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13
#912화
모든 것이 섬광과도 같았다.
적천강이 자신의 등 뒤에서 날아든 섬뜩한 기운을 느낀 것도, 머릿속 붉은 경종이 울리며 몸을 비튼 것도.
그러나 그것은, 이성보다 앞선 본능으로도 온전히 피할 수 없었던 일격이었다.
콰득.
뜨겁다. 동시에 차갑다.
옆구리로부터 시작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통증이 들불처럼 전신으로 번져 간다.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의문과 함께.
“……!”
적천강은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반쯤 파고든 무언가를 내려다보았다.
살과 뼈를 부수고, 몸 안의 혈도와 공력을 가닥가닥 끊어 낸 그것은 새하얀 손이었다.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한, 아니 분명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어야 할 누군가의 손.
“네놈이, 네놈이 어찌.”
쥐어 짜낸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든 적천강의 시야에, 결코 보여서는 안 될 한 사람의 얼굴이 담겼다.
“분명…… 숨이 끊어졌었거늘.”
손의 주인, 동천마군(東天魔君)이 대답했다.
“그래, 그랬겠지.”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한 줌의 고통도 찾아볼 수 없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천하의 그 누가, 하나뿐인 목숨을 두 번이나 잃을 수 있겠나.”
“……뭐?”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문.
적천강은 부릅뜬 눈으로 동천마군을 바라보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몸 안을 파고드는 얼음장 같은 기운이었다.
‘위험!’
거의 동시였다.
강력한 장력(掌力)이 몸속 깊숙이 침투해온 것과, 적천강이 섬광처럼 몸을 비틀어낸 것은.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격을 허용한 몸은, 그 공격을 완전히 피해내지 못했다.
퍼엉!
적천강은 일순간 아득해진 시야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큭.’
상당한 격통.
전신을 둘러싼 호신강기(護身罡氣)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적천강은 쏘아지듯 뒤로 튕겨 나갔다.
쐐애애액!
시야가 흐릿하게 물든다. 하늘과 땅이 수없이 뒤집혔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비명이, 포탄처럼 튕겨 나간 몸뚱어리에 부딪친 무언가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라 해도 단번에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을 상황.
그러나 그는, 화왕(火王) 적천강은 아니었다.
콰드드득! 쾅!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균형을 바로잡은 그의 발끝이 지면을 밟았다.
수 장에 달하는 깊은 고랑을 만들어내며 아직 남아 있는 여파를 상쇄한 적천강의 신형이 불현듯 비틀거렸다.
쿨럭.
입술 사이로 넘쳐 흐르는 검붉은 핏물.
내상과 함께 차오른 울혈(鬱血)을 참지 못하고 토해 낸 적천강의 귓가에, 미세한 파공성이 닿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쉭.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느껴진다.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일격이. 빙하처럼 차갑고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손을 뻗어오는 동천마군의 모습이.
적천강은 반 박자 앞서 머릿속에 그려진 그 광경을 떠올리며, 땅을 박찼다.
슈확! 쾅!
찰나를 쪼개고 쪼갠 짧은 순간 속,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일격이 지면을 두부처럼 가르고 폭발하며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 낸다.
운 없게도 주위에 있던 몇몇 금의위를 집어삼키며.
하지만 사냥감을 놓친 맹수의 추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쉬릭.
마치 뱀처럼 매끄러운 움직임.
구덩이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동천마군은 물러나는 적천강을 향해 걸음을 뗐다.
파팟. 순식간에 거리를 지워 낸 그의 손끝에서 시리도록 눈부신 백광(白光)이 터져 나왔다.
화아악.
휘황하면서도 섬뜩한 그 빛이 어둠을 집어삼키며 부풀어 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며, 적천강은 이를 악물었다.
으득.
미약한 통증과 함께 입안에 감도는 혈향.
