가 저지르는 무례를 용서할 테니 거리낌 없이 답하라. 이건 황명이다.”
됐다.
보험을 든 나는 그제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제를 바라보며 혀끝에서만 맴돌던 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라?”
“상산왕 전하는 폐하의 보살핌 없이도 이리 훌륭하게 장성하셨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
황제의 눈동자가 번뜩인 그 순간.
솨아아악!
보이지 않는 칼날 같은 살기가 사방에서 뻗어 나와 나를 휘감았다.
이미 한 차례 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 수십여 명의 친위대. 아니 살수들이 동시에 쏘아 보낸 살기였다.
비록 일신에 지닌 무위는 절정이지만 살수로서의 역량은 초절정에 달하는 실력자들.
만약 저들이 목숨을 걸고 평생 연마한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살초를 쏟아낸다면 나 역시 결코 무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려하던 일은 끝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나를 향해 쏟아질 검광(劍光)보다 앞서 올라간 황제의 손이 그들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스륵.
사방의 어둠이 일렁인다.
당장이라도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려 내 몸을 난자할 것 같던 살수들을 제지한 황제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짐의 보살핌이 필요 없다?”
“예.”
“상산왕이 아직 열둘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열둘밖에 되지 않은 그 아이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금의위 지휘사에게 호통을 쳤기 때문입니다.”
“……!”
“만약 그조차 누군가 시킨 일이라면 상산왕 전하께서는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가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전하께 그리하라 조언한 적이 없습니다.”
상산왕 스스로 결정했고, 당당하게 행했다.
그것이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인지, 혹은 환경에 의해 차츰 길러졌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곧 어른의 자격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나이만 먹은 성인들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열셋의 상산왕은 이미 홀로 입증해 보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도지휘동지 홍진도 폐하께서 그러시듯 전하를 어린아이 취급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적어도 제가 어릴 적에는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했거든요.”
“당연히 그랬겠지. 네놈은 황족도, 왕도 아니었으니.”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제가 우연히 알게 된 황족이 한 분 계신데, 장담컨대 그분보다 상산왕 전하께서 열 배는 더 어른스럽습니다.”
“황족? 주원공을 말하는 것이냐?”
“역시 아시는군요.”
살성에 관한 비밀도 알고 있는 황제다.
나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깊게 파고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몇 안 되는 황족 중 하나와 얽혀 있다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정보 축에도 들지 못한다.
대뜸 흘러나온 주원공의 이야기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것은 결국 나이가 아니라 신분과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 이 아이가 주원공처럼 방계황족에 불과했다면, 백연에게 그토록 큰소리를 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애초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논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도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황제가 작게 혀를 찼다.
“혓바닥이 제법 매끄럽구나.”
“제 성명절기(成名絕技) 중 하나입니다.”
“한데 과연 그 성명절기로 황명(皇命)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예?”
“짐이 이 자리에서 당장 황명으로 상산왕에게 주어진 산서성 임지를 철회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하여 내 곁에 둔다면 어찌하겠느냐?”
“……!”
개새끼가 말싸움 개같이 하네.
‘황명이 무슨 씨벌 원기옥도 아니고.’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쌍욕을 꾹 참은 내가 되물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상산왕 전하의 거취는 어찌 되시는 겁니까.”
어쩌면 선을 넘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강호의 무뢰배 따위가 감히 그걸 알아서 뭐 어쩌겠냐 윽박질러도 딱히 대꾸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러나 황제는 마치 어디까지 선을 넘는지 지켜보려는 심판처럼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황궁에 머무르며 훌륭한 스승 아래에서 학문을 수양하고, 척박한 산서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좋은 환경에서 충직한 궁인들의 섬김을 받겠지.”
“혹시, 그 안에 홍진도 포함이 됩니까?”
“짐은 분명 충직한 궁인들이라 했다. 그자와 같은 음흉한 환관이 아니라.”
황제의 말은 하나만 맞고, 나머지는 모조리 틀렸다.
황궁은 본래 상산왕이 있어야 할 곳이 맞으나, 그를 가르치는 스승이며 궁인들은 모조리 황제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뜻에 따라 상산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명령만 떨어진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지.’
설령 그 명령이 암살이라 하더라도.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황공하오나,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것이 순리(順理)니까.”
“순리?”
“형이 되어 하나뿐인 아우를 챙기겠다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그럴 리가요. 다만 조금 의문이긴 합니다.”
“무엇이 말이냐?”
“그 하나뿐인 아우를 십 년이 넘도록 보살피지 않으셨던 폐하께서, 왜 갑자기 뒤늦게 형 노릇을 하시려는지.”
차차차창!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살수들이 나를 빽빽하게 에워싼 것은.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의 새카만 복면 너머로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뜻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직 일각이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놈!”
“폐하께서 직접 약조하셨습니다. 일각 동안은 어떤 무례도 용서하시겠다고. 저는 황명에 따라 제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 요사스러운 주둥이 닥쳐라! 네놈이 감히……!”
서걱.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통증. 이미 앞서 한 번 목에 새겨진 것보다도 깊은 상처와 함께 핏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 그때였다.
“폐하!”
내내 석상처럼 굳어 있던 상산왕의 외침이었다.
살수들에게 둘러싸인 내 모습을 본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형님을 향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은 제 빈객이자 벗입니다! 저자를 살려 주시옵소서! 부디 그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쿵! 쿵! 쿠웅!
말릴 틈도 없었다. 오체투지한 채 스스로 지면에 이마를 부딪히는 어린 왕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그 광경을 오연히 굽어보던 황제는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만.”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멈췄다.
느리지만 조금씩 내 목줄기를 파고들던 한 자루의 단검도, 나를 살리기 위해 굴욕적으로 간청하던 상산왕의 움직임도.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아우를 향해, 황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자는 감히 짐을 능멸했다. 비록 앞서 약조를 했다 해도 이는 정해진 선을 한참이나 넘었어.”
“폐, 폐하…….”
“허나 짐이 직접 약조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 법. 황제라는 자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삼영(三影)?”
당장이라도 내 목을 베어 버릴 듯, 단검을 짓누르고 있던 삼영이라 불린 살수가 잠시 침묵했다.
“대답이 늦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짐은 분명 약조했다. 한데 그대는 명을 어기고 저자를 해하려 했지.”
“폐하. 그것은.”
“일영(一影). 행하라.”
서걱. 촤아악.
예리한 절삭음과 함께 힘이 실려 있던 단검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삼영의 목젖을 그어 버린 또 다른 복면인이 황제를 향해 부복했다.
“참(斬)했나이다.”
“……!”
“……!”
드넓은 처소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얼굴에 튄 삼영의 핏물을 닦아 낸 나는 가늘게 호흡하는 상산왕의 앞을 가로막았고, 이번에는 그 누구도 나를 막지 않았다.
아니, 막지 못했다.
그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쥔 주인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개새끼가.’
나는 화염이 쏟아지는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이번에는 조금 신중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약속한 일각은 이미 지났으니.”
“……!”
“더불어 마지막 기회를 주마.”
“기회, 말입니까?”
“그래, 기회. 짐이 듣자 하니 상산왕의 벗이라지?”
황제가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서로 마주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 마지막 인사나 나누거라. 그것이 짐의 마지막 아량이니.”
스륵.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조여 오는 살수들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 자리에서 상산왕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황제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