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08
#907화
마삼보와의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힘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내가 지금껏 헤쳐 지나온 수라장 속에서, 놈보다 훨씬 더했던 강적들은 지금 당장 헤아려 보더라도 몇 명이나 더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마삼보가 나보다 강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평소보다 약했던 거겠지.’
시스템은 사실상 봉인당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일섬의 여파로 망가진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마삼보가 저지른 실수는 사소했지만 치명적이었다.
자신 스스로를, 나보다 한 수 위의 강자로 착각했다는 것.
“날 사로잡을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죽일 각오로 덤볐어야지.”
나는 공허해진 마삼보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그리고 놈의 목줄기를 관통한 단창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퍼걱, 콰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살갗을 뚫고 튀어나오는 뼛조각.
정확히 경동맥(頸動脈)을 끊고 쇄골을 따라 심장 어림까지 밀어 넣은 뒤에야 단창에서 손을 뗐고, 그제야 비로소 자유를 되찾은 마삼보의 몸뚱어리는 천천히 기울었다.
마치 나무 뿌리처럼 몸속 깊숙이 심어진 단창 한 자루와 함께.
쿵, 철벅.
비록 적을 처치했다는 시스템 메시지도, 특유의 맑은 종소리도 없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드디어 한 놈.’
피 웅덩이에 잠긴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시체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이던 나는, 공력을 실은 외침을 토해 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이, 동창 병필태감 마삼보를 죽였다!”
그리고 그 외침의 의미를 모두가 이해하기도 전에,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쉭, 퍼걱!
움직임은 짧고 간결하게. 최소한의 공력만을 담아서.
피하고, 때리고, 부쉈다.
콰직!
천상천하 만마앙복. 이제는 듣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 그 여덟 글자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놈의 안면을 으스러트린 순간.
쐐애액!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이목구비와 함께 허물어지는 시체의 좌우로 날아드는 칼날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캉!
한 뼘 차이로 스쳐 지나간 두 개의 칼날이 서로를 향해 부딪친다. 나는 귓가로 전해지는 진동을 무시하며 갈기갈기 찢어진 손아귀를 뻗었다.
퍼엉!
뜨겁게 달아오른,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간다.
고작 삼성(三成)의 공력을 담아 펼친 화염신장이었지만, 그 일장에 실린 힘과 열기는 어지간한 절정 고수조차 단번에 절명시킬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커헉……!”
검붉은 핏물을 흩뿌리며 튕겨 나가는 신형.
하지만 저 이름 모를 적의 생사(生死)는 이미 내 관심을 떠났다. 그가 남긴 다른 무언가라면 모를까.
턱.
이미 주인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검자루를, 나는 부드럽게 잡아채는 동시에 휘둘렀다.
쏴아아악!
공간이 갈라진다. 검신을 휘감은 화염이 대기를 달구고 살과 뼈를 태운다.
단순하지만 쾌속하게. 동시에 막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그리고 그 끝에, 적들의 피와 비명이 있었다.
푸화악!
“크아악!”
나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뒤집어쓰며 전진했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무수한 날붙이의 파도를 피하고, 튕겨 내고, 이내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검이 부러진다면 창으로. 창이 꺾인다면 도끼와 비수로.
그것마저 없다면 강철보다 단단한 팔과 다리로.
으드득!
꽈앙!
막아서는 모든 적들의 뼈를 부수고 살을 짓이겼다.
그 과정에서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꺼낼 필요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병장기는 보다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탄생된 것이고, 무공의 존재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찌르고, 베고, 타격하고.
내가 정의한 무공이란 수많은 점(點)과 선(線)의 연결이다.
목숨을 걸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적을 죽일 수 있다면 병장기의 형태는 중요치 않다.
바로 지금처럼.
콰드드득!
기이한 각도로 목이 꺾인 시체가 허물어진다.
죽이고 또 죽여도 끝없이 앞을 가로막은 적들의 입술은 쉴 새 없이 주문 같은 단어를 읊조리고 있었지만, 나는 놈들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
후욱, 후.
나는 흘러나오려는 거친 숨소리를 애써 억눌렀다. 전신의 근육이 감전된 것처럼 욱신거렸고, 마삼보의 검을 붙잡았던 손은 이제 고통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미친 짓을 벌였으니, 아마도 끔찍한 꼴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무리 지어 사냥하는 늑대들은 아무리 굶주려도 포효하며 달려드는 사자에게는 이빨을 드러내지 못한다.
놈들이 사자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으려 하는 것은, 그 사자가 뒷걸음질 쳤기 때문일 것이다.
철벅.
무겁게 앞으로 내디딘 발걸음에, 발목까지 고여 버린 핏물이 출렁인다.
어느덧 내 몸 곳곳에 아로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들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처럼, 밤에 비친 핏물은 검붉었다.
‘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어림잡아 일백은 넘게 쳐 죽였음에도 시야를 가득 메운 적들이 보인다.
최소 초일류에서 절정의 끝자락까지 도달한 대국의, 아니 암천의 정예들.
개개인의 무위는 물론, 광신도처럼 천주를 섬기는 저들을 모두 쓰러트려야만 그곳으로 향할 수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어쩌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전투를 이어 가고 있는 적천강의 곁으로.
‘빌어먹을.’
모르겠다.
