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99
#898화
누군가 그랬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러나 이 세상 누구에게나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한 가지쯤은 있기 마련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그랬고,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누군가의 못생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냐.”
혁무진이 대답했다.
“조장님을 살펴보고 있었는데요.”
“왜?”
“출입도 금하시고 이틀 내내 방에 틀어박혀 운기조식만 하셨잖아요. 주화입마라도 온 거 아닌가 싶어서 슬쩍 들어와 봤죠.”
“이틀?”
“예. 설마 모르셨어요?”
“아니, 알았지.”
거짓말이다. 기껏해야 한나절쯤 지난 줄 알았는데 무려 이틀이라니.
어느새 햇빛이 비치는 창가를 바라본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다음부터는 그냥 놔둬라.”
“왜요?”
“눈 뜨자마자 네 얼굴 보고 주화입마 걸릴 뻔했으니까.”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심한 건 네 얼굴이야.”
“그럼 옆에만 있겠습니다. 호법은 필요하잖아요.”
“호법도 서지 마.”
“아니, 그건 또 왜요.”
“네 코골이 들으면 주화입마 오니까.”
“……이쯤 되면 그냥 제가 없는 게 낫겠네요. 계속 이러시면 저도 수틀려서 혼자 본가로 복귀하는 수가 있습니다.”
막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짐짓 으름장을 놓는 혁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왜요. 제가 뭐 조장님만 따라다니라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말과는 달리 살살 눈치를 보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내 주먹을 피하기 위해, 혹은 가장 덜 아프게 맞기 위해 몸을 한껏 움츠리고 있던 혁무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내가 헛것을 보나? 조장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뭐가?”
“아니, 이미 열두 대는 때렸을 사람이 성인군자처럼 웃고만 있으니까 그러죠.”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자리를 박차며 솟구쳤다.
쉭!
혁무진은 본능적으로 방어하려 했고, 찰나의 순간 보여 준 움직임은 아직 일류 고수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고 침착했다.
물론, 그 상대가 나라는 점에서 이미 실패한 대처였지만.
“흡.”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혁무진이 헛숨과 함께 질끈 눈을 감는다. 아마도 여느 때처럼 곧 들이닥칠 강렬한 충격을 대비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 마음의 준비가 무색하게도, 녀석이 예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툭.
평소처럼 후려갈기는 대신, 가볍게 뒤통수를 건드린 나는 짐짓 혀를 찼다.
“이 새끼 이거 지금까지 무공 헛배웠네. 누가 눈감으래?”
“……어?”
“처맞더라도 두 눈 부릅뜨고 있어라. 눈깔만 제대로 굴려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얼떨떨한 얼굴로 뒤통수를 문지르던 혁무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뭐가?”
“아니, 이상하잖아요. 평소라면…….”
“그래서, 평소대로 때려 줘?”
혁무진이 냉큼 대답했다.
“아뇨. 그건 좀.”
“그럼 입 다물고 있어. 전력 보존해 주는 거니까.”
“전력 보존이요?”
“그래. 안 그래도 곧 피 터지게 싸울 텐데 네 뒤통수 때려서 뭐 하냐. 그러다가 네가 눈먼 칼이라도 한 방 맞으면 괜히 꿈자리 뒤숭숭해져.”
혁무진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아. 그러셨구나. 그래도 조금 더 솔직해지셔도 되는데.”
“뭐?”
“다 압니다. 제가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까 조장님께서도 괜히 신경 쓰이신 거 아닙니까. 맞죠?”
뭐라 대답하려던 나는 그냥 실소를 흘렸다.
“그래, 인마. 눈치 빨라서 좋겠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조장님이라고 해도 저 같은 오른팔이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힘을 쓰죠.”
“오른팔은 무슨. 새끼발가락이라니까.”
“어허, 왜 이러실까. 오른팔도 저 나름대로 많이 양보한 겁니다.”
“양보?”
“예. 저만큼 충성하는 부하를 또 어디서 구해요. 이 정도면 사실상 오른팔이 아니라 심장이지. 심장.”
“심장은 어림도 없지. 불알 달린 놈 주제에 어딜 감히.”
“그럼 불알만 떼면 가능합니까?”
딱!
이번에는 어느 정도 힘을 실어 때렸는데, 어째서인지 억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감싸 쥔 혁무진의 얼굴은 되려 밝아졌다.
“크으. 이거지.”
“……어?”
“그래도 아직은 좀 부족한데. 더 세게 때려봐요.”
뭐지, 이 소름 끼치는 반응은?
내가 혁무진의 취향을 의심하고 있던 그때, 녀석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별건 아니고요. 평소와는 너무 달라서 좀 신경 쓰이지 뭡니까.”
“……!”
“어느 순간부터 고민이 많아지신 건 알겠는데, 다 잘될 겁니다. 그러니까 하던 대로 하세요. 늘 하던 대로.”
나도 모르게 순간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숨겨 두었던 마음속 진심이 끓어올라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안 돼.’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려 말할 수는 없었다. 괴물들이 즐비한 이 거대한 도박판에서 살아남아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을 아껴야 했으니까.
결국 내가 고민 끝에 끄집어낸 말은 하나뿐이었다.
“안 무섭냐?”
“네? 뭐가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상황. 그리고 곧 맞닥트려야 하는 그 알 수 없는 상황이.”
그리고 내 말을 들은 혁무진은 한참이나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당연히 무섭죠.”
“그런 것치고는 언행일치가 전혀 안 되는데?”
“무서운 거야 이미 익숙하거든요.”
