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95
#894화
“은인. 아니, 각주님.”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진태경의 모습에, 주화란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 했다.
“가게 두어라.”
귓가를 파고든 나직한 한 마디.
진태경을 향해 뻗어나가던 손이 허공에서 덜컥 멎는다. 주화란은 한차례의 비바람과 함께 다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았던 건가요?”
마지막 순간 주화란을 만류한 적천강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노부가 어찌 알겠느냐.”
“노야!”
마치 질책하는 듯한 주화란의 외침에 적천강은 슬쩍 웃었다.
천하 무림을 주유한 지 어언 일백 하고도 수십여 년. 유수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숱한 인간군상을 보았고, 지금껏 쓰러트린 적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화왕 적천강이라는 이름은 과거의 역사이자, 현재의 역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영수(領袖)들도 감히 자신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
한데 무엇이, 천하의 화왕 앞에서 저 어린아이를 이토록 성내게 했을까.
적천강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제자가 박차듯 자리를 떠난 이유도.
“노부가 제법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땡중이 하나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으슥한 곳에서 술과 고기를 먹던, 정말 말 그대로 땡중이었지.”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순간 멈칫했던 주화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말씀하신 분이 혹시?”
“그래, 그 땡중이 바로 법왕(法王) 굉도다.”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서는 익히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별호만큼이나 불같은 성정을 지닌 화왕 적천강에게는 친구보다 적이 수백, 아니 수천 배나 많았고, 법왕은 그 얕은 교분 관계 중에서도 화왕을 말 몇 마디로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니까.
비록 적천강은 몰랐지만, 굉도가 법왕이라는 별호를 얻은 것에는 일신의 무공을 떠나 그의 지랄 맞은 성격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도 크게 한몫했다.
물론 법왕이 천하 무림인 모두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고승대덕(高僧大德)이라 불릴 만한 부드러운 성품과 그 신비로운 예지력 때문이었지만.
“녀석은 때때로 천기(天機)를 읽어 하늘의 뜻을 알아내고는 했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참으로 신묘하기 짝이 없는 재주였지.”
주화란을 비롯한 모두는 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에 어느덧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법왕은 그만큼 중원 무림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설령 그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방장이 아니었다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데 그런 땡중이 열반(涅槃)에 들기 일 년 전, 그런 말을 하더군.”
적천강은 머릿속 깊숙하게 각인 된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냈다.
불의에 간 벗이 생각날 때마다 함께 떠올리곤 했던, 이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날 밤의 기억이었다.
“천기가 어그러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이미 수십여 년 전부터. 머지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환란의 먹구름이 몰려와 해와 달, 그리고 별마저 뒤덮을 것이라고.”
“암천(暗天)……!”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외마디 탄식.
고개를 끄덕인 적천강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때부터였지. 암천의 존재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이.”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넉 달 전. 법왕 굉도가 올려다본 하늘에는 혼란한 어둠 사이로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신성(新星).”
적천강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신성이란 본래 한순간 화려하게 빛났다가 흐릿해지는 별을 뜻한다.
그러나 어느 날 북쪽에서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한 그것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날이 그 빛의 크기를 더해 갔다.
운명인 듯 우연처럼 만난 두 노소(老少)가 산서를 떠나 하남에 다다를 때까지.
구화산에서 일 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신성을 가장 처음 발견한 고승이 한 줌의 사리가 될 때까지.
그리고 아마 지금까지도.
“그때의 법왕이 신성의 존재를 알려 주며 뭐라 했는지 아느냐?”
그 물음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고, 적천강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노부가 곁에 두었던 어느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놈이, 바로 그 신성의 주인이라고 했다.”
“……!”
“언젠가 온 천하가 어둠에 잠긴다 해도, 그 신성만큼은 빛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었지.”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이 놀라운 비사(祕史)의 주인공이, 자신들이 잘 아는 누군가였기 때문이었다.
‘진태경.’
모두의 뇌리를 관통한 한 사람의 이름.
지금 이 순간 그들이 느끼는 충격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바로 그 법왕 굉도가, 세상을 밝힐 신성의 주인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빛을 잃지 않을 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신성이 가리키는 것은 과거의 전설이 되어 버린 무신(武神)도, 새로운 무림 맹주로서 현재의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검성(劍聖)도 아니었다.
바로 진태경이었다.
이제 고작 약관을 넘어선, 그럼에도 천하에 불어닥친 환란 속에서 누구보다 빛나던 한 청년이 신성의 주인이었다.
덜컹. 후우웅.
어느덧 전각 내부에 내려앉은 침묵 속, 세차게 불어온 비바람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혔다.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빗줄기와 바람이 사람들 사이를 휘감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두 눈으로 바깥의 어둠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별이 머물다 간 자리를.
저 어딘가에 있을 신성의 주인을.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적천강은 담담하게 뇌까렸다.
“별이 비추는 곳에는 어둠이 깃든다. 그러나 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적천강으로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정마대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란이라니.