황제의 도움 없이도 승기(勝機)를 잡아가고 있는 이 와중에도, 왜 가슴 한구석이 불안하게 떨리는지.
먹구름 가득한 밤하늘이 왜 저렇게 불길하게 느껴지는지.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끝이 아니야.’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보이지 않는다. 황제의 곁을 지켜야 할 살수들이, 건청궁의 수문장 역할을 하던 두 쌍둥이 초절정 고수도.
심지어 이 대연회장에 있는 금의위의 숫자조차 내가 아는 것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창공 역시 마찬가지지.’
황제와 창공.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두 사람은 아직 모든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수를 감추고, 상대가 먼저 수를 내보이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설령 지금쯤 황도 전체가 절반으로 나뉘어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시발.’
개 같은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싸워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 비 아래에서 달려드는 암천의 개들에게서도. 그리고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모를 황제와 소교에게서도.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높게 세워진 연단을 바라보았다.
백연과 소교.
단번에 이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두 초절정 고수를 좌우로 거느린 채, 전장을 주시하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몇 안 되는 궁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애향과 어째서인지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 왕의 모습도 함께.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그 순간, 하늘을 가로지른 무수한 파공성이 뒤늦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쉬쉬쉬쉬쉭!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짙은 어둠.
오직 나 한 사람만을 노리고 쏘아진 수백여 개의 화살촉이 번뜩인 동시에, 머릿속에 든 붉은색 경종이 세차게 울렸다.
‘젠장.’
움직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저 화살들을 전부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이미 나는 지쳤고, 육신과 감각은 굼떠졌으며, 일류 고수들이 공력을 실어 쏘아낸 저 수많은 화살을 모조리 피하기에는 너무나도 개방된 공간에 동떨어져 있었다.
‘최소한의 힘을 이용해서, 치명상만 피하는 수밖에.’
이를 악문 나는 바닥에 꽂혀 있던 주인 잃은 창을 뽑아 드는 동시에, 남은 한 손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주위를 에워싼 공기가 파르르 떨린다.
최대한 체력을 아끼기 위해 전투 중에도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사용을 자제해 왔던 중단전(中丹田)이었지만, 지금은 쓰고 달고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써도 삼켜야 한다.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고작 여기에서 허무하게 쓰러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귓가를 찢는 듯한 맹렬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화살을 향해 주먹을 그러쥐려던 그 순간.
“귀갑(龜甲)! 방(防)!”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섬광 같은 속도로 들이닥친 일단의 무리가 주위를 에워쌌다.
커다란 방패를 앞세운 채.
터터터텅!
불똥이 어둠 속을 선명히 밝힌다. 꺾이고 부러진 무수한 화살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들이닥친 두 번째 화살비를 향해 수십여 개의 언월도(偃月刀)가 번뜩였다.
“참(斬)!”
쉬쉬쉬슁, 서걱!
반월의 형태로 뻗어 나간 도기(刀氣)가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일종의 막을 형성한 그 강력한 기운은 쏘아진 화살들을 모조리 베어 부수었고, 조각 조각난 파편들은 그들이 걸친 황금빛 갑옷의 틈새를 파고들 수 없었다.
촤륵, 투두두둑!
힘을 잃고 떨어지는 무수한 파편들.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깊게 눌러쓴 투구 아래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금의위 천호. 정호군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알았나?”
“사실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
“그럴 것 같았다. 물론 애초부터 기대도 안 했지만.”
“그러는 넌?”
“빚을 진 경우라면 고맙다고 하는 편이지. 지금처럼.”
철컥.
정호군이 황금빛 갑주를 두드리는 군례(軍禮)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정중한 말투로.
“고맙소. 폐하를, 우리를 도와줘서.”
“……허.”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겠지. 하지만 그 일은 모든 것이 끝난 뒤로 미뤄 뒀으면 하오.”
빌어먹을.
말도 꺼내기 전에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할 말이 없어진다.
작게 혀를 찬 나는,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적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야, 하나만 묻자.”
“무엇이든지.”
“저기서 관음 중인 저 인간, 아군은 맞냐?”
관음이라는 단어에서 움찔한 정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황제 폐하께서는, 그렇소. 우린 아군이오.”
적어도?
구태여 앞에 붙인 그 세 글자의 의미를, 나는 즉각 알아차렸다.
‘소교는 아니라는 거군. 아니, 정확히는 이놈도 모르는 거겠지.’
틀림없다.
이제는 산 사람이 아니게 된 마삼보도, 심지어 창공조차도 모르는 듯했으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여자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불확실성은, 곧 위험을 의미한다.
‘……시바. 애들 떼놓고 오길 잘했네.’
내심 중얼거린 나는 조금 전 손에 넣은 주인 없는 창을 들어,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들을 향해 겨누었다.
지금쯤 오지 않을 무림맹의 원군을 기다리며, 안전한 곳에서 머무르고 있을 화룡각 대원들을 떠올리며.
나중에야 앵무새처럼 조장님을 외치며 난리를 피우겠지만, 그래도 여기에 남아 있었다면 진작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조장니임!”
“……?”
“조장니이이임!”
뭐여, 시벌.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돌아선 나는,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조장니이이이임!”
정확히는 화룡각 대원들의 선두에서 고래고래 외치는 혁무진과.
두두두두두!
그 뒤를 꼬리처럼 달라붙은 무수한 검은 인영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