그제야 비로소 흐릿했던 시야에 초점이 잡힌다. 무뎌졌던 감각이 돌아오며 내상으로 말미암은 격통이 더욱 심각해졌지만, 적천강은 개의치 않고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차갑게 식었던 공기가 달아오른다. 가닥가닥 끊겨 나간 혈맥이 비명을 지른다.
불안정한 통제 속에서 몸 안의 화룡이 거칠게 몸을 틀었다.
주인의 몸뚱어리마저 태워 버릴 듯이.
삼키고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듯이.
그러나.
“네놈이 어떤 괴이한 힘으로 되살아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천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로 동천마군을 직시했다.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질긴 목숨, 노부가 끊어내 주마.”
그것이 설령 수십, 수백 번이라 할지라도.
미처 흘리지 못한 뒷말은 굳게 다문 입술에 가로막혔으나, 사지백해를 뜨겁게 달구며 용솟음친 수 갑자의 열양지기는 아니었다.
콰우우우!
용의 포효와도 같은 굉음 속, 광염(光焰)과 백광(白光)이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마침내 맞닿았다.
미증유의 기운으로 일그러진 그 공간의 중심에서.
후퇴를 명령하는 정호군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마저 집어삼키며.
화아악.
그리고 시야를 가득 채운 그 아득한 섬광 속에서, 적천강은 귓가로 전해져 오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 노야!
다음 순간.
구구구구궁!
온 세상이,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다.
* * *
그런 순간이 있다.
세상이 멈췄다고 느낄 때가.
사방을 떨어 울리는 충격과 굉음으로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순간이.
내게는 바로 지금이 그랬다.
“……!”
어느 날 하늘 위에서 떨어진 태양을 코앞에서 마주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목을 가리고 틀어막은 섬광과 굉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곧 들이닥칠 거대한 여파로부터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지키는 것뿐이었다.
“당장 엎드……!”
모르겠다. 내 다급한 외침이 화룡각 대원들에게 닿았을지. 과연 그들이 내 말을 따라 곧장 자세를 낮추었을지.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촌각이라도 지체했다면 그들 중 누구도 두 발로 서 있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뿐이었다.
콰아아아아!
드드드득!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광풍에 몸이 밀려 나간다. 화산지대처럼 지면이 뒤집히는 동시에 수십, 수백 개의 파편으로 나뉜 청석이 암기처럼 쏟아져 사방을 덮쳤다.
이미 숨이 끊긴 망자들의 시체. 그리고 그들의 묘비처럼 곳곳에 나뒹굴던 무수한 병장기들과 함께.
쉬쉬쉬쉭, 푸푹!
크아악!
이름 모를 누군가의 핏물이, 비명이 바람에 섞여 흩어진다.
하지만 나는 지면 깊숙이 두 발을 박아넣은 채 충격파를 온몸으로 견뎠다.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 공력을 쥐어짜 이곳으로 날아드는 모든 것들을 쳐내고 베었다.
피핏!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날아든, 작고 얇게 조각난 날붙이와 청석의 파편들이 전신 곳곳을 할퀴며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피하면 다른 대원들이 다친다.’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다칠 수밖에 없다면, 그 누군가가 나 자신인 것이 백배 천배 낫다.
‘노야 역시 그런 마음이었겠지.’
마지막 순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 외침을 들은 그가 불현듯 신형을 틀어 우리가 향하는 방향을 가로막는 모습을.
콰아아아…….
도대체 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시간 너머,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하는 굉음과 충격이 느껴진다.
곧이어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솟구쳤던 수많은 것들이 한둘씩 떨어져 내리고, 먹먹해졌던 귓가는 잠시 음소거되었던 주위의 소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끄으으.”
“사, 살려. 살려 주…….”
적아를 불문하고 뒤엉켜 쓰러진 이들이 토해 내는 신음. 죽음을 앞둔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들까지.
“다들, 다들 무사하십니까?”
“쿨럭, 소생은 괜찮습니다.”
“태산이, 오향장육 이백 접시 생각하면서 이 악물고 버텼다.”
