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9
#88화
“아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음식점 상호명이 적힌 앞치마와 기름때 묻은 고무장갑을 낀 엄마. 우리 엄마.
놀란 얼굴은 곧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태, 태경이 네가 여긴 어떻게?”
당황하는 엄마를 향해 씩 웃어 준 그때,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쪽이 김씨 아줌마 아들이야?”
경계 어린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는 중년 여자.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미 이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진태경이라고 합니다.”
“어? 흠흠. 그래.”
예의 바르게 허리까지 숙이는 내 모습에 괜한 헛기침을 내뱉은 사장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갑자기 어쩐 일로 왔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들이 엄마 보러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이유?”
사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생각이 짧네.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사장인 내 기분은 어떻겠어?”
“음. 기분 나쁘시겠죠.”
“그래!”
“점심시간이라 가게는 미어터지고, 주방이든 홀이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직원 아들이 말도 없이 찾아왔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실 수 있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 잘 아네.”
이 자식 뭐지? 지금 사장이 딱 그런 생각일 거다.
혼란스러워하는 사장의 반응을 뒤로하고 엄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엄마, 옷 갈아입고 나가자.”
“뭐?”
“아, 아들?”
당황하는 두 사람.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왜요라니, 왜요라니!”
“혹시 무슨 문제라도?”
“어린노무 자식이 어른을 갖고 놀아? 방금 했던 말은 다 까먹었어?”
“아, 바쁜데 찾아오면 기분 나쁘실 거라고 한 거요?”
“그래! 내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다고 네 입으로 말해 놓고 그걸 잊어? 너, 지금 사람 놀리는 거야?!”
“어휴, 놀리긴요.”
“그럼 뭐야?”
“아까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그런데…….”
나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 이제 그쪽 직원 아니거든요.”
“뭐?”
“이해가 안 되세요? 때려치운다고요. 지금 이 순간부터.”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엄마는 멍하니 나만 바라봤고,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변한 사장은 빽 소리쳤다.
“누구 맘대로!”
“우리 맘대로요.”
“내가 이대로 보내 줄 줄 알아!”
“안 보내 주면요?”
“이, 이!”
“삼, 삼! 사, 사!”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사장의 인내심은.
“야, 이 개새끼야!”
쌍욕과 함께 치켜올라 간 손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덥석.
단번에 사장의 손목을 낚아챈 한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엄마가 일류 고수도 찔끔할 정도로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씹어뱉었다.
“누구 새끼 몸에 손을 대려고 해, 이 썅년이.”
세상에, 아까 홀에 있을 때 한 번 듣긴 했지만 엄마가 욕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본다. 자식 앞에서는 다른 사람 뒷담화도 안 하시는 분인데…….
“그리고 뭔 새끼? 개새끼는 네 아들이 개새끼고. 이 돼지 같은 여자야!”
“저게 아까부터 진짜! 야!”
엄마에게로 달려드는 사장을 내가 가로막았다.
나도 어딜 가도 눈에 띌 만큼 한 체격 한다. 두 중년 여성 사이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충분했다.
“어허. 진정하세요, 진정.”
“비켜, 안 비켜?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네,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것 같은데요?”
“으이이익!”
눈이 뒤집힌 사장이 괴성과 함께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물론 내게는 하나도 위협이 되지 않는 공격이었다.
‘공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네.’
게이트나 무림에서 상대한 적들을 생각하면 파리 날갯짓이나 다름없다. 근골, 근맥에 맷집까지 엄청나게 상승한 지금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이 때린다 해도 간지러운 정도다.
“그만하세요. 지금 엄청 힘들어 보이시는데.”
예상대로 사장의 발악은 금방 끝났다.
50대에 접어든 나이와 고도 비만에 이른 몸뚱어리에는 한계가 분명했으니까.
“헉, 허억, 헌터라는 놈이 민간인을 핍박해?”
이런 멘트를 칠 줄이야. 나는 사장의 뇌구조에 감탄했다.
“제가요? 그쪽을?”
“나 다친 거 안 보여? 손톱 부러져서 피 나잖아!”
“그거야 아줌마가 나 때리다가 혼자 다친 거고. 전 여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왜 혼자 부들부들 하세요.”
“어쨌든!”
