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77
#876화
홍진은 앞을 가로막은 황금빛 갑옷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언제나 여인의 그것처럼 높고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는 전에 들어본 적 없을 만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켜라.”
“불가(不可). 그대는 이곳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소.”
“비키라고 했다.”
“이보시오! 도지휘동지!”
“정말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네놈들 따위가 감히?”
“……!”
수십여 명의 금의위가 얼굴을 굳힌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눈앞의 환관이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십 년을 가지 못하고, 열흘 붉은 꽃이 없다지만 과거 선황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동창 첩형(貼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조정에는 아직 적지 않은 수의 노신(老臣)들이 남아 있었고, 홍진은 그들과 묵은 인연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함께 선황을 모셨던 신하로서의 우정인지, 동창을 쥐락펴락하던 실력자로서 잡아챈 약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그가 지닌 영향력을 쉽게 볼 수 없다는 것.
“황궁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었어도, 말단 금의위 위사쯤은 서신 몇 통이면 변방에 처박아 버릴 수 있다. 그러니 썩 꺼져. 앞으로도 그 번쩍이는 갑옷을 걸치고 싶다면.”
홍진의 두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일렁였다.
어린 주군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떠난 지 어언 두 시진.
동창 내에서도 냉철하기로 이름 높았던 환관의 인내심은 벌써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행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자꾸만 고개를 드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러 보지만, 그조차도 더 이상은 쉽지 않은 상황.
홍진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문 그때였다.
“다들 진정하십쇼, 진정.”
불쑥 들려온 넉살 좋은 목소리. 자연스럽게 홍진의 앞을 가로막은 혁무진이 금의위들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시오. 너무 늦어지니까 걱정이 돼서 그래.”
“이보세요. 혁 무인!”
“아이고, 홍 동지님도 고정하세요. 저 사람들이 무슨 죕니까?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야 까라면 까고, 짖으라면 짖는 것뿐인데. 안 그래요?”
편을 들어 주는 건지, 면전에 대고 개새끼라고 하는 건지 당최 헷갈리게 만드는 말에 금의위들이 눈살을 찌푸리던 그때. 혁무진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확인 좀 해 줘요. 가뜩이나 피곤한 마당에 빡빡하게 굴면 피차 재미없잖아. 안 그래?”
“잠깐. 그건…….”
“아, 확인해 준다고? 이야! 역시 금의위! 대국의 자존심! 황실의 수호자들! 거 존나게 고맙소! 나중에 시간 나면 황도 중심가에 있는 혁가 포목점에 한 번 들러요. 내 이름 대면 좀 싸게 살 수 있을 거야.”
뭐라 대꾸할 틈도 없었다. 금의위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후다닥 돌아선 혁무진은 홍진을 붙잡고 물러났다.
한껏 숨죽인 속삭임과 함께.
“지금 쟤들 건드려 봐야 좋을 것 없습니다. 알 만큼 아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평정심을 좀 되찾으세요.”
그 한마디로 마음속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홍진이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깨닫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혁무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직 조정에 남아 있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몇몇 권력자들을 움직여 봤자, 기껏해야 사냥개 몇 마리 내치는 것뿐.
몸통이나 머리는 건드려 보지도 못할 테고, 사냥개들의 목줄을 쥔 주인까지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지금은 발톱을 숨기고, 이빨을 감춰야 할 때였다.
물론 차갑게 식은 머리와 달리 가슴은 여전히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혁 무인은 걱정도 안 되나요?”
불현듯 흘러나온 홍진의 물음에, 혁무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뭘 말입니까?”
“당신이 상산왕 전하께 별다른 충성심이 없다는 것쯤은 알아요. 무림인의 생리가 그러하니 그것에 대해 비난할 생각도 없고요. 하지만…….”
“아, 함께 가신 조장님이 어찌 되셨는지 걱정도 안 되냐. 뭐 그런 말씀이십니까?”
홍진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혁무진이 즉각 대답했다.
“걱정이야 당연히 하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태평해요?”
“이게 최선이니까요.”
“네?”
“제가 지금까지 조장님 뒤꽁무니 따라다니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었는데…… 조장님께서 직접 움직여서 해결 안 된 일은 없습니다.”
“……!”
“일이 얼마나 더럽게 꼬이든 간에, 마지막 결과만 보면 결국 조장님이 싹 다 쓸어 버렸어요. 앞에서 고수입네, 내가 흑막입네, 하고 깐죽거리던 새끼들은 싹 다 염라대왕이랑 면접 보러 갔고요.”
눈을 부릅뜬 홍진을 바라보며, 혁무진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딱 까놓고 말해서, 저는 지금까지 조장님만큼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강해요.”
“혁 무인, 미안하지만 이것만큼은 냉정하게 말할게요. 황궁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괴물이나 다름없어요. 진 공자가 제아무리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전 무공만을 말한 게 아닌데요.”
“……?”
“무공이 아니라 사람. 그냥 사람 자체가 강합니다. 조장님은 그런 사람이에요.”
“……!”
“설령 황궁에 한 수, 두 수 위의 고수들이 득실거려도 조장님은 못 당합니다. 이게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거긴 한데, 제가 아는 조장님은 지금까지 늘 그랬어요.”
“……그게 말이 되나요?”
“원래는 안 되는데,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홍 동지께서도 우리 조장님께 상산왕 전하를 부탁한 거 아닙니까?”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홍진은 불현듯 깨달았다.
처음 마삼보에게서 금의위가 움직였다는 밀서를 받았을 때. 어째서 진태경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지.