새파랗다 못해 핏덩이나 다름없는 진태경이 바로 그 환란 속의 빛이라니.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태경을 곁에서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깨닫게 되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빛이다. 향후 천하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이정표가 되어 줄 새로운 별이다.
그리고…….
‘하늘이 노부에게 허락한, 유일한 빛이다.’
어둠 속에서 별이 더욱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진태경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어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어둠도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 별이 발산하는 빛을 꺼트리지 못했다.
설령 언젠가 그런 날이 찾아온다 해도, 그것이 이번만큼은 아니리라.
완전한 어둠은 아직 천하에 드리워지지 않았으니까. 진태경이라는 신성은 그때 비로소 가장 크고 밝게 빛날 테니까.
‘그때까지…… 너만의 길을 찾아라. 원하는 곳을 비추어라.’
적천강은 흐릿하게 웃었다.
세상사 옳고 그름을 따질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흘려보낸 그다.
그가 경험한 무림에, 아니 이 세상에는 정의(正義)란 없다.
각자의 대의(大義)에 함몰된 괴물들이 서로를 향해 창칼을 겨누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곳, 황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알 수 없는 일련의 상황처럼.
‘노부 역시 마찬가지지.’
늙었다는 것은, 그만큼 무뎌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느덧 죽음이라는 단어는 헐값이 되어 버렸고, 어렵사리 마음을 주었던 이들은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제자인 장천도, 법왕도.
적천강이 세운 정의이자 대의는 바로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선한 선택을 하길 바랐다. 그의 말년에 불현듯 찾아온 유일한 제자가 그러하듯이.
적천강이 생각하는 정파와 사마외도의 차이는 그것뿐이었다.
‘삐뚤삐뚤 어색하게 써 내려간다 한들, 그것의 의미마저 퇴색된다더냐.’
필체가 형편없어도 정(正)이라는 글자에 담긴 뜻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아직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서투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진태경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살수들을 혐오한다. 갑작스럽게 무림인들을 끌어들인 마삼보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네 녀석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상관없다. 노부가 항상 곁을 지킬 테니까.’
적천강은 바람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어둠을 응시했다.
황궁은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미지의 영역.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다.
아니, 적아(敵我)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치는 수밖에.’
내심 뇌까린 적천강은 텅 빈 접시를 싹싹 핥고 있던 태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딱!
“설거지 그만하고 문이나 닫아라, 이 사파 잡놈 새끼야.”
* * *
마삼보와 마주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찾아가는 것보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냈으니까.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미 파악해 둔 구조를 떠올리며 동창에 배정된 전각으로 향하던 와중, 착 달라붙는 무복(武服)을 걸친 환관 하나가 다가와 건넨 말에 나는 눈매를 좁혔다.
‘어떻게 알았지?’
어둠과 지형지물을 이용해 철저히 은엄폐 중이었고, 움직임도 최소화했다.
제아무리 동창의 환관들이 은잠술에 일가견이 있다 하더라도, 한참 윗줄의 고수인 내 존재를 이토록 간단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빌어먹을.’
지금 당장은 의문을 뒤로하고 나아가야 할 때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앞으로 나선 나를, 환관은 어느 자그마한 전각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황궁 내에는 각종 부처를 위한 수많은 전각과 구역이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사전에 마삼보를 통해 입수한 황궁 내부 지도에 적힌 동창의 구역이 아니었다.
“잠깐. 이곳은…….”
“저희 동창에 배정된 건물이 아니지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말입니다.”
“…….”
“그럼 이만.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사용하는 황궁 내의 비처(秘處). 뭐 그런 건가?
뭐라 덧붙일 새도 없이 사라진 환관을 뒤로한 채, 나는 전각 내부로 들어섰다.
끼익.
험악한 날씨가 이럴 때는 고맙다.
낡은 목제 문이 내지른 비명이 거센 빗소리에 파묻혔으니까.
‘마삼보는…… 이 층이군.’
위층에서 느껴지는 단 하나의 인기척. 문과 비슷하게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으며 올라가자 캄캄한 공간 속에서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왔나?”
이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새하얀 이빨이 어둠 너머로 설핏 비쳤다.
마삼보는 촛불은커녕 가구 하나 없는 공간을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누추해도 이해하게. 워낙 감시하는 이목들이 많아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이런 것 정도는.”
“이런 것이라. 다른 건 안 괜찮다는 뜻으로 들리네만.”
“이미 알고 계시니, 대화가 빨리 마무리되겠네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낯설다. 아마 표정도 목소리와 비슷하게 굳어 있겠지.
“역시, 놀라울 만큼 솔직하군.”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사실상 동창의 수장인 마삼보가 이런 식의 대답을 들을 일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하지만 그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래, 무엇에 대해 듣고 싶나?”
올 게 왔다는 듯한 담담한 얼굴.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
“내가 고용한 살수들? 아니면…… 소교(小嬌), 그 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