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78
#877화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명색이 황족씩이나 되는 인간들이 옆집 춘식이네도 아닌데 건청궁에 모여 다 함께 오순도순 사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직접 탐방하고 온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곳은 황제가 먹고 자는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요새나 미궁에 가까웠다.
부산의 연산 로터리마냥 이리저리 뒤얽힌 길을 지나다가 미노타우로스를 마주쳐도 딱히 놀랍지 않은 그런 느낌.
그뿐인가.
중국 바퀴벌레 같은 살수들이 사방에 득실거리고, 혹시 모를 불청객을 대비한 기관진식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 정도면 어느 영국 마법 학교의 지하 감옥 기숙사가 5성급 호텔로 보이는 수준.
그러나 황제가 단순히 미친놈이라서 이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철통같은 보안.
어떤 암살자도 뚫지 못할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믿을 만한 충복들로 건청궁을 채운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지금까지 훌륭하게 유지되어 왔다.
바로 오늘, 무림에서 굴러먹다 온 웬 젊은 무뢰배가 애향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어쩌면 황제가 숨기고자 했던 가장 비밀 중 하나를 짐작해 내기 전까지는.
‘임신이라니.’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홍진과 혁무진의 표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회임……이요? 그게 진짭니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요.”
넋 나간 목소리로 물어오는 혁무진을 향해 대답한 홍진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면 가장 좋겠지만.”
나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붙이 간의 정이고 나발이고, 일가친척의 피로 반신욕을 하다시피 하며 권좌를 탈취한 황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이 탄생한다면, 머지않아 상산왕에게 닥칠 상황은 뻔했다.
참초제근(慘草除根).
강보에 싸여 쫓기듯 황궁을 떠나야 했던 어린아이는 이제 어엿한 소년이 되었고, 한 뿌리에서 난 거목(巨木)의 씨앗은 싹이 되어 잘 영글었다.
의심 많은 황제가 상산왕을 제거할 이유는 그것으로도 차고 넘친다.
‘후계 정리.’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듯이, 천자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황제는 조정과 백성의 불만을 억제하며 군림하고 있으나 폭군이자 반역자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처럼 새로운 후계자에게 이어질 것이다.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그리고 황제에 대한 반발심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권력자들은 그 상황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당장 연판장(連判狀)이라는 이름의 롤링페이퍼를 작성한 이들에게는 상산왕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었으니까.
‘바로 그 상산왕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황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일 테고.’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전각 안의 공기는 무겁고 냉랭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홍진이 불쑥 입을 연 것은 한참이나 침묵이 흐르던 그때였다.
“어떻게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던 거죠?”
“무슨 뜻입니까?”
“저야 황궁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지만, 진 공자께서는 단순히 그 애향이라는 여인이 건청궁에 머무른다는 사실만으로는 쉽게 추측할 수 없었을 텐데.”
잠시 그때 상황을 떠올린 내가 대답했다.
“단순히 소리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가 더 있었죠.”
“그게 뭔가요?”
“냄새.”
“냄새?”
“예. 희미하지만 분명한 약재 냄새를 맡았습니다. 정확히는 탕약이요.”
“탕약이라…….”
“솔직히 제 주위에 그 방면으로 잘나가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약재를 썼고 탕약의 재료가 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해 보니 대강의 답이 나오더라고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탕약이란 게 결국 병자나 보신(補腎)이 필요할 때 쓰이는 건데,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가 애향에게 탕약을 먹이는 이유가 뭘까. 단순히 아프니까 걱정이 돼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주어진 모든 상황과 단서를 짜 맞추면 밑그림이 그려진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내가 파악한 황제는 사랑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건청궁은 그만큼 특수한 곳이었으니까.
“저로서도 설마 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돌아온 거였고요.”
홍진이 침음성을 흘렸다.
“진 공자는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냉정하게?”
“네. 냉정하게.”
“최소 구 할 이상.”
“……!”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모든 게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요.”
빌어먹을 현실이지만 인정할 건 해야 한다.
십 년이 넘도록 수수방관하던 황제가 갑작스럽게 상산왕을 황도로 부른 이유. 반강제에 가깝게 건청궁에 묶어 둔 이유.
그리고…… 상산왕을 해할 만한 이유.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이 저 하나로 해결된다.
‘새로운 후계자.’
홍진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전날 밤 찾아온 마삼보조차 이런 중요한 정보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은, 황제가 동창의 눈조차 속이며 애향의 상태를 철저히 함구해 왔다는 뜻.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동창 내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이었던 홍진이 모를 리 없었다.
짐작이라 쓰고 확신이라 읽을 뿐.
애향의 배 속에 황제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부정하고 싶은 거지.’
마음속으로 뇌까린 나는 조용히 홍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됩니까?”
홍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든지.”
