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10
#909화
허억,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긴장된 상태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인 팔다리가 남의 것처럼 삐걱거렸고,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죽어라 내달리는 와중에도, 혁무진은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이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는지.
하지만 항상 그래 왔듯이 의문에 대한 답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끝도 없이 이어졌고, 결국 그 종착지에는 자조 섞인 한마디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시바, 그냥 태어난 것부터가 실수였나.’
혁무진은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포목점 아들놈이 왜 무인이 된다고 염병을 떨었을까. 얌전하게 가업이나 물려받으면 됐을 텐데.
날고 기는 무림인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잡서(雜書)만 읽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도 두셋쯤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처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이상한 놈들에게 쫓기고 있지는 않겠지.
두두두두!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추격자들의 육중한 발걸음 소리에, 혁무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빌어먹을. 붙잡히면 끝장이다.’
저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괴물 같은 놈들. 아니, 괴물들.’
혁무진의 판단은 단순히 무공의 고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저 흑의인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느꼈던 오싹함, 원초적인 공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지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정체가 뭐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해결할 수 없는 의문.
그리고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던 몸뚱어리는, 혁무진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스륵.
“……!”
순간 맥없이 풀려 버린 다리.
달려 나가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신형에, 혁무진이 눈을 부릅뜬 그때였다.
“혁무우우우!”
덥석.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억센 힘이 옷깃을 잡아챈다. 하마터면 땅으로 처박힐 뻔한 혁무진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들었다.
쿵. 쿠웅!
그의 몸을 마치 짐짝처럼 옆구리에 낀 채 뛰고 있는 거인, 아니 태산의 얼굴이 보였다.
“혁무. 괜찮나?”
혁무진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대답했다.
“아니, 전혀 안 괜찮아.”
“응. 그래 보인다.”
“……알면서 뭘 물어보냐. 지금 사람 놀려?”
“혁무. 그게 생명의 은인에게 보일 만한 태도인가?”
“그건 아니지. 일단 고맙다.”
“고마우면 나중에 오향장육 백 그릇으로 갚아라.”
“백 그릇이 아니라 이백 그릇도 사 줄 수 있으니까 우선 살고 보자. 살고.”
“이백 그릇?”
미간을 좁힌 태산이 문득 걸음을 늦추며 중얼거렸다.
“이백 그릇이 어느 정도지?”
태산의 듬직한 양쪽 어깨 위를 차지하고 있던 남호와 신의. 그리고 어쩌다 보니 한 몸이 되어 버린 혁무진이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보았나! 왜 갑자기 속도를 늦추고 지랄이냐!”
“태산 소협! 지금 이럴 때가 아니오!”
“뭐 해, 미친 새끼야!”
하지만 불꽃과도 같은 성화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맞이한 태산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백이라는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이런 시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남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후위를 맡은 다른 이들과 그 뒤를 바짝 쫓는 흑의인들의 모습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그냥 대답해 주십시오! 보아하니 대가리가 깨져도 대답을 들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어서!”
신의의 다급한 부탁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남호가 외쳤다.
“백 그릇! 백 그릇이 두 번 나오면 몇이냐!”
“으음. 백 그릇이 두 번이면…… 아. 태산이, 이제 알았다.”
마침내 답을 찾은 태산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 둘.”
“야, 이 개새끼야!”
“이 시벌 놈아!”
“아아, 스승님……!”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곡소리.
분노의 임계점에 도달한 남호는 태산의 돌대가리를 팔꿈치로 내리찍었고, 혁무진은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으며, 신의는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며 소매 안의 대침(大針)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나 열렬하게 반응하는 그들과 달리, 이백 그릇이 어느 정도의 단위인지 나름대로 답을 찾은 태산의 얼굴은 정오의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백 그릇. 많다. 아무튼 엄청 많다!”
백 그릇만으로도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는데, 이백 그릇이라니.
사실 이백과 백 둘의 정확한 차이점은 모르겠지만, 태산은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아직 전해 듣지 못한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흔들었다.
“각주! 각주우! 태산이 오향장육 먹는다! 혁무가 백둘? 이백? 아무튼 배 터지게 먹여 준다고 했다!”
“배 터질 걱정은 하지 말거라. 그 전에 노부가 하늘에 맹세코 네놈 대가리를 터트려 버릴…… 잠깐, 지금 뭐라고?”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하염없이 태산의 정수리를 내리찍던 남호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남호가, 신의가. 혁무진이. 뒤따라오던 화룡각 대원 모두가.
쐐애애액!
세찬 파공성과 함께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누군가를. 그의 발끝에서 터져 나오는 익숙한 화염을.
“아이고오! 조장니이이임!”
혁무진이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 * *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한다.
대격변 이전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몬스터와 헌터의 존재가 그러할 테고, 내게는 캡슐을 통해 알게 된 이 세상이 그랬다.
