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03
#902화
아마도 대국 역사상 최초가 아닐까 싶다.
관직은커녕 호패도 들고 다니지 않는 강호의 무뢰배가, 무려 황제가 주관하는 대연회에서 조정의 고관대작들과 같은 자리에 앉은 것은.
‘최초인 동시에, 앞으로도 없겠지.’
이제 고작 삼 대째 이어져 내려온 짧은 역사를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
하지만 황실의 체면을 망가트리는 이 조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굳건한 신념과 용기를 지닌 극소수의 신하들을 제외한다면.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자를 가까이 앉히시는 이 조치는……!”
“황명이다.”
“……실로 옳으신 판단입니다!”
사실, 그 신념과 용기도 황제라는 이름 앞에서는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그 황제의 취미이자 특기가 숙청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별다른 방해 없이 더 풍성해진 반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쩝. 쩝쩝. 후루룩.
선명한 사운드와 함께 갖가지 음식을 흡입하는 내 모습에 주위 사람들의 동공이 파르르 떨린다.
특히 라면으로 단련된 신들린 면 치기를 선보였을 때는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허어어.”
“저런 천하의 상놈을 보았나…….”
“안 그래도 없던 입맛까지 사라지는 광경이군. 저기 보게, 창공 어른께서도 음식에는 손 하나 안 대고 계시잖나.”
마지막으로 들려온 누군가의 말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창공이 보였다.
음. 너무 심했나.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들게. 그나저나 그렇게 맛있나?”
창공의 침착한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확시히 마힛헤오.”
“그렇군. 하지만 우선 입에 든 것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
“에.”
입 안에 꽉 들어찬 음식을 꿀꺽 삼킨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맛있네요. 반찬 가짓수도 풍성하고.”
창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아들었네. 그렇게까지 귀가 어둡진 않거든. 그리고 본래 황실의 숙수들은 음식 솜씨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다네.”
“그런데 왜 안 드십니까?”
“딱히 식욕이 없어. 언제부턴가 그렇게 됐지.”
“흠. 그거 불행 중 다행이네요. 저 때문에 그러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말게. 젊을 적부터 이래 왔으니까. 다만 이제는 아무리 맛 좋고 귀한 산해진미를 먹어도 모래알처럼 느껴진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
내게서 시선을 뗀 창공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놓인 상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휠 정도로 잘 차려진 음식들을 보면서도 그의 손은 시종일관 가지런히 두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아니 시체처럼 창백하기까지 한 손.
바로 옆에 있음에도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창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 언제 시작할 겁니까?
그 순간.
우우웅.
집중하지 않는다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은밀하고 서늘한 기운이 주위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실로 대단한 솜씨.
빈틈없는 공력의 막으로 소리를 차단한 창공이 입을 열었다.
“신호를 주지.”
“제 생각에는 지금이 적기 같은데요.”
“소교라 불리는 그 여자가 상산왕 전하 곁에 머무르는 한, 섣부르게 경거망동할 수는 없네. 설령 황제의 목을 취하더라도 그분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갈 테니까.”
“확실히 그것도 그러네요.”
“더군다나 자네의 스승도 아직 대연회장 밖에서 대기 중이지. 화왕은 소교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야.”
“글쎄요. 제 판단으로는 창공 어르신께서도 제 스승님 못지않은 고수라고 생각됩니다만.”
“노부가 극심한 내상을 딛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던 건 회복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이라는 천운이 있었기 때문이지. 중요한 일일수록 확실히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 그렇겠지.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쉬고 있던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런 나를 마치 희한한 생물 보듯이 응시하던 창공이 문득 입을 열었다.
“꼭 며칠 굶은 사람 같군.”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이틀 동안 거의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자네쯤 되는 고수라면 그 정도 굶주림쯤은 감당할 수 있을 텐데.”
“굳이 감당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싸우기 전에는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떨리지는 않나?”
“떨립니다. 위장이.”
“확실히 스승을 닮아 보통 간담이 아니로군. 듣던 대로야.”
“따로 더 들은 이야기는 없으시고요?”
“그 나이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공이 고강하며, 어떤 위기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임기응변과 생존력이 뛰어나다고 하더군,”
“정확하네요.”
“많이 축약한 거지. 동창의 눈과 귀는 천하 곳곳에 깔려 있고 그들이 전해 오는 소식들은 매번 노부의 예상을 뛰어넘었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정보는 놀라웠지.”
“뭔지 여쭤봐도 됩니까? 천하의 창공 어른조차 놀라워하신 그 정보가.”
“무림맹의 지원군.”
“아하.”
“정말 예상치도 못했어. 무림맹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암천의 기습에 대처하기 위해 이미 대부분의 전력을 천하 곳곳에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천하의 명주답게 향긋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부드러운 목 넘김이 이어진다.
