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96
#895화
동굴처럼 캄캄한 전각 내부.
나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빗소리를 들으며, 조금 전 들었던 말의 의미를 조용히 곱씹었다.
마치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나를 이곳으로 안내해 준 환관의 모습도 함께.
“이미 알고 있던 겁니까.”
마삼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진 전쯤에 살수들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네. 자네에게 정체를 발각당했다고. 그들은 이 상황이 의뢰를 완수하는 것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닐까 우려하더군.”
어지간히 눈치 없는 놈이 아닌 이상, 저 우려라는 말이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그 상대가 살수들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태감께서 고용한 살수들이 절 죽이려 했다는 거군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자네도 알잖나. 살수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들인지.”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대충은 압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태감께서는 이번 일에 끌어들이셨고요.”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네. 합당한 보수만 쥐여 준다면 누구보다 충성스러워지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제 처우에 관해 뭐라 하셨습니까?”
“……이보게.”
미간을 좁힌 채 나를 응시하던 마삼보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나를 천자와 같은 미치광이로 보지 말게. 자네는 상산왕 전하를 돕기 위해 천릿길을 마다하고 달려온 사람이고, 그들은 보수를 약속받고 의뢰를 수행하는 살수들일 뿐이야. 누가 더 믿을 만한 아군이겠나?”
“그건…….”
“그래, 당연히 자네야. 이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됐나?”
아직은 아닙니다.
불쑥 튀어나오려는 그 한마디를, 나는 가까스로 입 안에 가두었다.
‘그래, 아직은 아니지.’
지금까지의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저 빗줄기처럼 차가워진 머릿속 때문일까.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의 생각을 상대에게 모두 털어놓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그 대신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뒤로 미뤄 두었던 의문을 꺼냈다.
“그럼 소교,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까?”
“아닐세. 내가 구태여 살수들에 대한 정보를 숨긴 것은 자네와 같은 무림인들이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여인은 달라.”
지금 이 순간 마삼보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고 느껴진 것은, 결코 주위가 어둡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교라는 이름을 쓰는 그 여인에 대해 미리 알려 주지 못한 것은, 우리 역시 그녀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일세.”
“몰랐다고요? 다른 누구도 아닌 동창이?”
금의위와 동창은 천하 곳곳에 뿌리내린 엄청난 규모의 정보 단체.
그런데 그런 동창이, 제아무리 역모 직후 세력이 축소되었어도 본진이나 다름없는 황실의 정황을 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래야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더 믿음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내 눈빛에 담긴 불신을 읽어 낸 마삼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이었네. 소교, 아니 정체불명의 고수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솨아아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 빗소리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 * *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일각(一刻) 남짓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간 마삼보는 옆구리에 찬 호리병을 꺼냈고,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제야 이런 중요한 정보들을 말해 주는 겁니까? 만약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불안했으니까.”
막 호리병을 기울이려던 마삼보가 말을 이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었네. 현재 끌어모은 아군의 전력만으로는 그녀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어.”
호리병 입구 사이로 독한 주향(酒香)이 흘러나온다. 내 시선을 눈치챈 마삼보가 손에 들고 있던 호리병을 던졌다.
“한잔하겠나? 어지간히 술이 땡기는 표정인데.”
툭.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호리병을 받아 낸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입가에 가져갔다.
복잡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술이 간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어차피 항아리째 마셔도 그리 취하지도 않으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으로 넘길 때마다 불처럼 뜨거운 도수와 함께 입 안을 가득 채운 독한 주향이 느껴졌다.
천하의 객잔 어디에서나 파는 값싼 술, 화주(火酒)였다.
“북방이 고향이라 그런지, 화통하게도 마시는군.”
눈살을 찌푸린 채 입 안에 남아 있는 화주를 꿀꺽 삼킨 내가 대꾸했다.
“의외네요. 좀 좋은 술을 드실 줄 알았는데.”
“왜, 동창 병필태감은 화주 같은 싸구려는 안 마실 줄 알았나?”
피식, 작게 실소를 흘린 마삼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내 본질은 화주일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밑바닥 인생이었던 것도, 속에 감춘 것을 쉽게 보이지 않는 것도 닮았지. 황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으려면 화주가 가진 독한 주향처럼 속마음을 감춰야 하거든. 그런 의미에서는 소교 그 여인과 같은 부류라고도 할 수 있겠군.”
그래, 소교.
나는 조용히 그 이름을 곱씹었다. 조금 전 들었던 믿지 못할 이야기와 함께.
“전부 사실입니까?”
“들어 보니 어때, 거짓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대답을 듣고 싶은 겁니다.”
“확답을 원한다면, 그래. 모든 것이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일세. 내 목숨을 걸지.”
굳은 얼굴로 대답한 마삼보가 문득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밖 너머, 부쩍 가늘어진 빗줄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언컨대 소교.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 그날의 역모는 성공할 수 없었을 거야. 창공(廠公)께서 지금처럼 병석에 누워 계실 일도 없었겠지.”
소교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십여 년 전, 황궁이 전화(戰火)에 휩싸인 그 날이었다고 했다.
“홍진 그 친구는 줄곧 선황 폐하의 곁에 머무르느라 몰랐겠지만, 말했다시피 우리 동창은 그날의 역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네.”
마삼보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지금은 병마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 창공은 대단한 걸물이었다.
백연보다도 먼저 선황을 모셨으며, 일신의 무공 또한 황실 제일의 무장이라 불리던 백연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수준이라고 평할 정도였으니.