이 정도면 지랄이 풍작이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주방 직원들은 물론이고 홀의 손님들도 질린 얼굴로 사장의 스탠딩 코미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납득 못 하겠으면 경찰 부르시든가요. 여기 증인 한 50명은 되니까 딱 좋네.”
“…….”
“안 불러요? 헌터 때문에 다쳐서 피 났으니까 경찰서 가서 조서 쓰고 고소도 하고, 변호사도 고용하셔야지. 내일부터 바빠지시겠네.”
좀 더 놀려 주려고 했는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시간이 아까워진다. 나는 혀를 쯧쯧 찼다.
“사장이 무슨 시장이라도 됩니까? 주변 사람들 피곤하게 하지 말고 심보 좀 곱게 써요. 그럼 이만 갑니다.”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장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너, 부천 산다며?”
“그런데요.”
“부천 어디 길드야?”
“말하면 압니까?”
“내 아들이 알지. 우리 민수도 부천에서 헌터 하거든.”
“아, 그래요?”
“듣자 하니 헌터들끼리는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며? 그 바닥에서 소문 안 좋게 나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네.”
“저 성실하고 실력 좋다고 소문났으니까 오래 버틸 겁니다. 됐어요?”
“김민수 알아? 우리 아들 부천에서 유명할 텐데.”
김민수? 알지. 지난 7년 동안 스쳐 지나간 민수만 서른 명이 넘을 거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성진호 아세요? 우리 고시원에서 제일 유명한데.”
“풋, 고시원? F급 헌터라 그런가, 수준 알 만하네. 벌이가 그 정도로 시원찮아?”
“걱정해 주셔서 참 감사하긴 한데…… 나름 시원시원하게 법니다. 어제도 40억 벌었고요.”
“얼마?”
“40억이요.”
유치하게 돈 자랑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기어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구나.
그러나 한 가지 깜빡한 사실이 있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가진 상식에서 모든 판단을 내린다는 것.
“40억? F급 헌터가 저렇게 많이 벌어?”
“당연히 허세지. 아는 헌터가 그러는데, F급이면 진짜 빡세게 해야 1억 정도 번다더라. 그리고 방금 못 들었어? 연봉이 아니라 어제 하루 만에 40억 벌었다고 한 거. 로또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되냐?”
“에이, 난 또 진짜인 줄 알았네.”
홀의 손님들은 물론이고 은근히 나를 응원하는 기색이던 주방 직원들도 떨떠름한 눈빛으로 변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긴 하다.
“아들, 사실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엄마의 물음에 사장이 코웃음 쳤다.
“퍽이나 사실이겠다. 우리 민수도 그렇게는 못 벌어.”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유명하다는 민수 씨 등급이 어떻게 되세요? A급?”
“D급 헌터야.”
“…….”
“왜, 너무 높아서 당황스러워?”
“아니, 뭐…… 솔직히 당황스럽긴 하네요.”
워낙 당당하게 말해서 몽키.D.민수 정도는 되는 줄 알았네.
‘부천에 유명한 D급 헌터가 어디 있어.’
순간 말문이 막힌 내 모습을 오해했는지 사장이 피식피식 비웃음을 흘린다.
“우리 아들처럼 D급 헌터는 돼야 어디 가서 대접받고 살지. F급은 부끄러워서 말이나 할 수 있겠어?”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았는데요. 말도 잘했고.”
“그래도 무시는 받겠지. 헌터들 사이에서는 등급이 깡패잖아.”
“아, 예. 등급이 깡패죠.”
“내 전화 한 통이면 민수가…….”
“예, 예.”
내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사장이 눈썹을 치켜뜬다.
“이게 어른이 말하고 있는데. 우리 민수한테 혼나고 싶어?”
“잠깐 찾을 게 있어서요. 아, 여기 있다.”
“이게 뭔데?”
“궁금하면 직접 보세요.”
지갑에 포인트 카드며 할인 쿠폰이 너무 많아서 찾는 것도 일이다. 내가 건넨 얇은 은색 카드를 확인한 사장이 입을 벌렸다.
“……C급 헌터?”
“개인적으로는 헌터는 등급이 깡패라고 생각하는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마, 말도 안 돼. 분명히 F급이라고 들었는데…….”
