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05
#904화
대연회장의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흥겹게 울려 퍼지던 풍악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요, 후계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끝없이 이어지던 천세 삼창은 비명과 고함으로 뒤바뀌었다.
마침내,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제 연회는 끝났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또 하나의 연회가 남아 있었다.
서로를 향해 웃음 대신 병장기를, 술 대신 피가 흩뿌려질 홍문연(鴻門宴)이.
그리고 이 참혹한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굉음이, 온 사방을 떨어 울렸다.
콰아아아앙!
지축이 뒤흔들리고 끔찍한 열기가 터져 나온다. 이글거리는 화염과 먼지구름 너머로 한 인영이 섬광 같은 속도로 튕겨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쐐애애액!
콰드득!
간신히 내디딘 발끝을 따라 두부처럼 으스러지는 지면.
세찬 파공성과 함께 쏘아지던 신형을 간신히 바로 세운 청년, 진태경이 어느새 입에 고인 핏물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한 수 위라 이거지…….”
속도, 힘, 완벽한 기습의 묘리까지 살렸음에도 명백한 격차.
진태경은 손에서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통증과 함께, 조금 전 자신이 일장을 뻗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전력을 다한 화염신장이 가슴에 적중하려던 그때, 열양지기를 가볍게 억누르며 전신을 뒤흔들었던 얼음장 같은 기운을.
‘도대체 뭐지?’
그건 어지간한 노강호에 비견될 만큼 숱한 견문을 쌓은 진태경으로서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기운이었다.
보다 원초적인, 단순히 음한지기(陰寒之氣)로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무언가.
하지만 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에는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보와 경험.
그리고 시간마저도.
저벅. 저벅.
대연회장을 잠식한 혼란 속에서도 선명히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강대한 열양지기의 여파로 인해 처참하게 녹아내린 지면을 산책하듯 가로지르던 창공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바로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다섯 걸음. 다섯 걸음이라.”
작게 뇌까리는 목소리에 탄성이 묻어나왔다.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에, 믿기지 않을 만큼 드높은 무위까지 도달한 무인을 향한 감탄이었다.
‘성치 않은 저 몸으로 노부를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게 만들다니.’
막상 겪어 보니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이유로 ‘그분’께서 진태경에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그 과정에서 서천마군과 남천마후라는 충복들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저 어린놈을 살려 두라 하시는지.
‘적이라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나, 아군이 된다면 머지않아 삼성(三星)조차 뛰어넘을 괴물.’
사로잡더라도 포섭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분.
천주(天主)를 뵙게 된다면, 그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힘을 한 번이라도 느끼게 된다면 그분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과거의 자신이 그러했듯이.
“천주께 데려가야겠군. 반드시.”
창공이 그렇게 뇌까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구를, 누구한테 데려간다고?”
스아아아.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반경 수십여 장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지면 위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너머로 다가오는 민머리의 중년인을 확인한 창공이 창백한 입술을 달싹였다.
“화왕(火王) 적천강.”
“노부의 존함을 어딜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이 불알 없는 놈아.”
“누가 사제지간 아니랄까 봐 언행이 쏙 빼닮았군. 제자가 스승에게 배운 것인지, 스승이 제자에게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천강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보통은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는 법이니라. 네놈처럼 뿌리도 없는 호로새끼는 모르겠지만.”
“뿌리라, 한때는 내게도 그런 것이 있었지. 가족과도 같았던 스승과 사형제들도.”
“그렇군. 그럼 멀쩡한 불알을 자르는 것도 네놈 스승에게 배운 게냐?”
“아니.”
창공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지. 그런 스승님의 말씀을, 나는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다.”
“네놈에게 무슨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르침이고 나발이고 더는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게다.”
적천강이 주먹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이거 한 방 맞은 놈들은 전부 그렇게 됐으니.”
그리고 주위를 힐끗 둘러보며 덧붙였다.
“뭐, 굳이 노부가 아니어도 네놈을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것들은 널리고 널린 것 같지만.”
