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79
#878화
귓가를 파고든 전음(傳音)을 들은 직후, 적천강이 보인 움직임은 실로 기민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아, 최상급의 촉금(蜀錦)을 찾는다고? 그럼 진작 말씀하셨어야지. 안으로 들어오쇼.”
“아니, 잠깐만. 나는 그저…….”
손님으로 위장한 사내는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손목으로부터 전해지는 적천강의 무시무시한 기운에 입을 딱 벌렸다.
“흡.”
전신이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
본능적으로 공력을 일으켜 손목을 보호해 봐도 소용없었다.
아니, 불길이 쏟아지는 적천강의 눈동자를 본 순간 일말의 의지마저 잿더미처럼 허물어졌다.
‘뭔 놈의 눈빛이…….’
이건 사람이 아니다. 타고난 맹수요, 포식자다.
사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뻣뻣하게 굳은 채 포목점 깊숙한 곳으로 끌려갔다.
사방에 산더미처럼 쌓인 면포(綿布)와 비단 사이, 보이지 않던 으슥한 곳에서 두 개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저벅.
등잔의 흐릿한 불빛 너머로 이립 언저리로 보이는 두 청년의 얼굴이 드러난다.
하나는 모래라도 씹은 것처럼 표정이 무미건조했고, 다른 하나는 잘생겼으나 간교해 보일 만큼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유일한 흠이었다.
각각의 특징상 여러모로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영 좋지 않은 인상들.
그중 유난히 삭막한 인상의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투로.
“어이, 적 씨. 무슨 일이야?”
적천강이 대답했다.
“어이, 적 씨? 피똥 싸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아, 지금은 아닙니까?”
“척 보면 모르겠느냐. 그 눈치로 낭인 생활은 어찌했누.”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삭막한 인상의 청년, 송일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손님.”
짤막하게 대꾸한 적천강이 덧붙였다.
“한데 전음을 쓰더군. 열로 시작해서 용으로 끝나는 별호를 대면서.”
송일섬이 즉각 대답했다.
“오늘 장사는 이만 접겠습니다.”
“문단속 잘해라. 아, 그전에 가게 주변 한 바퀴 돌아보고 수상한 놈 있으면 그 새끼도 잡아서 끌고 와.”
“예. 그런데 만약 불가피한 경우라면…….”
“뭘 물어보고 자빠졌느냐. 그런 상황에는 일단 멱부터 따고 봐야지.”
“알겠습니다.”
“대신 뒤처리는 깔끔하게 하거라. 눈에 안 띄게.”
“염려 마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송일섬은 곧장 자리를 떴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는 오금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가 포목점인가, 아니면 도살장인가.
‘설마…… 살수 집단?’
자신이 받은 지시 중 이런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내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가던 그때, 아직 자리에 남아 있던 또 다른 청년이 입을 열었다.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나머지 불러와라.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싹 다.”
“지금 당장 모두를 불러오는 건 어렵습니다. 한 명은 지금 밖에 있어서요.”
“염병할, 어떤 호로새끼가 그새를 못 참고 싸돌아다닌단 말이냐?”
“그게, 주 소저입니다.”
“잠시 나갈 수도 있지. 음. 그렇고말고. 주위 상황을 알아보려고 나간 것 같은데 참으로 기특하군.”
“…….”
“눈깔 그렇게 뜨지 말고 다른 식충이들이나 불러와라.”
“예.”
“마.”
“예?”
막 돌아서려는 청년을 불러세운 적천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깔 그렇게 뜨지 말랬지. 노부의 말이 개좆으로 들리느냐?”
“이건 어릴 때부터 눈매가 이래서 어쩔 수 없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훗날 기회가 있으면 다시 태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환생도 하지. 눈깔도 착하게 뜰 수 있고.”
“예…….”
눈꼬리가 높아 슬픈 청년, 사마표가 힘없는 대답과 함께 자리를 뜨자 적천강이 불현듯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스윽.
형체 없이 뻗어 나가는 기운에 주위의 대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공에 둥둥 뜬 채 날아온 나무 궤짝을 바라보는 사내의 동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사내 역시 나름 비범한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지라 난생처음 보는 기예(技藝)는 아니었지만, 저만한 무게의 궤짝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내가고수도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한데 눈앞의 중년인은 그걸 너무나도 간단히 해냈다.
그것도 대충 내지른 손짓 한 번으로.
‘설마?’
문득 짚이는 부분이 있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 그대의 별호가 화왕(火王)이오?”
적천강은 대답 대신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보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섬광처럼 사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빡!
“어흑!”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노무 새끼가 혀가 반 토막이 났나. 뭐? 그대?”
“자, 잠깐! 잠깐! 내 얘기를 들어보시오! 나는……!”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움직이면 더 다친다.”
뻑! 뻑! 뻐억!
팔에 멍이 들도록 익혔던 금나수(禁拿囚)도, 다리의 근육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밟았던 보법도 지금만큼은 무소용이었다.
정강이에 이어 복부, 가슴, 마지막으로 콧잔등을 얻어맞은 사내는 그 자리에서 실 끊어진 연처럼 쓰러졌다.
털썩.
물론, 그대로 기절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지만.
“기상.”
벌떡.
쓰러질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일어난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화왕 적천강 대협이십니까.”
공손하기 그지없는 어투.
어느새 허공섭물로 끌어당긴 궤짝에 턱 걸터앉은 적천강이, 힘든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외과 의사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린 혓바닥이 이제야 제자리에 붙었군. 오냐, 노부가 적천강이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소인은…….”
“네깟놈 이름은 알 것 없으니 소속만 말하거라. 대충 보아하니 불알 없는 환관인 건 알겠다만.”
“……!”
“왜, 그게 그리 큰 비밀이었느냐?”