그리고 앞서 들었던 예시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도 충분히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오향장육! 백둘! 이백!”
광기에 가까운 환희로 물든 태산이.
“당장 이놈을 죽여! 자네라면 능히 이 육시랄 놈의 대가리를 깰 수 있어!”
광기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의 분노를 뿜어내는 남호.
“어흐흑. 조장니이임! 왜 이제야 오셨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안도와 함께 펑펑 울어 재끼는 혁무진.
“아아, 스승님…… 이 못난 제자가 그릇된 마음을 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처조차 여래신장으로 날려 버릴 것 같은 해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신의까지.
“…….”
뭐여, 시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힌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고, 이내 이해하길 포기했다.
물론, 이 상황에서는 이해할 만한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이었겠지만.
파파팟!
“각주님! 아니, 진 공자! 아니, 은인!”
짧은 순간 세 번이나 호칭을 바꿔 부르는 신기를 선보인 주화란이 엉망이 된 옷차림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뒤에서 미친 듯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추격자들을 뿌리치고 있는 송일섬과 사마표의 모습도.
카카캉!
서걱!
은은하게 빛나는 검기가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핏물로 보이는 액체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참을 수 없는 악취도 함께.
‘뭐지, 이 냄새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며 속이 메슥거릴 정도다.
하지만 저 냄새의 정체를 곰곰이 유추해 볼 시간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추적자들을 뿌리치며 가까워지는 세 사람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 신호를 보내면, 모두 엎드려.
그리고 제각각의 귓가로 흘려보낸 전음(傳音)과 함께, 체내의 모든 공력을 끌어모았다.
스아아악.
나는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열기를 전신의 사지백해로 흘려보냈다.
아직 성치 않은 혈도가 비명을 지르고, 전투 과정에서 입은 크고 작은 부상이 더욱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해야 한다.’
우우웅.
석벽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어느 이름 모를 금위군에게서 빼앗아 온 철창이 열양지기를 머금고 부르르 떨린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창날 위로는 도무지 예전 같지 않은, 그러나 그 위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청백색의 화염이 뒤덮여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륵.
창날을 휘감으며 솟아오른 겁화가 공기를 태우고 어둠을 잡아먹는다. 아무런 비명도, 외침도 없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들을 향해 몸집을 부풀렸다.
양 떼를 향해 달려 나갈 준비를 마친 한 마리의 맹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뜨겁고. 맹렬하게.
– 지금.
세 사람을 향한 전음과 함께, 나는 세상을 베어 가를 듯이 온 힘을 다해 창을 휘둘렀다.
마치 끝없이 뻗어 나가는 용의 꼬리와 같이.
‘열화신창 일초식.’
화룡일미(火龍一尾).
화아아악!
그 순간, 온 사방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마침내 창날을 타고 뛰쳐나온 청백색의 화염은 황궁 곳곳에 놓인 조형물을 불태우고, 녹이며 나아갔다.
마지막 순간, 내 전음을 듣고 반 박자 빨리 엎드릴 수 있었던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또한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던 흑의인들의 시야를 뒤덮으며.
콰아아아아아!
구구구궁!
거대한 폭발과 굉음. 마지막으로 진동.
섬광이 번뜩이고, 부풀어 오른 화염이 비가 되어 반경 수십여 장을 뒤덮는다.
그야말로 화마(火魔)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광경.
그리고 비명조차 들려오지 않는 그 불구덩이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뚫고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파팟!
주화란. 송일섬. 사마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한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아니, 사실 흐릿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기울어져 가는 내 시야일지도 몰랐다.
턱.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최대한 자연스럽게 창을 바로 세워 몸을 지탱한 나는 가빠진 호흡을 억눌렀다.
‘……젠장.’
살아 있는 뱀처럼 스멀스멀 전신을 기어오르는 탈력감이 느껴진다.
비록 불안정할지언정 충만했던 공력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고, 안정을 취했어야 할 육신은 무리한 움직임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정신적인 피로까지.
‘중단전(中丹田)의 힘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었는데…….’
사실 이 모든 게 의미 없는 후회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힘을 더 자제했다면 지금 정도의 몸 상태는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전체적인 상황이 나아졌으리란 보장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저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위기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곳으로 돌아온 화룡각 대원들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은인!”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주화란이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그녀의 양옆에서 나란히 다가오던 송일섬과 사마표 또한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모두 도망쳐야 한다.”
“지금 당장!”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전력을 다한 일격이 선두를 휩쓸었다고는 해도 남아 있는 적들의 숫자는 언뜻 보기에도 일천이 넘어갔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개개인의 실력도 결코 녹록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 광경을 확인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왜 그들이 이토록 다급하게 말했는지.
그리고 왜 마삼보가 그토록 반란의 성공을 자신했었는지.
“저건…….”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흐릿한 신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