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00
#899화
주위가 온통 황금빛으로 번쩍거려서 그런지, 나는 잠시나마 천하제일의 거부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슬프게도 현실과는 크나큰 괴리감이 있었지만.
철컥, 철컥.
아마 저 살벌한 금속음만 없었다면 조금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나와 홍진을 에워싼 채 걸음을 옮기는 금의위들에게서 는 그런 배려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배려를 바라는 게 미친놈이긴 하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실소와 함께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홍진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이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지금 쳐다보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죠?”
“음.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웃어서?”
“다행이네. 난 또 진 공자가 완전히 정신이 나간 줄 알았지 뭐야.”
“염려 마세요. 정신 줄 꽉 붙들어 매고 있으니까.”
이런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정신 나간 놈처럼 허허 웃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나.
벼랑 끝에 몰리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법이다.
머릿속의 모든 것이 지워지고, 오직 생존이라는 단어 하나만 오롯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나처럼.
“그 말, 믿을게요.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혼잣말처럼 뇌까린 홍진이 아직 꺼지지 않은 곰방대를 느릿느릿 빨아들였다.
후욱, 벌겋게 타오르는 불씨와 함께 뿜어진 새하얀 연기가 금의위들 사이로 흩어진다.
황궁 내에서, 그것도 곧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기를 앞에 두고 저 당당한 길빵이라니.
홍진의 배짱에 내심 감탄하고 있던 그때, 불현듯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속눈썹과 나른함에 젖어 가는 얼굴이 보였다.
후각에 와닿는 연기의 독특한 향기까지도.
‘생각해 보면, 홍진의 근처에만 가면 항상 저 냄새가 풍겼지.’
평소에는 그러려니 했다.
내가 무슨 금연 홍보대사도 아닌데 홍진이 곰방대 좀 물고 있다고 한들 이상할 것도, 만류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저 남자로서 지녀야 할 물건이 없으니 니코틴이라도 빵빵하게 채우는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묘한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기시감의 정체는 왠지 모를 익숙함이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온 직후. 바로 그날이었어.’
동시에 머릿속을 번뜩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
나는 천천히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홍진을 물끄러미 바다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나 보네요. 냄새만 맡았을 때는 영 아닌 것 같았는데.”
“그게 무슨. 아, 이거?”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홍진이 손에 쥔 곰방대를 가볍게 흔들었다.
“맛이랄 것까지야. 그냥…… 일종의 습관인 거죠.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물론 흡연이 몸에 안 좋은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현대의 기준에서는.
‘하지만 이 시대상으로는 딱히 배척받는 행위는 아니었을 텐데.’
이곳은 21세기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세상이지만, 여러 부분에서 상당히 흡사하다. 각 지방의 지명, 복색과 음식,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인식까지도.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흡연은 딱히 질이 나쁘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온갖 향락을 즐기는 높으신 분들의 주장으로 흡연이 장려되기까지 했다. 그나마도 담뱃잎이 비싸서 어지간한 양민들에게는 호사였지만.
‘그런데 바로 그 높으신 분인 홍진이 저렇게까지 말한다고?’
바로 촉이 온다.
뭔가 있다. 아직 내가 알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나는 홍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한번 피워 봐도 됩니까?”
“응? 피우겠다고요? 이걸?”
“네. 그냥 이참에 한 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어서요.”
대답과 동시에 시선을 마주친 그 짧은 순간, 홍진의 눈썹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하게 들썩였다.
그리고 그건 의중을 정확히 파악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희한하네. 내가 아는 무인들은 술은 곧잘 마셔도 앵속(罌粟)은 잘 안 하던데.”
“앵속이라면…….”
“양귀비의 진액을 모아 말린 거죠. 간혹 심경이 복잡할 때 피우면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뭔가 나른해지는데, 보통은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용도로 많이 쓰이지만 중독성이 강해서…….”
홍진의 뒷말이 메아리처럼 멀게 느껴진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한 단어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편!’
제아무리 학교 수업을 수면 보충쯤으로 생각했던 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상식 정도는 주입되어 있다.
특히나 열정적이었던 세계사 선생님의 걸걸한 목소리는 왔던 잠마저 달아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마! 진태경!’
‘흡. 에?’
‘너 인마. 지금 막 쌤이 뭐라고 했어. 눈깔 굴리지 말고 딱 말해.’
‘어. 그러니까 그게…….’
‘그렇지. 모르겠지. 니는 모를 수밖에 없지. 뒤에서 3교시 내내 처자고 있으니 이건 뭐, 호텔인지 학교인지…….’
‘아, 기억났는데요.’
‘뭐? 기억이 나? 그래, 꿈속에서 뭔 창의적인 개소리를 듣고 왔나 물어나 보자. 뭔데?’
‘마 진태경이요.’
‘…….’
‘아니……에요?’
‘아니, 맞는데. 맞긴 한데…… 하. 임마 이거 진짜 도라이네. 아편 전쟁! 아편 전쟁 얘기하고 있었는데 진짜 와, 돌아 뿌겠네. 따라 해라. 아편 전쟁!’
‘예? 아청 전쟁이요?’
‘아청…… 야, 반장아. 김민정이.’
‘네?’
‘지금 바로 경찰 불러라. 그냥 내 오늘 점마 조지고 폭력 교사로 잡혀 들어갈란다.’