적천강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무려 이천에 달하는 금의위.
하나같이 초일류에서 절정의 무위를 지닌 대국 제일의 정예군이 그들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었으니까.
그뿐인가.
황제와 황실을 수호하는 금의위보다는 한 수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역시 정예라고 부르기에는 손색이 없는 금위군들까지 뒤늦게 합류하여 대연회장의 외벽을 점령하여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물경 오천에 달하는 머릿수.
일군(一軍)이라 칭하기에 일말의 부족함도 없을뿐더러, 그 병력의 질은 가히 십만 대군과도 비견될 정도.
그러나 창공은 담담하게 사방을 둘러싼 무수한 창칼과 화살촉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어깨너머, 높게 솟은 단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목줄 풀린 사냥개들은 죽을 자리도 못 알아보고 날뛰는데, 약아빠진 주인은 뒷전에 앉아 구경만 하는군.”
언제나 그랬듯이.
작게 덧붙인 창공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불현듯.
뚝. 하고 끊어진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거대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쳐라-!”
콰아아아!
음성에 실린 미증유의 공력이 대연회장을 뒤흔든 그 순간.
푹! 서걱!
금의위 중 하나의 가슴 위로 눈부신 검신이 솟아올랐다. 고통도 잊은 채, 황금빛 갑옷을 관통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 도대체 왜…….”
부릅떠진 눈동자에 서린 것은 경악인 동시에 불신이었다.
빠르게 죽음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그는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왜, 어찌하여 이토록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인지.
십 년이 넘도록 호형호제했던 동기가 왜 뒤에서 자신을 찔렀는지.
“크륵. 도, 동 형?”
왜일까.
어째서일까.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의형제로 여기겠다고 했다.
함께 격려하고 의를 다지며 이 나라와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자고 수십, 수백 번도 넘게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핏물을 참으며 토해 낸 그 외마디 부름에 돌아온 대답은, 지난 십 년간 들어 본 적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천상천하(天上天下). 만마앙복(萬魔仰伏).”
“……!”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콰득.
비틀어 내며 뽑히는 검신과 함께 혼이 떠난 육신이 나동그라진다.
곳곳에서.
푹!
온 사방에서.
서걱!
수도 없이.
촤아아악!
깔끔하게 베어진 목이 지면으로 굴러떨어지고, 잘려 나간 사지와 핏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천에 달했던 금의위 중, 물경 수백의 목숨이 그렇게 찰나지간에 사라졌다.
상관. 수하. 혹은 형제처럼 아꼈던 자신들의 동료에 의해서.
“……!”
“……!”
사방에서 먹먹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배반한 자와 배반당한 자.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가 서로를 향해 얽혀들었다.
카카카캉!
서걱! 푹!
끄아아아악!
메아리와도 같은 비명과 함께 어둠 속에서 번갯불과도 같은 검광(劍光)이 쉴 새 없이 번뜩인다.
횃불을 들고 있던 누군가의 손이 피 웅덩이에 잠겨 꿈틀거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이 끔찍한 난전(亂戰) 위로, 또 다른 어둠이 덧씌워졌다.
솨아아아아.
그 소리를 들은 누군가는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고, 죽음을 기다리며 헐떡이던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리움 속 고향의 드넓은 평원을 떠올렸다.
저 멀리서 불어온 세찬 바람이 평원을 휩쓸면 꼭 이런 소리가 났었으니까.
잘 익은 곡식과 풀이 허리를 굽히고, 마을 잔치가 벌어졌던 커다란 거목(巨木)은 풍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름 모를 그는 깨달았다.
‘아.’
하늘 위로 덧씌워진 어둠이,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혹은 그들이 충성을 바치는 황제를 향해서 공간을 뒤덮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쿨럭.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을 내뱉으며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었는데.
내가 고향을, 가족을 떠난 이유는 이렇게 허무하기 죽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그는 멍하니 짓쳐 드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이 끔찍한 통증과 절망을 끝내줄 죽음을 기다렸다.