물론 당연히 동반되어야 할 취기(醉氣)는 그 과정에서 열양지기를 만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듣기로는 그자들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이능을 사용한다던데, 예비대를 편성할 여력이 있었나?”
“여력이 있으니 지원군이 온 것 아니겠습니까.”
“있으니 왔다…… 그래, 그렇겠지.”
창공이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그때였다.
“그만.”
웅혼하게 울려 퍼지는 황제의 한마디와 동시에, 대연회장에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음율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은.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이들도, 가라앉은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던 이들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억지로 연주와 춤을 이어 가던 악공과 무희들도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황제의 목소리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 대륙을, 향후 천년 간 이어질 대국을 이어받을 짐의 후계자가 오고 있나니. 모두 예를 갖춰 맞이하라.”
“……!”
“……!”
명백한 후계자 선포.
모두가 예상했지만, 한편으로는 설마 했던 그 상황을 맞닥트린 대연회장의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바쁘게 움직이는 머릿속과 달리, 그들의 몸은 어느덧 예법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팔두 마차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둥. 둥둥. 둥둥둥!
고수(敲手)의 힘찬 북소리에 맞춰 대기가 요동친다. 잔잔하게 끓어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발을 내디뎠다.
스륵.
화려하기 그지없는 붉은 궁장의 밑단이 지면을 스친다. 넙죽 엎드린 궁인의 등을 사뿐히 밟고 마차에서 내린 여인의 고혹적인 용모에, 어디선가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어.”
“이럴 수가.”
눈치 없는 짓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그만큼 여인의 용모는 실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사천성주가 그만큼 빠져들었겠지.’
나는 내심 중얼거리며 여인, 아니 애향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천성주의 애첩이었던 그녀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금의위의 철통같은 호위 아래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이던 그때, 나는 아직 닫히지 않은 마차의 문에서 뒤이어 내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얼굴.
하지만 여느 청년보다도 당찬 표정과 발걸음.
바로 상산왕 주표였다.
* * *
높게 이어진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는 상산왕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어린 왕에게, 어떤 첫인사를 건네야 할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 잘 지내셨습니까?
공간을 가로질러 도달한 내 전음에, 상산왕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피식 웃은 내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 제가 맡긴 물건은, 여전히 잘 지니고 계시고요?
잠시 멈췄던 걸음이 다시 나아간다. 상산왕은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손등을 덮은 옷소매를 펄럭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순간 언뜻 보이는 거무튀튀한 반지.
내가 만독지환(萬毒指環)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창공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 전하께서 아직 잘 지니고 계신 것 같으니.”
나는 놀라지 않았다.
창공은 아직 나조차도 엿보지 못한 영역에 도달한 고수. 전음을 훔쳐 듣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잃어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네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창공의 그 시선은 이내 다른 사람을 향해 옮겨 갔다.
‘소교(小嬌).’
그녀가 보인다.
조용한 걸음으로 상산왕의 뒤를 따르는 그녀가.
연검 대신 마치 곡도(曲刀)처럼 비스듬하게 휘어진 두 자루의 병기를 허리춤에 찬 소교는 정확히 나를 바라보며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봤나?”
창공의 물음에,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봤습니다.”
“자네를 향해 웃고 있더군.”
“그렇습니까? 저는 창공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착각일세. 조금 전의 그 시선…… 정확히 자네를 바라보고 있었어.”
“마 태감에게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어느 정도 안면이 있긴 합니다.”
“이유는 그것뿐인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천세(千千世)!”
조정의 대소신료는 물론, 물경 이천에 달하는 금의위가 대국의 후계자를 향해 힘차게 내지르는 함성이 온 사방을 떨어 울린다.
그것이 단지 장단을 맞추기 위한 목적으로 비롯된 것이든, 진심으로 이 상황을 축하하는 것이든 그들 모두는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고 그 거대한 환호의 중심에는 황제와 애향. 마지막으로 상산왕이 있었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는, 유일하게 만세를 부르짖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문득 자네의 생각이 궁금해지는군.”
창공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용서받지 못할 불경을 저질렀음에도, 왜 황제는 자네를 용서했을까?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기며 상산왕 전하를 축출할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좀 단순한 편이라서요.”
“단순하다라, 그럼 갑작스럽게 계획에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도 전부 자네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거고,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 자세히.”
“대계고 나발이고,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린 만큼 한 가지를 꼭 확인해봐야 했거든요.”
창공은 더 이상 황제가 서 있는 옥좌를 바라보지도, 그곳을 향해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다. 그는 꼿꼿이 허리를 편 채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확인은 끝났나?”
“예.”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달구어진 눈동자로 창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는, 상산왕이 위기에 빠지는 걸 원치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