순간 할 말을 잃은 사내. 아니 환관의 모습에, 적천강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제법 그럴싸하게 꾸민 건 인정하마. 인피면구에 수염까지 본래 제 것인 양 자연스럽고.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노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렇다면 어떻게…….”
“앞서 네놈의 완맥을 짚어 보니 사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양기(陽氣)가 턱없이 부족하더군. 자, 그럼 황궁 앞마당에서 불알 없는 무림인을 만나는 것과 환관을 만나는 것 중 무엇이 더 가능성이 높은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사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적천강의 날카로운 판단도 판단이지만, 자신이 환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변함없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럼 소인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아시겠군요.”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멀쩡한 사내놈들 불알 뜯어내는 악취미를 가진 곳은 세상천지에 황궁밖에 없으니.”
“…….”
“그만 주절대고 노부가 물어본 것에나 대답해라. 정확히 황궁 어디에 속한 몸이지? 상산왕의 오른팔이라는 그 환관 밑에 있는 놈인가? 아니면 동창? 그것도 아니면 황제 뒷구멍이나 핥는…….”
“동창입니다.”
“동창이라, 천하에서 가장 끈질기고 독한 고자들만 모아놨다는 그곳이군. 한데 어째서 동창의 환관이 이곳까지 찾아왔느냐?”
“열화신룡이, 아니 제자분께서 몇 가지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황제가 덫을 놓는 것은 아니고?”
“절대 아닙니다. 이곳에 머무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도 제자분이시고요.”
“그럴듯하군. 하지만 동창의 정보력이라면 어떻게든 알아냈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지. 어찌 증명할 테냐?”
가늘어지는 적천강의 눈매에, 환관이 황급히 대답했다.
“모, 몽수타(夢殊打).”
“뭐라?”
“제자분께서 알려 주신 겁니다. 소인도 당최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리 전하면 적어도 피똥 쌀 일은 없을 거라고…….”
환관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으나, 다행히도 적천강은 그 어눌한 발음의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몬스터.
선계(仙界)를 피로 물들였다는 저세상의 괴물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는 이는 천하에 오직 진태경과 자신. 단 두 사람뿐이었다.
“흠. 녀석이 보낸 것이 확실하군.”
“그, 그렇습니다.”
“진즉 말했다면 굳이 때리진 않았을 텐데. 노부의 무례를 용서하게. 고자 양반.”
환관은 고자에게 고자라고 하는 것만큼 무례한 언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괜히 입방정을 떨었다가는 정말 피똥을 싸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저 촌각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유일한 상책(上策)이었다.
슥.
품 깊숙이 숨겨 놓은 자그마한 통을 꺼내 건네자, 적천강의 눈이 깊어졌다.
“진태경. 그 녀석이 노부에게 전하라고 한 서신인가?”
“예.”
“그럼 다른 하나는?”
적천강의 말대로 단단히 밀봉된 통은 총 두 개였다. 환관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전하라 명하신 서신입니다.”
“모시는 분?”
“산서성 도지휘동지 대감을 아시는 것 같습니다만.”
“홍진? 본 적은 없지만 오는 길에 들었지. 제법 착한 고자라던데.”
“……예. 제가 모시는 분께서 그분과 긴밀한 사이입니다. 이 안의 내용이 앞으로 하실 일에 도움이 될 거라 하셨습니다.”
“이게 전부인가? 더 말해 줄 건 없고?”
“그렇습니다. 소인은 단지 심부름꾼에 불과한지라.”
환관에게 주어진 임무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보법까지 펼쳐 가며 황급히 이 넓은 도살장, 아니 포목점을 빠져나갔고 홀로 남은 적천강은 밀봉된 통을 뜯어 돌돌 말린 전서(傳書) 두 장을 꺼냈다.
스륵.
퀴퀴한 포목점 내부의 공기 사이로 기름 먹인 종이 냄새가 섞여든다.
‘아무래도 조진 것 같습니다.’라는 명문(名文)으로 시작되는 진태경의 서신에 이어, 동창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정보를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적천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 한번 더럽게 꼬였군.”
그리고 그 순간.
화륵.
삼매진화(三昧眞火)로 말미암은 불꽃이 두 장의 전서를 집어삼키며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다.
적천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재가 되어 파스스 사라지는 전서를 말없이 응시하던 그때.
“모두 데려왔습니다.”
촌각 전 자리를 떴던 사마표가 익숙한 얼굴들과 함께 다가오다 말고 멈칫했다.
“그자는 어디 있습니까?”
“조금 전에 돌려보냈다. 다행히 수상쩍은 놈은 아니더군.”
“누구였는지 알아내셨습니까?”
“고자였다. 태경이 녀석이 보낸.”
“……예?”
간추려도 너무 간추린 설명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마표를 깔끔하게 무시한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저 치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기에 이리 늦었느냐?”
흐아암.
아직 졸린 눈으로 하품하는 태산의 옆구리를 쿡 찌른 사마표가 머뭇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구석에 짱박혀서 처자고 있었군.”
“잠시 졸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영원히 잠들게 될 거라고 전해라.”
“예.”
“남호는?”
헝클어진 복장으로 씨근덕거리고 있는 노인, 남호를 힐끗 바라본 사마표가 대답했다.
“태산이의 목을 조르고 있었습니다.”
“왜?”
“남 노인이 숨겨 두었던 술을 태산이가 모조리 먹었다는군요.”
아주 잠깐 동안 태산과 남호의 목을 동시에 조르는 달콤한 상상을 떠올린 적천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랄들 떨지 말고, 다들 준비해.”
“실례지만 어떤 것을…….”
“조만간 황궁으로 간다.”
“예? 어떻게 말입니까?”
적천강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걱정 말거라. 정식으로 초대받아서 가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