“이런 상황에 정말 미안한 부탁이지만, 혹시 저 새끼 이빨 부숴 줄 사람 없나?”
남호의 말에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맥이 풀린 탓에 그조차도 쉽지 않다.
순간 비틀거리는 내 모습에 다급히 다가온 두 사람이 양팔을 붙잡았다.
“은인, 아니 진 공자, 아니 각주님.”
“조장님, 괜찮으세요?”
나는 주화란에게 호칭은 하나로 통일하라고 말해 주고, 지금 이게 괜찮아 보이냐는 뜻으로 혁무진을 지그시 노려본 다음, 수십여 장 밖에서 석벽을 타 넘고 있는 언데드 군단을 확인했다.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 말을 갈아탄 금위군들은, 이제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들에 의해 분분히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차라리 이곳까지 끌어들일 걸 그랬나.’
만약 그랬다면 놈들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저놈들은 말 그대로 언데드(Undead)니까.
팔다리가 무참히 뜯겨 나가도, 가슴이 관통당해도 일어나는 괴물들이니까.
하지만 괴물이라는 단어는, 꼭 흉측하거나 괴이한 힘을 지닌 것들에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괴물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괴물의 범주 안에는 화왕(火王)이라 불리는 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파팟!
만류하는 혁무진을 밀어 내며, 나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적천강을 향해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다음 순간 들려온, 적천강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물러나거라.”
평소와는 달리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
전신이 핏물과 그을림으로 가득한 그는, 몇 걸음 뒤에 있는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했다.
차츰 가라앉아 가는 먼지구름 너머, 홀로 우뚝 서 있는 그림자를.
그리고 바로 그때.
화악.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먼지구름을 걷어 냈다. 그 너머에서 무수한 시체와 피 웅덩이를 밟으며 천천히 걸어오던 그림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
순간,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킨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왜 적천강이 물러서라 했었는지.
비록 잠시뿐이지만 바로 옆자리에 있던 누군가에게서, 왜 조금의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는지.
“대단하군, 화왕 적천강. 실로 대단해.”
철벅.
나아가는 발걸음과 함께, 발목까지 고여 있던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것이었던 팔다리가 핏물에 밀려 둥둥 떠다닌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저것’만큼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는 못했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지 뭔가.”
치직. 치이익.
지금 이 순간에도 남아 있는 불길에 타들어 가는 얼굴 아래, 유일하게 형태를 보존한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다.
창공은, 동천마군은, 아니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그는 웃고 있었다.
녹아내린 살갗과 그 안에 감춰져 있어야 할 뼈를 훤히 드러낸 채.
피륙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몇 번이나 죽고도 남았을 끔찍한 모습으로 적천강을, 그리고 그의 어깨 뒤에서 굳어 버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쑥 입을 열었다.
“사제지간이 아주 돈독해 보이는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냐?”
그 순간,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예, 스승님.”
“늦었구나.”
“용서하십시오. 불초 제자의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대답과 함께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또 하나의 인영.
내 손으로 직접 몸 깊숙이 심어 주었던 단창을 뽑아내며 다가오는 마삼보의 모습에, 적천강이 중얼거렸다.
“스승?”
“왜, 이상한가?”
동천마군이 걸음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한때는 내게도 사문이 있었지. 부모가, 가족이 되어 주었던 스승과 수많은 사형제들이.”
“……네놈, 설마.”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다. 사문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억압에 맞서 싸우다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
동천마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공허한 그의 시선 끝에는, 높고 화려한 태사의에 앉아 있는 황제가 있었다.
아니, 이미 흘러 지나가 버린 과거가 있었다.
“천도(遷都)라는 명목하에, 나는 그렇게 모두를 잃어야만 했다.”
“……!”
“……!”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놈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암천의 동천마군이기 이전에, 동창의 창공이기 이전의 그가 어디에 속했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적천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산파(茅山派).”
신음 같은 한 마디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때.
드득. 드드득.
마침내 석벽을 함락시킨 망자의 군단이 대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