“익숙하다고?”
“예. 그러니까 이게 뭐랄까. 전 항상 좀 겁이 많았어요.”
혁무진이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사랑을 동생한테 빼앗기는 게 무서워서 매일같이 울었고, 어느 정도 크고 나서 무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검을 잡는 것만으로도 덜덜 떨리더라고요. 태원진가에 들어오면서 좀 나아졌다 싶었는데 조장님과 함께하고 난 뒤부터는…… 진짜 매일 오줌 지릴 것 같았고.”
처음 듣는 이야기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혁무진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과거를 물어본 적이 딱히 없었다.
녀석이 삼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대형 포목점의 장남이라는 것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던 거지, 굳이 알려고 하진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평소였다면 진작 딱밤 한 대와 함께 끊어 냈을 이 장황한 이야기가, 오늘따라 묘하게 더 듣고 싶어진 것은.
“……그랬는데, 뭐 어쩌다 보니 조장님 옆에 철썩 달라붙어 있게 됐네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끝맺은 혁무진이 문득 나를 바라봤다.
“이게 다 조장님 때문이에요.”
“나?”
“예. 이건 뭐 귀신도 아니고, 매번 사지(死地)만 찾아가시잖아요. 그 과정에서 하도 단련되다 보니까 이젠 무서운데도 무섭지가 않더라고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래서, 많이 힘들었냐?”
“힘든 게 아니라 죽을 것 같았죠. 그런데 막상 죽진 않더라고요. 아니, 정확히는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조장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어요.”
이번에는 아닐지도 몰라.
입 안에 맴도는 그 한마디를, 나는 꿀꺽 삼켰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혁무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도 딱히 크게 무섭지 않아요. 얼마 전에 저와 홍 동지한테 해 주신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담담하더라고요.”
“왜, 이번에도 당연히 내가 구해 줄 테니까?”
“아뇨.”
“아니라고?”
“네. 그냥 문득 어떤 생각이 들더라고요.”
순간. 혁무진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이번만큼은 내가 조장님을 구해 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
“위험하다면서요. 조장님이나 적 대협도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사실상의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럼 이번만큼은 저 같은 하수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혁무진이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비록 한참 부족한 일류 나부랭이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데. 안 그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줄기를 움켜쥔 것처럼 숨이 턱 막혀서.
지금 입을 열면 나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는 실수를 할 것 같아서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환하게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저 따라 웃었다.
“그래, 이제야 좀 도움이 되겠네.”
“엣헴. 이번에는 저만 믿으십쇼. 이 혁무진이야말로 조장님의 오른팔이자 심장. 태원진가의 십상남자 아닙니까.”
과장된 움직임으로 제 가슴을 퍽퍽 두드리는 혁무진을 보며, 나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모든 고민을 털어냈다.
그리고 확신했다.
지금부터 내릴 선택은, 모두 옳은 것이라고.
“이틀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입가에 감돌던 웃음을 지워 낸 혁무진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중에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무림맹의 원군.”
“아, 당연히 기억하죠. 그런데 조장님께서는 도대체 어느 틈에 무림맹과 연락을 주고받으신 겁니까?”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고. 임무 하나만 하자.”
“저 혼자서요?”
“아니, 화룡각 전원.”
“전원이라면…… 조장님도 함께 가십니까?”
“나는 제외야. 물론 스승님도. 넌 남은 인원들을 이끌고 내가 알려 주는 장소로 가서 대기하면 돼.”
“그곳에서 무림맹의 원군들과 접선하는 겁니까?”
“그래, 짧으면 한나절. 길면 내일 안에 도착할 거야.”
감 잡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혁무진이 문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는 건 좀…… 조장님 몸 상태도 평소 같지 않으시잖아요.”
“물론 평소 같진 않지. 그래서, 평소 같지 않은 초절정 고수가 당장 피거품 물고 쓰러질까 봐 무섭냐?”
혁무진이 씩 웃었다.
“하긴, 뱁새가 천응(天鷹)을 걱정했네요.”
“보통은 천응이 아니라 황새일 텐데.”
“열화신룡이면 천응도 부족합니다. 어쨌건 제게 맡기실 임무는 그것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나는 대답과 함께 품에서 잘 접은 쪽지를 꺼내어 건넸다.
이미 이틀 전 준비해 두었던, 마지막까지 꺼낼까 말까 망설였던 물건이었다.
“나나 스승님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제약 없이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미행이 따라붙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거기 적혀 있는 목적지를 확인해.”
“이러니까 꼭 화룡각이 아니라 은영각이 된 기분이네요.”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 품에 잘 간직한 혁무진이 포권을 취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예?”
“몸조심해라. 너나, 다른 사람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혁무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녀석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졌을 때, 천천히 방을 나선 나는 아직 남아 있던 한 사람과 마주했다.
후욱.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숨결. 곰방대의 뿌연 연기 너머로 나를 바라보던 홍진이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혁 무인이 꽤 바빠 보이던데.”
“그럴 겁니다. 한 가지 임무를 맡겼거든요.”
“중요한 임무였나 보네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보낼 정도라면.”
“네. 그렇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끼익.
낡은 나무 의자가 비명을 내지른다. 우아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난 홍진이 희끄무레한 연기와 함께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위험한 도박판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을 테니까.”
“……!”
“그래서 진 공자, 준비는 됐나요?”
나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준비는 되어 있었습니다.”
잠시 후, 우리를 대연회장으로 데려가기 위한 황금빛 갑옷들이 전각 앞에 도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