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88
#887화
스아아아.
용암과도 같은 열기가 수많은 혈도를 뜨겁게 달구며 휘몰아친다.
나는 타오르는 눈동자로 소교를 노려보았다. 숨결과 함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잿가루처럼 퍼석했다.
“당신…… 도대체 뭐야?”
“반응이 격하네. 적당히 하고 공력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거야.”
소교가, 아니…… 이제는 누구인지 모를 그녀가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듯 담담하고 차분하게.
하지만 지금껏 스스로를 포장하던 존댓말과 예의 바른 태도를 벗어던진 채.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마디가, 마치 격랑처럼 일어나 나를 덮쳤다.
“지금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안 그래?”
“……!”
벼락에 정수리를 관통당한다면 아마 이런 기분일까.
나도 모르게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공력의 흐름이 불안정하니까.”
소교의 대답은 짧고 간단했으며, 무엇보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正論)이었다.
그러나 내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 당연한 대답을 위해서는 한 가지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니까.
‘기감(氣感).’
그것도 극도로 뛰어난, 칼날처럼 예리한 감각.
모든 전투는 상대를 가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수는 하수가 지닌 공력의 크기와 그 상태를 꿰뚫어 보지만, 하수는 고수의 정확한 수준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명백한 후자(後者)다.
‘고수!’
틀림없다.
눈앞의 저 여인, 소교는 실로 엄청난 고수였다.
심지어 내 눈을 속일 정도로 완벽하게 스스로를 숨길 수 있는,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도달한 초절정 고수.
‘앞서 보였던 그 움직임이, 우연이 아니었어.’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애써 억누른 나는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럴듯한 무기 하나 없는 적수공권(赤手空拳)에 불안정한 몸 상태까지.
제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 수 위의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나는 자세를 비스듬히 낮춘 채 재차 공력을 끌어 올렸다.
“누구냐, 너.”
소교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물음에 답해 줄 의무는 없지. 먼저 약속을 어기고 거짓말한 건 너였으니까, 열화신룡 진태경.”
“아가리 닥치고 대답이나 해. 정확히 누구의 명령을 따르고 있지? 황제? 아니면…….”
나는 소교를 노려보며 두 글자를 씹어뱉었다.
“천주(天主)?”
“글쎄.”
잠깐의 침묵.
도무지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모호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달라지겠지. 생사(生死)가 걸린 문제니까.”
“생사라…….”
“그래. 대답 여하에 따라 이 자리의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죽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네. 안 그래?”
그 순간.
스아아아.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바람이 되어 풀과 꽃을 뒤흔드는 그 기세는 북풍(北風)과도 같았고, 서늘한 눈빛과 목소리는 설한(雪寒)이 되어 나를 휘감는다.
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상대가 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이미 내가 헤쳐 온 수라장이 너무 많았다.
헌터로서도, 무림인으로서도.
“그래,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꼭 둘 중 하나만 죽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뭐?”
“넌 내가 죽인다. 반드시.”
“……!”
“내 모든 걸 걸고 약속. 아니, 장담하지.”
나 스스로도 내심 놀랄 만큼 무덤덤한 목소리.
그러나 이건 결코 위기에 몰린 약자가 보이는 허장성세(虛張聲勢) 따위가 아니었고, 내 확신은 고스란히 소교에게 전해졌다.
“너…… 진심이구나?”
“당연히.”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 하.”
작게 헛웃음을 흘린 소교가 신기한 동물 보듯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역시 그 정보들이 사실이었네. 하긴, 뭔가 숨겨 둔 한 수라도 있으니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혈주와 서천마군, 가장 최근에는 남천마후까지. 물론 위기마다 검성(劍星)이나 화왕(火王)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들을 상대하고도 무사하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
나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소교를 응시했다.
조금 전 물음의 대답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이 여자, 서천마군과 남천마후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도 단지 정보로만 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느 수준의 강자였는지 알고 있다는 투다.
마치 예전부터 일면식이 있던 것처럼.
