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98
#897화
그날은 모든 것이 평소와 달랐다.
늘 웃음과 음악이 끊이지 않던 거리는 고요했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먹구름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으며, 유례없는 폭우로 물이 불어난 운하(運河)는 이 상황을 대변하듯 불안하게 출렁였다.
그리고 그 끝이자 중심에, 황궁(皇宮)이 있었다.
그그그긍.
때는 어스름한 새벽녘, 육중한 쇳소리와 함께 열리는 거대한 철문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황궁의 출입문은 언제나 자시(子時)에 닫히고, 묘시(卯時)에 열렸으니까.
머지않아 곧 동이 트면 여러 조정의 중신들이 황궁으로 향할 테고, 이 아름답고도 위험한 대도시의 주민들은 신분의 고하를 떠나 각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터였다.
마치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순리라도 있는 듯이.
하지만 천천히 열리는 철문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 눈부신 광채는, 오늘 하루의 시작이 결코 평소와 같지 않음을 뜻하는 증거였다.
“이, 이보게. 저거 설마…….”
“응?”
여느 때처럼 황궁 앞 대로변에 좌판을 깔고 있던 장사치는 동료 상인의 부름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이내 뱁새처럼 찢어진 눈을 화등잔만 하게 부풀렸다.
“그, 금의위(錦衣衛)?”
반사적으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 한마디가 튀어나온 순간.
“하!”
한목소리로 내지르는 짧은 기합성과 함께, 각자의 준마에 몸을 실은 일천의 금의위가 활짝 열린 철문 사이로 쏟아졌다.
두두두두!
새벽을 깨우는 말발굽 소리.
땅이 울린다.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과 서늘한 새벽 공기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피어오른다.
마치 하나의 화살처럼 쏘아진 일천의 인마(人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황궁 앞 대로변을 가로질렀고, 이내 선두에 선 우두머리의 수신호에 맞춰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에서 수백으로. 수백에서 백으로. 백에서 수십으로.
그들은 정해진 바에 따라 분산하고, 또 분산했다.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을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았지만, 황도 전역을 한바탕 휩쓸며 지나간 황금빛 물결의 빈자리에 남아 있는 방(榜)을 보며 그 이유를 깨달았다.
명일(明日). 미시(未時).
황자 탄신(皇子誕辰) 대연회(大宴會). 개(開).
유려한 필체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황실 서예가가 직접 작성한 수백여 장의 포고문의 첫 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때아닌 수해(水害)로 시름 하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사흘? 이런 상황에서 무려 사흘이나 그 빌어먹을 연회를 개최한다고?”
“쉿. 목소리 좀 낮추게. 역모죄로 잡혀가고 싶나?”
“역모는 염병할. 평생을 소처럼 일해서 마련한 집에, 세간 살림까지 몽땅 잃은 마당에 뭐가 그리 무섭겠소?”
“옳소!”
“시팔, 민심이고 나발이고 알 거 없다 이건가? 제 자식 태어난 게 우선이다 이거야?”
누군가는 재산을,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가족보다 가깝던 이웃이다.
그렇기에 포고문을 읽고 흥분하는 이들을 말리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천자. 혹은 황제.
하늘이 내린 용의 핏줄이자, 만백성을 보듬어 살펴야 하는 지존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수해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은 이들은 분노했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또 다른 사람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이, 분노하는 저들의 모습이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나라는…… 뭔가 잘못됐다.’
처음에는 그저 우러러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천자란 꿈에서도 볼 수 없는 높으신 분이었고, 하늘 위에 뜬 태양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작금의 황제는 천륜(天倫)을 어긴 자였다.
제 부모를, 형제를, 수많은 충신과 그 일가를 몰살시키며 황위에 오른 인면수심의 괴물.
그렇기에 천심(天心)이 떠났을 것이다.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는 바로 그 소림사에서는 명망 높은 고승들이 죽어 나갔고, 사천에서는 물경 수천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백주대낮에 시산혈해를 일으켰다.
그뿐인가.
호북에서는 이무기가 미쳐 날뛰었다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들려왔고, 척박한 남만 땅에 살아가던 야만인들은 거대한 군세를 이루어 북상(北上)했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거기에 더해 지난 일백 년 동안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북방의 이민족들이 준동의 기미를 내비치고, 이제는 유례없는 폭우가 황도를 덮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련의 재앙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늘이 이 나라를 버렸다. 아니, 황제를 벌하려 한다.’
지금이 등 따뜻하고 배부른 태평성대(太平聖代)였다면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소문과 미신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열심히 흘린 땀의 대가로 얻은 집이, 사랑하는 가족이, 풍족한 양곡과 재물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했을 테니까.
