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8
#87화
“엣취!”
후두두둑!
라면과 밥알을 뒤집어쓴 진호 형이 침착하게 물티슈로 얼굴을 문질렀다.
“마음에 안 들면 말로 해, 말로.”
“그런 거 아냐. 갑자기 막 튀어나왔어.”
“변명하지 마. 더 추해 보인다.”
진짠데. 나는 대답 대신 코를 슥 문질렀다.
어떤 놈이 내 욕이라도 하고 있나?
‘생각해 보니까 그럴 만한 놈이 하나 있긴 한데.’
임창수 그 녀석이라면 범행 동기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래도 뭐, 내게 40억을 선물한 산타클로스니까 욕 몇 번 정도는 기쁘게 먹을 수 있다.
‘혹시나 했는데, 의외로 약속은 지키는 놈이었어.’
나는 아침에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스마트폰에 깔아 둔 은행 어플 알림은 입, 출금 내역을 빠짐없이 알려 준다.
[진태경님의 110-***-*** 계좌에 4,00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다면 그걸 처음 발견한 게 진호 형이라는 거다. 샤워하겠다고 스마트폰을 방에 놓고 간 게 실수다.
“넌 돈도 많은 놈이 라면이 뭐냐, 라면이?”
“거 되게 말 많네. 소고기 넣어 줬잖아. 소고기라면 싫어?”
“인마, 지금 그 뜻이 아니잖아.”
탕! 진호 형이 거칠게 수저를 내려놨다.
물론 한마디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배가 불러서다.
“통장에 40억이 있는데 왜 고시원에서 라면을 먹고 있냐 이거지. 내 말은.”
“뭔 상관이야. 내 맘이지.”
“……그렇긴 한데.”
“그리고 돈 들어온 지 한 시간밖에 안 됐거든? 나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니까 조용히 해 봐.”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까부터 멍하다. 일개미처럼 독하게 돈을 벌어 왔지만 쓰는 곳은 항상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던 중 거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다.
40억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돈이다. 많은 생각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뭔 놈의 고민이 그렇게 많아? 돈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거 아냐.”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라…….
‘그거라면 하나 있지.’
후루룩. 마지막 면발을 빨아들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 진호 형에게 한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
“별말씀을.”
“냄비 설거지 잊지 말고. 간다.”
“야, 야!”
* * *
“어?”
현관문 앞, 하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네. 인터폰 화면 보고 설마 했는데.”
“……진짜가 아니면 뭔데.”
“음. 그래픽?”
“그게 오랜만에 만난 오빠한테 할 소리냐?”
“무슨 소리래. 그저께도 와 놓고.”
아, 맞다. 현실 시간으로는 얼마 안 됐지.
워낙 시간 차가 크다 보니 나도 종종 헷갈린다.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공부.”
“그러고 보니까 학교는? 평일이잖아.”
하연이가 코맹맹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이 39도래. 2교시까지 버티다가 조퇴했어. 어차피 내일부터 여름 방학이라 얼마 전부터는 계속 자습이고.”
“너 이제 방학이냐? 아니, 그 전에 조퇴했는데 공부를 해?
어째 절정 고수보다 얘가 더 대단해 보인다. 난 이상하게 학교에서 엄청 아파도 조퇴하고 집에 오면 아픈 게 싹 낫던데.
열이 39도나 되는 이 상황에서도 공부라니, DNA가 다른가?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
학생주임 같은 하연이의 말을 뒤로하고 거실로 들어섰다. 집에서는 우리 둘을 제외하곤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는?”
“은행.”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네.”
“진짠데?”
“엄마가 그러라고 시켰어?”
“응? 뭘?”
누굴 닮았는지 연기가 천연덕스럽다. 만약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현관을 향해 되돌아가는 나를 하연이가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
“엄마 찾으러.”
“여기 은행이 한두 개야? 밥 차려 줄 테니까 먹고 있어. 잠시 후면 오실 테니까.”
“괜찮아. 은행 가는 거 아니니까.”
“뭐?”
“마트 앞 사거리 식당. 맞지?”
하연이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알고 있었어?”
“응. 한참 전부터.”
“엄마가 부탁했어. 비밀로 해 달라고.”
“그것도 알고.”
“오빠, 안 가면 안 돼?”
하연이의 오랜 습관이다. 중요한 부탁에는 꼭 앞에 오빠를 붙이는 것.
“다녀올게.”
나는 하연이의 머리를 헤집어 주고 현관문을 나섰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만히 손에 남아 있는 녀석의 온기를 생각했다. 이마가 펄펄 끓는 와중에도 녀석이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도.
* * *
주민등록증에 적힌 이름은 하나지만 살면서 불리는 이름은 여러 개다. 올해로 꼭 쉰이 된 김정희도 마찬가지였다.
“아줌마, 여기 삼겹살 2인분 추가요.”
“네, 잠시만요.”
요즘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은 ‘아줌마’다. 그전에는 ‘하연 엄마’. 또 그전에는 ‘태경 엄마’였다. 아이들이 다 크고 일이 바빠지자 들을 수 없게 된 이름들.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불러 주었던 한 사람은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정희 씨.’
스물둘에 만난 그는 다정다감했다. 혼란스러웠던 대격변 시기, 대피소에서 만난 두 남녀는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정희야.’
가끔은 다른 사람 앞에서 이름을 불리는 게 부끄러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당신은 내 이름만 불러요? 다른 집 남편들은 누구 엄마. 여보. 마누라.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그래서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우리 나이도 먹었잖아요.’
‘나이가 뭐가 중요해. 나는 태경 엄마보다 정희를 더 사랑해서 그렇게 부르는 건데.’