“가장 먼저 낌새를 알아차린 것도 창공 어른이셨지. 그분께서는 황도 외곽의 금위군을 소환하고, 황궁 내의 동창과 함께 반역자들을 격퇴하려 하셨네.”
당시의 마삼보 역시 창공의 휘하에 있었고, 황궁 내의 금의위를 물리치고 선황의 신병만 재탈환한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백연과 창공 어른 간의 생사결은 백중세(伯仲勢)였네. 그 흐름이 그대로 유지만 되었더라면 능히 역모를 진압할 수 있었을 거야. 금위군이 합류한다면 금의위로서도 버티기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마삼보가 딱딱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더군.”
전신을 흑의(黑衣)로 감싼 정체불명의 고수가 나타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백연과 흑의인.
두 초절정 고수의 합공을 이기지 못한 창공은 극심한 내상과 함께 쓰러졌고, 팽팽한 접전의 흐름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당시 아군의 전력은 결코 금의위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었네. 유일한 패인(敗因)은 바로 그 흑의인…… 아니, 이제는 소교라고 불러야 할 정체불명의 고수였지.”
마삼보는 목이 타는지 내게 돌려받은 호리병을 기울이려 했지만, 어느새 파르르 떨리는 손끝에서 미끄러진 그것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텅. 데구르르.
공허한 소리와 반쯤 남았던 술이 울컥 흘러넘친다.
무거운 눈빛으로 바닥에 고여 가는 술을 내려다보던 마삼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목격했던 무위는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네. 그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나는 문득 떠올렸다.
시종일관 봄바람처럼 잔잔하던 소교의 기운을.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솟구쳤던 그 무시무시한 기파를.
“분명 그것 역시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겠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다면 그런 기분이었을까.
지금껏 수많은 강자를 만났지만, 적아를 포함해서 그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게 만든 이들의 머릿수는 불과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삼성(三星)에 속한 이들이거나, 그와 충분히 비견되는 고수들이었고.’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초절정의 경지를 벗어나, 더 높은 지고의 영역에 발을 디딘 자들.
긴 세월 동안 심신을 갉아먹던 심마를 떨쳐 내고 비로소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른 적천강이 그러하듯, 소교 역시 만부부당(萬夫不當)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만한 고수였다.
“그래서 날 택한 거였군요. 아니, 저와 제 스승님을.”
“맞네. 앞서 말했던 그대로지.”
이미 모든 진실을 밝힌 상황.
마삼보는 무거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상산왕을 위해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줄 사람. 결과에 대한 보상보다 인의(人意)를 최우선으로 삼을 만한 누군가. 그리고…….”
“황제의 곁에 머무르는 정체불명의 고수를 상대할 만한 또 다른 강자. 화왕(火王) 적천강. 맞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마삼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네. 홍진에게 밀서를 보낼 때 자네의 이름을 써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지. 하나뿐인 제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황궁으로 향한다면, 그 스승 역시 함께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남만에서 벌어진 상황을 모두 알고 있던 것도?”
“전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지. 남만이 아닌 자네를.”
“왜 진작 무림맹에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그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요.”
“현 맹주인 검성 매종학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아는 바가 적지 않네. 창공께서는 그를 가리켜 이 시대에 몇 안 남은 진정한 협객이라고도 하셨고.”
“그렇다면 굳이 저나 스승님을 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비밀은 드러나지 않을수록 좋지 않겠나. 그 비밀이 역모(逆謀)라면 더더욱.”
“아.”
침음성을 흘리는 내 모습에 마삼보가 씁쓸하게 웃었다.
“말이 좋아 반정군(反正軍)일 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야말로 대역죄인이 아니겠나. 더군다나 이 일에 무림과의 연관성이 밝혀진다면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터.”
무림은 엄연히 대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숲이지만, 나라의 법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니 무림맹이 개입한다는 건, 황위를 둘러싼 이 중요한 싸움에 일종의 외세(外勢)를 끌어들이는 것과 진배없는 셈이다.
그것도 목줄도 없이 울타리를 벗어난 맹수들을.
“물론 현 무림맹주 역시 우리를 도우려는 심산이었을걸세. 자네에게 상산왕 전하를 호위하라는 밀명을 내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사실입니다. 저희로서도 황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딱 그 정도야. 정식으로 반정군에 가담하라고 한다면, 과연 무림맹의 수뇌부들 중 몇 명이나 동의하겠나?”
“그건…….”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역모.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단어.
마교 내부에서 마치 왕처럼 군림했다던 천마라면 모를까, 지지를 통해 선출된 무림맹주가 독단적으로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무림맹의 깃발 아래에 선 수많은 문파들까지.
그들 대부분의 지지를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옳고 그름을 떠나, 역모는 단 한 순간에 패가망신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열화신룡 진태경. 자네에게 정식으로 묻겠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소리도 어느새 거짓말처럼 멎었다. 어둠 속에서 마삼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와, 아니 우리와 손을 잡겠나?”
힘이 실린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우리를 도와 이 어지러운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상산왕 전하를 보위에 올리겠나?”
“……!”
나도 모르게 파르르 떨리는 신형.
뒤죽박죽 뒤엉킨 머릿속에서 한 줄기 벼락이 내리꽂힌다.
짧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길었던 침묵 속, 말없이 마삼보를 응시하던 나는 불현듯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보여 주셨던 그 연판장(連判狀). 지금도 갖고 있습니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마삼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