지난 십여 년간, 천하는 서호(西湖)의 수면처럼 잔잔했고 백성들은 새로운 천자의 통치에 생각만큼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천륜을 저버린 천자의 행보를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먹고 사는 것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선황 시절의 평화로움 속에서 날뛰던 탐관오리들이 역모에 휘말려 숙청당하자 잘 죽었다며 좋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불과 이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기이한 현상들이 천하 곳곳에서 벌어졌고, 백성들에게 동정과 사랑을 받는 어린 왕이 황도에 소환되었으며, 신음하는 백성들을 외면한 천자는 후사를 축하하기 위해 막대한 재물을 쏟아부어 연회를 개최했다.
“이것이, 정녕 이것이 옳은 행동인가?”
낡은 죽립을 깊게 눌러쓴 어느 사내의 뇌까림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민심이 곧 천심이요, 천심이 곧 민심이다. 한데 황상은 어찌하여 하늘과 백성을 저버린단 말인가.”
어느새 고요해진 좌중들 사이로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공기가 무겁게 장내를 짓눌렀다.
그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눈을 빛냈다. 어째서인지 유달리 선명하게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푸르른 창천의 기운이 쇠하고,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구나. 머지않아 불어닥칠 비바람은 머지않아 천하를 집어삼킬 터.”
희한한 일이었다.
수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음에도,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은 채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온 거친 인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길거리 장사치. 아마도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높은 학식을 쌓아왔을 늙은 유생까지도.
그만큼 사내의 말과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현기(玄機)와 신념이 깃들어 있었고, 모두의 마음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그와 더불어, 묻지 않을 수 없는 궁금증도 함께.
“저어, 나리. 말씀하시는 도중에 송구스럽지만 이놈이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요?”
척 봐도 투박해 보이는 인부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죽립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오.”
“다름이 아니오라, 마지막에 말씀하셨던 그 비바람을 피하려면 소인이 어찌해야겠습니까?”
“산으로 향하시오.”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인부를 향해, 죽립 사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높은 산을 찾아 그곳에 몸을 의탁하시오. 그곳에는 마르지 않는 개울이 있고, 탐스러운 열매와 뛰노는 짐승이 있으며, 집과 장작이 되어 줄 숲 또한 있으니 만백성을 품고도 남을 거요.”
처음 질문을 던진 인부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천하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니?
만백성을 품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고, 식량과 자원이 풍부한 산이 도대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부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성질 급한 다른 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깊은 수행을 쌓으신 고인이신 것 같은데, 혹시 중원오악(中原五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몇몇 사람들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서 가장 높고 영험한 기운을 품었다는 다섯 개의 명산(名山)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수군거림도 함께.
“말씀하시는 그 산이 중원오악 중 어딥니까? 하남의 숭산(崇山)? 산동의 태산(泰山)? 섬서의 화산(華山)? 그도 아니면…….”
“모두 틀렸소. 본인이 말한 건 중원오악이 아니오.”
“예? 그게 무슨, 중원오악이 아니라면 도대체…….”
담담한 동시에 단호한 사내의 대답에 사람들의 말문이 막힌 그 순간. 어디선가 불쑥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곳이 남아 있지. 아니, 처음부터 그곳만이 유일했어.”
좌중의 시선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쏠렸다.
빛바랜, 그러나 정갈한 의복을 걸친 늙은 유생이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상산(上山).”
“……!”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소수의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적어도 늙은 유생의 뒷말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래, 그곳이라면 만백성을 품을 수 있겠지. 그 어떤 비바람도 중원오악을 집어삼킬지언정 감히 상산에는 닿지 못할 걸세. 그 산의 주인은 하늘의 보살핌을 받고 있고, 비와 낙뢰를 다스리는 용의 후손이니.”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그 자리의 모든 이가 석상처럼 굳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고, 이내 다 함께 같은 결론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상산.
중원오악보다 높고 넓으며, 만백성을 품을 수 있는 산.
그리고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 용의 핏줄. 상산의 주인.
왜 몰랐을까. 어찌 이토록 멍청했을까.
사내는 처음부터 산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이 혼란스러운 천하를 품을 수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산왕(上山王)……!’
마치 한 줄기 벼락이 정수리를 관통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들 모두는 감전당한 사람처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입을 벌린 채. 이를 악문 채. 주먹을 불끈 쥐고, 뜨겁게 달아오른 머릿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그러나 동시에,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를 떠올리며.
‘만약, 만약 상산왕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다면.’
이미 천심은 떠났고, 민심은 흔들린다.
그리고 과거 거대하고도 잔혹했던 숙청 속에서 살아남은 한 아이는 자신이 첫울음을 터트렸던 이곳으로, 황도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는 운명인가, 우연인가. 혹은 이미 한 번 천륜을 거스른 황제의 또 다른 흉계인가.
그도 아니라면…….
하늘이 내린 천명(天命)인가.
사람들은 감히 입을 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
이 거대한 충격을 자신들에게 던져준 장본인을 마주하기 위해.
하지만 다음 순간, 그 기대와 흥분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립 사내가 서 있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