“F급이었죠. 지금은 C급이고. 정보 업데이트가 많이 느리시네.”
“이, 이거 가짜 아니야? 우리 민수 자격증이랑 색깔이 완전히 다르잖아!”
“그 자격증, 황동색이죠?”
“…….”
“저도 예전에 그거 썼어요. 하급 헌터들은 황동색, 중급 헌터들은 은색. 이건 모르셨나 보네.”
곳곳에서 숨죽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에 반전된 분위기. 엄마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짱을 꼈고, 사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을 시작했다.
“허, 헌터 등급이 중요해? C급이나 D급이나 겨우 한 단계 차이인데 거기서 거기지.”
이게 말이야, 방구야. 말도 안 되는 발악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헌터 등급 가지고 사람 무시하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이 직급만 중요해? 회사가 어디인지가 더 중요하지. 중소기업 과장보다는 대기업 대리를 더 쳐주잖아. 내 말이 틀려?”
“그건 모르겠고…… 일단 여기 계신 손님들은 동의 못 하시는 것 같은데요?”
나는 홀을 꽉 채운 손님들을 가리켰다. 중소기업의 직장인 수십 명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사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아줌마 뭐야?”
“아, 입맛 확 떨어지네.”
“아직 음식도 안 나왔는데 그냥 갈까?”
“그래, 가자. 가.”
“다들 자리 옮기지. 요 앞에 백반집 괜찮은 곳 있어. 내가 대기업 대리는 못 돼도 중소기업 과장이니까 한 턱 쏜다.”
드르륵.
중년 아저씨의 한마디에 대여섯 명의 부하 직원들이 뒤따라 일어났다. 그런 광경이 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손님, 그게 아니고요. 손님!”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내가 여기 다신 오나 봐라.”
“지금 주문 들어갔는데 이렇게 가시면…….”
“주방 꼴 보니까 한 시간은 걸릴 텐데, 뭘. 됐고, 저희도 이만 갑니다.”
홀 직원들의 만류에도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분 남짓한 시간이 흐르자 홀에 남아 있는 손님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크, 가게 망하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구나.’
사장은 이미 분노와 당황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너희들…….”
“그래서 아드님이 어느 길드시라고요?”
“우리 민수가 상동 길드에서도 아주 잘나가는 헌터야! 너 하나쯤은…….”
“네? 어디요?”
“상동 길드! 거기서 집도 주고 차도 주고.”
“아, 상동 길드. 잠시만 기다려 보시겠어요?”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 웃음을 꾹꾹 참으며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달칵.
– 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우리가 일 있어야 연락하는 사이였어?”
– ……약속한 40억은 보내 드렸는데요.
“아, 그거 확인했지. 잘 받았어.”
스피커 모드를 통해 이어지는 대화를 모든 사람이 들었다.
40억. 앞서 했던 말이 사실임이 밝혀지자 하나같이 눈이 툭 튀어나온다.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용건을 꺼냈다.
“너 혹시 김민수라고 아냐?”
– 김민수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상동 길드 팀장이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너희 길드 소속 D급 헌터래.”
– ……널리고 널린 게 D급 헌턴데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것 때문에 전화하신 거예요?
“응, 끊어.”
돈 떼일까 봐 임창수의 명함을 받아 놓은 게 신의 한 수다.
뚝, 전화를 끊자 사장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누, 누구라고?”
“못 들으셨어요? 상동 길드 팀장이에요. 쉽게 말하면 민수 씨 직장 상사.”
“……팀장? 상사?”
“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민수 씨가 잘 보여야 할 미래의 고용주기도 하죠. 이 친구 아버지가 상동 길드 길드장이거든요.”
“…….”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얼굴. 더 이상 말 섞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 나는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가요.”
“그럴까? 아들.”
우리 엄마, 김정희 여사는 활짝 웃으며 작업복을 싱크대에 처박았다. 아, 물론 사장을 향한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부모면 부모답게 똑바로 살아. 이 아줌마야. 어디서 남의 귀한 자식을 함부로 입에 담아?”
마지막 한 방.
사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고,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아들, 밥 먹었어? 집에 청국장이랑 김치전 있는데.”
“이야, 진수성찬이네.”
날씨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