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11
#910화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헌터라는 특수 직업군에서 몇 년 정도 구르다 보면 어지간한 상황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된다.
몬스터의 몸뚱어리에서 풍겨 오는 끔찍한 악취? 그 정도는 애교다.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누군가의 사지가 잘려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게임이나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보게 된다면.
더불어 그 누군가가 나 자신, 혹은 내 동료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온갖 잔인한 광경을 밥 먹듯이 지켜보다 보면 모든 신경과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하고,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헌터가 된다.
바로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제법 잔뼈가 굵은 나조차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뱃속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을 수 없었다.
“저건…….”
도대체 뭐지?
그 뒷말은 차마 소리 내어 내뱉지도 못했다.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을 꾹 다물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단 나 혼자뿐만이 아니었다.
“우욱.”
가장 먼저 허리를 굽힌 주화란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는다.
용봉표국의 후계자로서 또래의 후기지수들보다 훨씬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녀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은 구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당장 온갖 수라장을 헤쳐 온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일그러진 얼굴로 간신히 구역질을 참고 있었으니까.
“이게, 이게 무슨……?”
신의가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노 의원의 눈동자에는 숨기지 못한 경악과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을 들여다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눈앞의 광경과 함께.
칙. 치이익.
불과 십여 장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끔찍한 악취가 콧속을 파고든다.
그리고 남아 있는 화염의 잔재와 검게 그을린 잿더미 속,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형체들이 있었다.
– 끄으. 그어어.
비명도, 그렇다고 언어도 아닌 목소리.
녹아내린 입술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뱉던 흑의인, 아니 이제는 ‘그것’이라고 불러야 할 존재들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일말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몸 상태가 어떤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득, 푸스스.
이미 한 차례 휩쓸고 간 열양지기에 의해 검게 그을렸던 팔이, 다리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부서지고 재가 되어 흩날린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그것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워……?
왜 몸이 움직이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몸짓을 보며, 나는 등골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움직인다고? 그 정도의 일격에 당하고도?’
물론 저들 전부가 내 공격에 휘말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장 선두에 있던 백여 명의 흑의인들은 창날에서 쏟아진 화염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그 끔찍한 열기를. 열양지기로 이루어진 막강한 일격을.
그것이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랬기에, 더욱더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절명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니 오히려 살아남을 수 없는 위력이었을 텐데.’
비록 그리 좋지 않은 몸 상태였지만, 전력을 다했다.
남아 있던 공력 중 대부분을 쏟아부었고, 스스로도 확신이 있었다. 이 일격으로 최소한 저들 중 일 할은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선두의 백여 명 중 자그마치 절반에 달하는 인영들이 한때 동료였던 잿더미를 짓밟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무언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형태로.
“……미치겠군.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정마대전이라는 끔찍한 역사를 몸소 겪었던 남호의 침음성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지만, 나만큼은 예외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그들이 모르는 또 다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죽음은 세상 모두에게 공평한 법이다.
초절정 고수도 삼류 칼잡이처럼 병장기에 베여 죽고, 저것들처럼 살갗이 녹아내리고 내장이 타들어 가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놈들은 살아남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어떤 비명이나 동요도, 심지어 당연히 느껴야 할 고통조차 보이지 않은 채.
‘이건.’
그때였다.
도저히 믿기 싫은, 그러나 자연스럽게 떠오른 한 단어가 벼락처럼 뇌리를 관통한 것은.
곧이어 멍하니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 것은.
“언데드(Undead)…….”
죽지 않은,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안식 대신 죽음의 연장선에서 삶을 이어 가는 초자연적인 존재들. 이 세상에서만큼은 나타나지 말아야 할 괴물들.
답은 오직 그것뿐이었고,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엄대두요? 도대체 그게 뭡니…….”
“뛰어.”
“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혁무진을 향해, 그들 모두를 향해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살고 싶으면 뛰라고. 지금 당장.”
“……!”
“……!”
그리고 다음 순간.
쿠우웅!
찌르르 울리는 공기 속, 아직 사방에 가득한 매캐한 연기와 불길이 타오르는 잿더미를 해치며 걸어 나온 망자들의 군단이 한 몸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
죽음의 기운이 담긴 부르짖음과 함께.
* * *
아득한 과거부터, 무림(武林)이라 불리는 곳은 이 대륙의 호사가들에게 있어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왜 그렇지 않겠나.
국경도, 법도 없는 또 다른 울타리.
국가와 백성이라는 틀을 벗어난 무법자들이 판을 치는 곳.
정의로운 협객, 마두, 혹은 때에 따라 그중 무엇도 될 수 있는 자들이 넘쳐 나며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해도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진정한 도산검림(刀山劍林)의 세상.
바로 그런 이유로 무림에 속한 이들은 괄시와 동경을 한 몸에 받아 왔고, 뭐든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합쳐 순위를 매겼다.
무림서열록(武林序列錄)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제목의 서책이 탄생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발 넓고 귀 밝은 호사가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지닌 명백한 한계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누가 더 우위인가.
무림서열록에 한 번이라도 이름을 올린 이들은 모두 쟁쟁한 고수들이었고, 마지막 장에 가까워질수록 초인(超人)이라 불리는 자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정파. 사파. 마교. 혹은 정사지간에 속한 초절정 고수들.
그들 중에는 외로운 늑대처럼 홀로 무림을 떠도는 낭인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신비 문파의 계승자도, 거대한 세력을 이끄는 우두머리와 교주(敎主)라 불리는 이가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불침(不侵). 금투(禁鬪).
각자 서로를 향해 섣불리 대치하지도, 쉽게 싸우지도 않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림을 움직이는 거인(巨人)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으나, 호사가들 입장에서는 퍽 아쉬운 일이었다.