그리고 보았다.
화륵, 콰아아아!
어둠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화염을.
무수한 화살들을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불태우는 그 압도적인 열기 속에서, 먹이를 낚아채는 한 마리의 매처럼 지상으로 낙하하는 한 청년을.
콰앙!
분명 천둥 같아야 할 굉음이, 수백여 장은 떨어져 있는 것처럼 흐릿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그는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생각했다.
저 청년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살려 달라는 그 한 마디가,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그 짧은 부탁이 왜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못하는지.
눈앞에 드리워지는 어둠 속에서, 그는 다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화살 비를 불태우는 화염과 청년이 움직일 때마다 짚단처럼 쓰러져 가는 배신자들을.
자신과 같은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전투를 시작한 두 존재를.
쾅! 쾅! 콰아아앙!
뜨거운 열기가. 몸서리치는 한기가.
쉬지 않고 사방을 물들이는 화염과 새하얀 섬광이 밤을 불태우고 얼어 붙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피를 흩뿌리며 쌓여 가는 수많은 시체를 장작으로 삼아.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더 긴 고통을 느껴야 했던, 불행한 누군가의 목숨을 제물 삼아.
하지만 그 끔찍한 기다림 끝에서, 이름 모를 금의위는 잠시 잊고 있던 청년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진태경. 그래, 진태경이었어.’
희한한 일이었다.
피 웅덩이에 잠긴 채, 시산혈해의 한 가운데에서 죽어 가는 와중에도 그는 조금의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따뜻하다.’
번뜩이는 창칼 사이로 넘실거리는 화염을 바라보던 그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떠올리며.
* * *
호사가들은 말한다.
초절정 고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흐르는 세월과 스스로의 방심뿐이라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호사가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럼 니들이 싸워 보든가.’
초절정 고수도 어차피 피륙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뭣 모르는 놈들의 시선에는 수백, 수천의 적도 쓰러트리는 초인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한계는 있다.
그 수백, 수천 명 중 최소 절반 이상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더더욱.
쉬릭, 촥!
누군가 뻗은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볼을 스치듯 지나간다. 창날에 담긴 공력에 의해 베어져 나가는 살갗은 기본 옵션이고, 그놈에게 되돌려 주는 주먹은 보너스다.
퍼엉!
화염신장에 가슴을 가격당한 금의위, 아니 암천이 심어 놓은 배신자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튕겨 나갔다.
볼 것도 없는 즉사.
그러나 빈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로 채워졌고, 그들의 움직임은 한층 신중하면서도 기민해졌다.
‘제기랄.’
차라리 무림인이라면 훨씬 상대하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무인인 동시에 군인이었다. 무공의 강력함과 군대로서의 규율을 지닌 집단.
서걱, 푹!
누군가의 손에서 빼앗은 창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사방을 에워싼 적들의 어깨너머를 노려보며.
‘도대체 왜!’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었다.
왜 돕지 않느냐고.
이런 급박한 상황까지 왔음에도 왜 모든 것을 방관하느냐고.
내 시선이 향한 방향의 끝에는 황제가 있었다. 망부석처럼 그 곁을 지키고 있는 백연과 소교의 모습도 함께.
그리고 지금, 막 한 사람이 추가됐다.
난데없이 시야에 끼어든, 결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슈확!
예리한 파공성과 동시에, 주위에서 분전하고 있던 십여 명의 금의위가 움직임을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떠진 눈.
하지만 냉정한 현실을 알려 주듯이 그들의 목 위로 점점 진하게 드러나는 희미한 혈선(血線).
꾸륵, 촤아아악!
몽글몽글하게 맺혀가던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썩은 고목처럼 쓰러지는 신형들을 스쳐 지나온 그가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랬나. 그저 믿고 따라왔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수 있었을 텐데.”
옆집 똥개도 알아들을 개소리를 지껄이는 마삼보를 향해, 나는 대답 대신 창날을 내리그었다.
솨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