서로 간의 신뢰?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신뢰만을 따졌더라면 화산파의 속가제자이자 산서성 도지휘첨사인 이풍을 데려왔을 것이다.
홍진 자신과는 잠시나마 대립각을 세우긴 했어도, 벌써 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는 상산왕을 향해 변함없는 충성심을 바쳐 온 그였으니.
그런 이풍에 비하면 진태경과의 관계는…… 상호 간의 신뢰라 칭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감이 있다.
그의 가문인 태원진가와 제법 끈끈한 사업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데 왜?
왜 자신은 진태경을 청했을까. 이미 입증된 충신, 혹은 또 다른 무림의 고수를 초빙할 수 있었음에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홍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혁 무인 말이 맞아요. 내가 멍청하게도 잠시 잊고 있었어. 감정적으로 흐트러진 탓이겠지.”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함을 되찾은 홍진의 모습에, 혁무진이 씩 웃어 보였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죠.”
“진 공자는…… 그래, 확실히 불가사의한 사람이야. 내가 전해 들은 이야기만 해도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 물론 그중에서도 힘들게 입수한 어떤 정보들은 헛소문이 분명하겠지만.”
“헛소문이요? 그 정보가 어떤 겁니까?”
“아, 그거?”
홍진이 피식 웃기까지 하며 대답했다.
“들으면 혁 무인도 배꼽을 잡고 웃을걸. 글쎄 진 공자가 동정호에서 용을 잡았다는 헛소리를 늘어놓더라고.”
“확실히 헛소문이네요. 용이라기보단 이무기였는데.”
“역시 그렇지? 천금(千金)이나 주고 구한 정보였는데, 어디서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웃으며 말을 잇던 홍진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숨 막히는 침묵 끝에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지금, 뭐라고?”
“예? 뭐가 말입니까?”
“아니 방금, 방금 전에 용이 아니라…….”
“아. 이무기요. 그거 맞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처음엔 단순히 꿈을 꾸나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뭐 그래도 하늘을 날아다니지는 않았으니 용이 아니라 이무기였던 건 확실합니다.”
“……?”
“그런데 그 정보, 어떤 호로새끼가 넘긴 겁니까? 정말 극비리에 조용히 처리된 일일 텐데.”
“……!”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충격 속에서, 홍진은 깨달았다.
앞서 혁무진이 했던 모든 말들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는 것을.
진태경을 선택한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는 사실을.
‘이무기? 이무기를 잡아? 사람이 이무기를? 아니, 이무기가 실제로 있었단 말인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이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어린 왕에 대한 걱정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린 홍진에게, 한참 동안 호사가를 욕하던 혁무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그때였다.
“저기, 혹시 천금 한 번 더 쓰실 용의 있으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남만에 갔다가 말하는 호랑이를 봤는데…….”
“비켜!”
공력이 실린,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로 터져 나온 외침.
번개처럼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홍진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고, 은밀한 거래를 시도하던 혁무진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조장님이 보우하사, 태원진가 만세!”
“저 왔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어서 안으로…… 혁무진 이 새끼 뭐야. 얘 도대체 왜 이래요?”
말하는 호랑이에 대해 알려 주려던 홍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전하께서는 어디에…….’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어린 왕. 대국의 마지막 희망이.
몇 번이나 소매로 눈을 문질러도 이곳을 향해 돌아오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열화신룡 진태경.
‘기어이.’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저 잔혹한 황제의 마수(魔手)가 마침내 자신의 주군에게까지 닿았다.
그러나 홍진은 눈앞이 희뿌옇게 물드는 것을 애써 참아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명 저 젊은 무림인은 무언가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홍진의 바람에 답하듯, 철탑처럼 버티고 선 금의위들을 어깨빵으로 반쯤 날려 버리다시피 한 진태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 전각으로 들어가세요. 지금 당장!
물론 그 짧은 틈을 타, 하나뿐인 충복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사히 다녀오셨…….”
빡!
“억!”
“그래, 잘 다녀왔다. 이 새끼야.”
* * *
전각으로 복귀한 나는 공력으로 든든하게 방음 시스템을 갖춘 뒤,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최대한 간략하게, 핵심만 담아서.
첫째. 황제가 상산왕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건청궁에 가둠.
둘째. 황제 새끼 노양심. 별주부전 토끼가 간 빼놓고 다녔던 것처럼 양심이라는 걸 다른 곳에 숨겨 놓고 사는 것 같음. 아, 초절정 고수고 엄청 겉늙었음.
셋째. 몇 달 전 황제가 사천성주에게 빼앗은 애첩이 건청궁에 있는 것 같음.
그렇게 눈깔과 마우스 스크롤을 장식쯤으로 여기는 21세기 요약충들도 합격을 외칠 만한 성공적인 썰풀기가 끝난 직후. 시시각각 표정이 뒤바뀌던 홍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만이 남아 있었다.
“사천성주의 애첩이…… 건청궁에 머무르고 있단 말입니까?”
“예. 거의 확실합니다. 그런데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꼭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크게 심호흡한 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보통 황후나 후궁들이, 건청궁에 머무르는 게 일반적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황제가 아끼는 후궁이라고 해도?”
“전혀요. 황실의 법도는 지엄합니다.”
“그렇다면…….”
“맞아요. 그것뿐이네요.”
나와 홍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동시에 입술이 열렸다.
“임신.”
“회임(懷妊).”
시발.
아무래도 황제는, 상산왕을 대신할 대국의 새로운 후계자를 찾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