만약 초절정 고수 간의 생사결이 벌어진다면, 확실한 서열을 알 수 있음은 물론 평생 안줏거리로 쓸 만한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무림의 분쟁은 그리 쉽게 벌어지지 않았고, 최고로 손꼽히는 강자들의 이름이 적힌 무림서열록의 마지막 장은 오랫동안 수정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 정마대전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전까지는.
그리고 길게 이어졌던 평화를 비웃기라도 하듯, 상상할 수도 없었던 수많은 것들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강자로 추앙받던 어디의 누군가가 죽고, 죽고, 또 죽고.
해가 뜨고 질 때마다 전해지는 소식에, 호사가들의 붓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해가 뜨고 지듯이, 새롭게 등장한 이름 또한 존재했다.
‘이것 좀 봐 주게. 아무래도 정보가 잘못 들어온 모양이야.’
‘잘못 들어왔다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한 번 읽어 보게. 안휘(安徽)에서 일천에 달하는 마교도가 몰살당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신빙성이 떨어져.’
‘일천이라, 제법 규모가 크긴 하군. 하지만 딱히 의심할 것까진 없고, 이번에는 무림맹이 제대로 한 방 먹인 모양인데?’
‘무림맹이 아닐세.’
‘응?’
‘모두 단 한 사람이 한 일이라고 적혀 있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마교도 일천을 전멸시켰다고. 한 놈도 예외 없이.’
‘……뭐?’
적천강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처음 알려졌고, 몇 번의 해가 기울고 다시 뜬 어느 날부터는 화왕(火王)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으며, 한바탕 천하를 뒤흔들었던 정마대전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는 무림서열록의 마지막 장에 이름을 올렸다.
무신과 삼성.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열 명의 초절정 고수 중, 가장 흉포하고 강한 왕중왕(王中王).
화왕 적천강이라는 이름을.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러한 사실을 조금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무림서열록?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요새는 땔감에 그따위 거창한 이름까지 붙이나?’
그리고 시큰둥해하는 적천강에게, 그에게 처음 이 사실을 알려 준 어느 땡중은 빙긋 웃으며 수상할 만큼 따끈한 곡차(穀茶)를 홀짝였었다.
‘글쎄. 그 정도인가? 그래도 빈승이 살펴보니 땔감치고는 제법 정확한 구석이 있던데.’
‘그야 전부 멋모르는 놈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지. 천하에 정파 무림인들밖에 없나? 사마외도 중에도 강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정파 무림에선 자네가 네 번일세. 무신과 삼성 다음이라니. 역시 대단허이.’
‘됐네. 객쩍은 말은 이쯤 하고 노부도 술이나 한잔 줘 봐. 이번에는 뭐로 담갔다고 했지?’
‘아미타불. 큰일 날 소리를. 이건 술이 아니라 곡차일세.’
‘곡차는 뭔 시부럴. 부처 옆구리 걷어차는 소리 하고 있네.’
‘어허. 그 입 좀 조심하라니까. 나중에 발설지옥(拔舌地獄)에서 고통받고 싶나?’
‘알겠네. 알겠으니까 그 손에 들린 녹옥불장 부러트리기 전에 한 잔 줘. 이 나이 먹고 소림사 경내에 불 지르고 싶진 않으니까.’
‘껄껄. 농담도. 그나저나 빈승이 추측건대, 적어도 근 십 년 안에는 자네가 이 무림서열록의 순서를 뒤집을 걸세.’
‘음. 아마도 뒤집겠지. 십 년 안에 뒈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니까.’
‘……아미타불, 재수 없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사실 이만하면 오래 살았지 뭐.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십 년 뒤에도 연락이 없으면 구화산에 찾아와서 내 시신이나 화장해 주게.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뿌려 주면 더 좋고.’
‘흠. 자네도 보기보다 호사스러운 사람이었구먼. 소림사 방장에게 찾아와서 염불이나 외라니.’
‘염불도, 극락왕생(極樂往生)도 필요 없어.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니.’
‘그럼 내기 하나 할까?’
‘내기? 무슨 내기 말인가?’
‘자네가 십 년 뒤에 삼성마저 뛰어넘을지, 아니면 자네 말처럼 죽을지. 참고로 빈승은 전자에 걸겠네.’
‘…….’
‘빈승을 믿게. 그리고 십 년 뒤에 이곳에서 다시 술 한잔하자고.’
오래전의 일이다.
약속했던 십 년의 세월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실수로 거둬들인 못난 제자를 떠나보내고,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벗마저 흙으로 돌아갈 만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적천강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을 문득 떠올리고 있었다.
늘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법왕 굉도가 진지한 얼굴로 건넸던 그 한마디를.
‘자네는 삼성을 뛰어넘을 걸세.’
퍼엉!
흐릿한 벗의 목소리가, 강력한 장력(掌力)이 토해 낸 파공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빈승을 믿게.’
쉬쉬쉬쉭!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창백한 피부의 노인, 동천마군의 맹렬한 공격은 적천강의 몸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아.’
적천강은 문득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꼈다.
어언 일백 하고도 수십 년을 살았다. 일평생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고, 고통을 받았고, 그 고통을 처음으로 나누기도 했다.
연로한 나이. 마음속에 들어찼던 심마.
‘천운으로 찾아온 지금의 이 경지가, 내 마지막 한계일 줄 알았거늘.’
이제는 안다.
자신이 틀렸음을. 떠나간 벗의 말이 옳았음을.
‘비록 아직 넘어서지는 못했으나.’
내 노력해 보지.
혀끝에서 흩어지는 그 한마디와 함께, 적천강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맺혔다.
그리고 그 순간.
화륵.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화염이, 동천마군의 가슴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