‘애들 앞에서 왜 이래요.’
‘어? 엄마 볼 빨개졌다. 엄마 아빠 아침에도 레슬링 해? 맨날 밤에 하던데.’
‘……태경이 오늘부터 일찍 자라.’
이별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시내 한복판에 열린 게이트로 두 아이는 아버지를 잃었고 그녀는 남편을 잃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던 한 사람을.
“아줌마!”
김정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파마머리에 화려한 귀걸이를 한 중년 여성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네. 사장님.”
“뭐 하느라 사람이 부르는 소리도 못 들어?”
“죄송합니다.”
“불판은? 설거지 끝났어?”
“저어, 그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손이 멈춰 있었다. 싱크대를 확인한 사장이 눈을 치켜떴다.
“아줌마, 일 이따위로 할 거야?”
“…….”
“참 나. 이럴 거면 내가 직접 하지, 뭣 하러 비싼 돈 줘 가면서 아줌마를 고용했겠어? 안 그래?”
김정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주방의 다른 직원들은 사장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할 일을 계속했다.
‘비싼 돈은 무슨. 가장 바쁜 시간에 최저 시급으로 부려 먹으면서.’
‘나이 먹었으면 철 좀 들지. 화장 떡칠하고 꾸며도 정희 아줌마보다 안 되는 거 뻔히 아니까 괜히 화풀이야.’
‘애초에 지가 카운터를 똑바로 보고 있든가. 놀러 간 사이에 정희 씨가 받은 주문이 몇 갠데.’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생각으로 끝내야 한다. 참다못해 김정희를 편들었던 주방 아줌마는 지난주에 잘렸다.
“이래서 내가 맘 편히 자리를 비울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아줌마 아들 헌터라며. 벌이 괜찮을 텐데 집구석에서 음식이나 하지 왜 여기까지 와서 남의 장사에 민폐를…… 아, F급 헌터라 벌이는 별론가?”
사장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힌 그 순간.
푹 숙이고 있던 김정희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사장님. 말씀이 과하시네요.”
“뭐?”
“과하셨다고요.”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지금?”
“네.”
낯선 느낌에 사장은 말문이 막혔다. 늘 조용하고 온순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그 말씀, 사과해 주세요.”
“사, 사과?”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이요.”
“어, 어머. 그래, 내가 한 말 중에 뭐가 틀렸는데? 아줌마 아들 F급 헌터 맞잖아!”
“등급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당연하지. F급 헌터를 어디에다 써? 우리 아들 정도는 돼야 돈도 잘 벌고 여자도 줄을 서는 거지. 이 가게도…….”
“D급 헌터인 아드님께서 차려 주신 거죠. 알아요. 수십 수백 번도 넘게 들었으니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직원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의 아들 자랑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단골 레퍼토리다.
연봉은 얼마고 집은 몇 평이며 차는 뭔지, 효심까지 깊어 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가게도 열어 줬다는 얘기는 너무 자주 해서 이젠 단골손님도 학을 뗀다.
“그럼 잘 알겠네. 나야 취미 삼아 하는 거지만 아줌마는 다르잖아? 아들 벌이가 시원찮으니까 주방 일 하는 거 아니야?”
“네, 아니에요.”
김정희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우리 태경이, 어릴 때부터 부모 속 한 번 안 썩히고 바르게 컸어요. 가족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고요. 돈? 부족하지 않게 벌어요.”
“그런 거 다 핑계지.”
“핑계요? 제 자식이 목숨 걸고 벌어 온 돈인데 부모가 되어서 어떻게 그걸 받아 쓸 수 있겠어요?”
“아줌마,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거야 받아들이기 나름이죠. 그리고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대단한 아드님은 언제쯤 얼굴을 비추나요?”
“뭐, 뭐?”
“제가 여기서 일한 지 1년이 넘어가는데 그 효심 깊은 아들이 한 번도 찾아오질 않아서요. 전화도 안 하는 건 아니죠?”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주방 안,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장이 눈을 부릅떴다.
“자식도 변변찮은 년이 어디서…….”
직원들은 뒤에 나올 말을 알아차렸다. 사장의 따발총 같은 욕과 함께 해고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게 뻔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김정희의 반응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말조심해. 이 개 같은 년아.”
“……!”
“……!”
순간 폭탄이 떨어진 듯했다. 죽음 같은 침묵과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들. 주방의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정희 아줌마가 욕을? 세상에.’
언제나 순하고 웃음 많던 김정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장한테도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고개를 숙이던 그녀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사장을 노려보고 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개 같은 년이라고 했다. 이 썅년아.”
“쌰, 썅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2차 폭탄이 떨어진다. 외마디 비명처럼 내지른 사장의 외침은 주방 밖 홀까지 울려 퍼졌다.
“방금 누가 욕하지 않았어?”
“너도 들었어? 방금 누가 썅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뭐야, 직원들끼리 싸우나?”
웅성거림이 커져 갔다. 손님도, 직원도.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주방을 향해 쏠린 그때였다.
저벅저벅.
모자를 눌러쓴 덩치 큰 청년. 언제 들어왔는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전까지는.
“소, 손님. 주문은 제가…….”
황급히 막아서는 남자 직원의 말에 청년이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주문 때문에 온 거 아니니까.”
“아니, 그래도 지금은.”
“실례.”
툭.
부드럽게 밀었을 뿐인데 건장한 체구의 직원이 휘청거리며 쓰러진다. 청년은 반쯤 열린 주방문을 거침없이 밀어젖혔다.
그리고…….
“엄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