비로소 소교라는 이름과 신분으로 정체를 감춘 저 여자의 배후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암천(暗天).’
그래, 그것밖에는 없다.
심지어 저 입으로 직접 밝히기까지 하지 않았나.
자신이 황궁에 머무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방대한 정보력 때문이라고.
이는 소교가 황제의 충복이 아니라는 뜻인 동시에 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음을 의미했다.
‘황궁을, 아니…… 황제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 셈이었겠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사 황자의 갑작스러운 반란. 선황을 비롯한 직계 황족들의 죽음과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황제가 뒤바뀌고, 수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도 반대파를 완전히 뿌리 뽑아 대국 전체를 손에 넣는 것에는 실패했으니.
‘그렇다면 혹시.’
머릿속의 퍼즐이 거의 완성되려던 그때,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소교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이유?”
“그래. 동귀어진마저 각오하는, 그 성치 않은 몸으로 굳이 내게 맞서려는 이유.”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나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야, 내 사람들이 덜 죽으니까.”
“뭐?”
“설령 이 자리에서 둘 다 죽는다고 해도, 너 같은 년을 살려 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내가 지금 널 해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당연히 헛소리겠지만, 물론.”
“어째서?”
“너처럼 독사 같은 년은 오래 살수록 해악이 되거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나.
암천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백이, 수천이, 끝내는 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고혼이 되어 사라졌다.
그러니 나 한 사람으로 퉁칠 수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물론 내가 살아남고 소교가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결과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 빌어먹을 독니 뽑고, 가죽까지 싹 벗겨 놔야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으니까.”
이번에 침묵을 택한 것은 소교였다.
한참이나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그녀는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친놈이네?”
“뭐라는 거야, 미친년이.”
“그리고 상산왕, 그 어린아이가 왜 그리 널 따르는지 조금은 알 것 같네. 응, 확실히.”
“지금…… 어린애 하나 인질로 잡았다고 협박하는 거냐?”
“글쎄, 어떨까.”
“어떻긴, 씨발. 무슨 짓을 해서든 널 죽여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거지.”
“의욕 넘치고 좋네. 하지만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소교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나이에 벌써 이 정도의 경지에 다다르다니, 하늘의 장난이라고 생각될 만큼 대단한 재능이고 성취야. 그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하지만…….”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란다. 천기(天氣)를 타고 났다고 해서 죽음마저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스륵.
옷깃을 스치는 미세한 소음.
동시에 소교의 가느다란 허리춤을 감싸고 있던 요대. 아니, 한 자루의 연검(軟劍)이 막강한 공력을 머금은 채 나를 향해 겨누어졌다.
그 낭창한 검신 너머로 보이는 서늘한 눈동자와 함께.
“하늘이 널 구해 줄지, 아니면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지…… 이참에 한번 시험해 볼까?”
우우우웅.
그리고 낮지만 또렷한 검명(劍鳴)이 울려 퍼진 그 순간.
화아악.
나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실로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기운이 소교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내 전신을 빈틈없이 옥죄고 짓누르는 것을.
흐읍.
나도 모르게 들이켠 호흡.
삽시간에 무거워진 공기가 숨통을 조인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 막강한 기세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맺혔다.
하지만.
“좆, 까.”
씹어뱉듯 토해 낸 한마디와 함께, 나는 보리지 않는 공력의 사슬을 밀어냈다.
내 팔과 다리를 꽁꽁 묶어 오는 그것을 버텨 내며 소교를 향해 나아갔다.
콰드득. 푹.
한 걸음.
고작 한 걸음일 뿐일진대, 발밑의 단단한 청석(靑石)이 단숨에 박살 나고 그 아래에 층층이 쌓여 있던 지면이 움푹 꺼진다.
단순히 내 몸무게가 그만큼 무거워서? 아니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이 장소가 그만큼 낡아 있어서?
둘 다 틀렸다.
천 근, 만 근에 달하는 공력의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내디딘 걸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력으로 공력을 해소한 것이 아닌,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신체 능력만으로 이를 버텼기 때문이다.