“황제는 왜 진작 상산왕 전하를. 어. 그러니까…….”
“제거하지 않았느냐고요?”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홍진이 말을 이었다.
“황제의 속마음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요. 아직 젖도 다 떼지 못했던 어린 황자마저 해친다면 그 후폭풍이 두려웠겠죠.”
“그러기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숙청은 하루아침에 끝난 게 아니에요. 특히 황족들은.”
“더 자세히.”
“사 황자의 반란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직후, 선황 폐하를 비롯한 직계 황족들은 유폐되어 철저한 감시를 받았죠. 그리고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차례차례 숨을 거두었고. 참 희한하지 않아?”
목소리는 담담하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마저 숨길 수는 없다.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곰방대를 꺼낸 홍진이 불을 붙였다.
후우.
깊은 심호흡과 함께 뿜어지는 희끄무레한 연기.
나는 문득 어디선가 맡아 본 냄새라고 생각하며,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동창의 역량을 총동원해 선황 폐하를 비롯한 황족들을 구출하려고 했지만, 모두 보기 좋게 실패했어요. 나는 이미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었고, 당장 내일 형옥(刑獄)에 갇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진 않았고요.”
“맞아요. 묵은 인연 때문인지, 혹은 단순한 변덕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 황자는 나를 살려 뒀지.”
“묵은 인연?”
“내가 황궁에 몸담은 세월만 수십 년이에요. 선황 폐하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만큼 사 황자와도 적지 않게 마주쳤지. 여러모로 뛰어나고 명석한 소년이었어요. 적어도 그때에는.”
희뿌옇게 천장 위로 솟구치는 연기를 바라보는 홍진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살아남았고, 선황 폐하께서 붕어하시기 직전에야 그분을 알현할 수 있게 됐어요. 마치 광증(狂症)에 걸린 사람처럼 정신이 혼미하신 와중에도 내게 상산왕 전하를 부탁하셨지.”
“잠깐, 광증이요?”
“응. 그런데 그게 왜…… 아.”
내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린 홍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설마?”
“가능성은 있습니다. 정확히 증상이 어땠습니까?”
“일각도 되지 않을 만큼 짧아서 뭐라 말하기 힘들어요. 그 나이에 후사(後嗣)를 보셨을 만큼 정정하셨던 건 사실이지만 이미 연로하셨고.”
“압니다. 역모에 유폐까지 겹쳤으니 충격이 크셨겠죠. 하지만 최대한 본 것 그대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사천성주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
마른침을 삼키며 듣고 있던 혁무진이 눈을 부릅떴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천(暗天)이라는 두 글자와 함께, 불과 보름 전쯤 보았던 그 저주받은 생물을 떠올리며.
‘혈혼고(血魂蠱).’
사천 땅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조차 흔적을 찾지 못했던 독물.
전무하다시피 할 만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숙주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것은 수백여 년 전 남만의 오독문에서 탄생했고, 이제는 산 사람이 아니게 된 사천성주의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천성주는 몇 달 전 황도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지.’
이게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은 홍진의 표정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성이 얼마나 되리라 보십니까?”
침묵하던 홍진이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일 할. 아니, 이 할.”
“당시에 유폐되었던 다른 황족분들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압니까?”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잊혔고.”
“그렇다면…….”
“늦어도 오늘 밤 마 태감에게 연락을 취할 생각이에요. 전하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지도 몰라요.”
맞다.
정말 몇 달 전 사천성주에게, 십여 년 전 선황에게 혈혼고를 심은 것이 황제라면. 혹은 그와 손잡은 암천이라면 상산왕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제가 따로 지니고 있던 귀물(貴物)을 전하께 맡겼으니 당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만독지환.
비록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화왕 적천강이라는 거인마저 쓰러트린 무형지독을 해독한 사천당문의 신물(神物).
혈혼고도 결국은 오독문의 손을 거쳐 탄생한 독물인 만큼, 만독지환의 효능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개인적으로 마 태감께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뒤이어 이어진 내 말에, 홍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 * *
절강성, 그중에서도 항주(杭州)는 황실이 이전해 오기 전부터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향락의 도시였다.
수많은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경치. 운하를 따라 막대한 자원과 재물이 오가고, 깊은 밤에도 환하게 밝혀진 거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말 그대로 불야성(不夜城).
그리고 온갖 점포들이 자리 잡은 이 황도의 대로변에서, 밤늦게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손님을 대하는 종업원의 태도는 조금 이상했지만.
“어디 한 번 둘러보쇼. 마음에 들면 그때 물어보시고.”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 퉁명스러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중년의 종업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님이 입술을 달싹인 것은 그때였다.
– 열화신룡(烈火神龍)의 전언을 가져왔소.
“……!”
혁가포목점이라 적힌 현판 아래, 중년의 종업원. 아니 화왕 적천강은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