다행히 경찰이 출동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고, 나는 울분에 찬 샤우팅을 들은 직후 아편 전쟁에 관한 단락을 깜지로 써 가는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흰 피부의 섬나라 짱깨가 진또배기 대륙 짱깨를 침략했다는 사실을 비롯한 각종 사소한 정보를 돌대가리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아편의 원료가 양귀비라 불리는 식물이라는 것도.
‘이게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나는 그 시절,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세계사 선생님에게 내심 감사의 뜻을 표했다.
덕분에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아편. 아니 앵속의 그 독특한 향…… 이미 맡아 본 적이 있어. 홍진의 것보다도 더욱 진하게.’
불과 며칠 전.
나는 분명 기시감을 느꼈었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무심코 지나쳤던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 조용히 들으세요.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홍진을 향해, 나는 입술을 달싹여 전음(傳音)을 흘려보냈다.
– 만약, 황제가 앵속을 한다면 무슨 이유 때문일 것 같습니까?
그날. 그 시간.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기시감의 첫 근원지는, 건청궁에서 맞닥트린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존재였다.
* * *
허.
가쁜 날숨과 함께, 사내는 불현듯 눈을 떴다.
어둠 너머로 은은하게 일렁이는 횃불과, 길게 드리운 형형색색의 얇은 비단이 가장 먼저 그의 시야를 채웠다.
‘이곳은…….’
모를 수가 없는 곳이다. 그가 지난 십여 년의 세월 중 대부분을 보냈던 침소이자 요새였으니까.
한동안 식은땀에 젖은 채 숨을 고르던 사내는 문득 입을 열었다.
“게 누구 없느냐.”
메마른 목소리가 울려 퍼진 그 순간.
스륵.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비단을 흔들었다. 그 사이를 파고든 한 줄기 전음이 사내의 귓가에 닿았다.
– 분부하십시오.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이와는 맞지 않는 깊게 팬 주름살 사이로 피로의 흔적이 느껴진다.
깨어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슴은 아직 세차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이미 해가 진 듯하구나.”
– 곧 술시(戌時)입니다.
“술시라, 하면 대연회는?”
– 예고했던 미시가 훌쩍 지나, 문무백관이 모두 모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그자도?”
그자.
대연회를 위해 모인 수많은 이들 중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기에는 퍽 모자란 지칭이었으나, 어둠 속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예.
“……의외로군. 제아무리 강호인들이 물불 안 가리는 이들이라고는 해도, 이건 터무니없을 만큼 무모해.”
혼잣말처럼 뇌까린 황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미 예견했던 일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그자의 스승도 남았겠군.”
– 그 역시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하온데…….
“계속하게.”
– 두 명을 제외한 다른 무림인들이 황궁을 이탈했습니다.
“이탈?”
– 그렇습니다. 파악하기로는 어떤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듯했는데, 더 이상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추적하지 못했다고?”
사내는 미간을 좁혔지만, 뒤이어 이어진 그림자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예. ‘그녀’가 직접 나서서 제지했습니다.
“……음.”
– 명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아니, 아니다.”
고개를 내저은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을 위한 침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광활한 그 공간에서, 그는 황금빛 수실로 아로새겨진 침의(寢衣)를 걸친 채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스륵. 툭.
부드러운 비단이 살을 스치며 바닥을 나뒹군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찰나에 엄습하는 한기(寒氣)에 몸을 떨었을 것이나, 홀로 우뚝 선 사내는 철탑처럼 굳건했다.
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휩쓸던 그때처럼.
십여 년 전의 그 날처럼.
그러나 여전한 기개와는 반대로, 스스로를 비춘 거울 속의 모습에서 과거의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늙었군. 몰라볼 정도로.’
사내는 마음속으로 뇌까렸지만, 그 안에 후회의 감정은 없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그가 선택받았을 뿐이다.
누구도 감히 고개 들어 쳐다보지 못할 만큼 눈부신 용포(龍袍)를 걸치고, 천자(天子)라는 두 글자를 허락받았을 뿐이다.
후회는 없었다.
불과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앞으로 가야 할 길만 남아있을 뿐.
“이제, 건청궁을 나서야겠다.”
그 한 마디에 그림자가 녹아든 어둠이 일렁였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하던 건청궁이 깨어났다.
아니, 그들은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사내를, 황제의 명령에 따라 죽고 죽일 모든 준비가.
그리고 활화산처럼 맥동하는 건청궁의 지붕 위에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오늘도 비가 오려나.”
소교(小嬌)는 양 옆구리에 매달린 애병을 매만졌다.
오랜만에 되찾은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안에 담긴 기운은 불처럼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 * *
대연회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광활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수많은 대소신료가 한자리에 모여 있음에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 모두가 장님이자 소경이었고, 말 못 하는 벙어리였다.
이미 모든 상황을 아는 이들은 조용히 지금까지의 삶을 반추(反芻)했으며, 모르는 이들은 대연회장을 잠식한 이 숨 막히는 기운 앞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누가 먼저 입을 열 것인가.
누가 먼저…… 칼을 뽑을 것인가.
모두가 같은 생각을 떠올린 그때.
“저기 오네.”
정적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다섯 시간 지각. 이거 맞냐?”
진태경의 시선 끝은, 일렁이는 횃불 뒤로 펼쳐진 어둠을 꿰뚫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서 한 마리의 용처럼 다가오는, 거대한 황금빛 행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