우득. 콰드드득.
다시 한번 힘을 실어 내디딘 발끝이 흙과 꽃을 지르밟는다. 이미 앞서 산산이 부서졌던 청석 조각들이 수십, 수백으로 으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강해지는 압력도 함께.
하지만…….
‘버틸 수 있다.’
잘 벼려 낸 날붙이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무기인 법. 지금껏 숱하게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성장해 온 신체 능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력. 체력. 민첩.
그 모든 면에서 나는 월등했다. 한계를 뛰어넘었다.
한 수 위, 혹은 두 수 위의 강적들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공력 없이도 능히 초인의 힘을 발휘하는 이 몸뚱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강철을 찢고, 이틀 밤낮을 쉼 없이 달려도 쓰러지지 않으며, 땅을 박찬 것만으로도 바람처럼 나아갈 수 있는.
그렇기에 설령 수 갑자의 공력이 몸을 옥죄어 온다 해도, 나는 버텨 낼 수 있었다.
아니, 깨트릴 수 있었다.
“합!”
짧은 기합성과 함께, 나는 온 힘을 다해 두 팔을 떨쳤다.
퍼엉!
엄청난 힘과 속도가 실리자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간다. 허공을 빈틈없이 에워싸며 짓누르던 공력이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무거웠던 전신이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워진 그 순간. 나는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신형을 쏘았다.
어느덧 크게 뜬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소교를 향해.
화륵, 콰앙!
염화일로(炎火一路).
그 한 걸음이면 족했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올린 열양지기가 발끝에서 폭발했고, 타오르는 열기와 함께 다섯 장의 거리를 단숨에 지워 낸 나는 흡사 포탄을 발사하듯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세상이 뒤흔들렸다.
그리고 넘실거리는 청백색의 화염 너머,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세찬 속도로 튕겨 나가던 가느다란 신형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
톡.
일 년 중 가장 강렬한 햇빛을 받아 활짝 만개한, 어느 이름 모를 꽃의 봉오리에 발끝이 닿는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 송이 꽃 위에 착지한 소교의 모습에, 나는 그만 본능적으로 탄성을 흘릴 뻔했다.
‘아.’
표횰하면서도 우아하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신법(身法)이었다.
순간적으로 적이라는 사실도 잊을 만큼. 이 기세를 몰아 계속해서 몰아붙여야 한다는 판단조차 잠시 접어 둘 만큼.
그리고 그런 나를 응시하는 소교의 눈동자는, 알 수 없는 이채(異彩)로 번뜩이고 있었다.
“분명 공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나야말로 묻고 싶다.
전력을 다한 멸염신권을 어떻게 그리 쉽게 막을 수 있었는지.
어째서 그 섬광 같은 속도와 파괴력에 정면으로 맞부딪치고도 힘겨운 기색 하나 없는지.
‘개 같은 년. 양심상 후달리는 척이라도 좀 하지.’
내심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며 툴툴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는 이유?
나도 모른다.
정말 미친놈이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싸움에 앞서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 맞다.
난 각오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너 죽고, 나 살자.”
나는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발걸음을 뗐다.
몸 상태?
괜찮을 리가.
거대한 힘을 일거에 쏟아 낸 단전은 벌써부터 과부하가 걸린 엔진처럼 울컥거리고, 손발처럼 움직이던 공력은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이건 링 위의 스포츠가 아니다.
시합을 중지시킬 심판도, 위험에 처한 선수를 대신해서 수건을 던져 줄 세컨드도 없다.
생사결(生死決)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대로.
‘이미 각오했어.’
몸과 달리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 일념(一念) 그대로, 소교를 향해 재차 쇄도했다.
화악!
세상이 느려진다.
주위의 풍경이 뒤바뀐다.
그리고 뜨거운 열기와 바람, 용암처럼 부글거리는 투지(鬪志)에 전신을 맡긴 그 순간.
쐐애애액!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한 줄기의 섬광이 벼락처럼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