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14
#913화
시산혈해(屍山血海).
말 그대로였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시체가 가득하고 핏물이 흘러넘쳤다.
황실의 경사를 치르기 위해 만들어진 이 광활한 공간은 오늘날에 이르러 수많은 이들이 죽고 죽이는 전장이 되었고, 정호군이 이끄는 금의위는 마침내 대부분의 배신자들을 처단했음에도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아니, 되려 두려움을 느끼며 서로를 향해 등을 맞대어야 했다.
그들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들이 맞서야 하는 상대는, 상리(常理)를 아득히 벗어난 괴물들이었으니까.
그륵. 그어어어.
짙은 피비린내마저 지워 버리는 끔찍한 악취.
진태경과 등을 맞댄 채,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뱉으며 포위망을 형성하는 놈들을 바라보던 적천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숫자 제한 없이, 사흘 내내 물어보셔도 됩니다.”
입에 고인 피를 탁 뱉어 낸 진태경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창칼을 주워들며 덧붙였다.
“그때까지 저 새끼들이 기다려 준다면요.”
물론 진태경 역시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다들 똑같은 생각이겠지.’
어느덧 서로를 향해 등을 맞대고 원진(圓陣)을 형성한 화룡각 대원들과 금의위들의 얼굴에서,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적천강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선계(仙界)…… 그러니까, 네 녀석의 고향에도 저런 것들이 존재하느냐?”
진태경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있죠. 심지어 많아요.”
“많다니, 도대체 몇이나 있는 게냐.”
“그, 노야께서는 태산이가 지금까지 살면서 처먹은 끼니 수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엄청나게 많겠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최소 수십, 아니 수백 배라고 생각해 보세요.”
깨달음을 얻은 적천강이 탄식했다.
“존나 많군.”
“예. 진짜 존나 많습니다. 어느 정신 나간 새끼가 취향 차이까지 고려했는지 종류도 다양해요.”
“빌어먹을. 선계가 아니라 마계였구먼.”
“아, 마계는 따로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염병할. 거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상이냐.”
“어떻게 되먹긴요. 개 같은 세상이죠. 그런데 혹시 그거 아세요?”
“뭘?”
“여기도 제 고향 못지않게 개 같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진태경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던 적천강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노부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것 같군. 아무래도 노부가 너무 오래 살았던 모양이야. 이런 거지 같은 꼴을 보다니.”
“오래 살았다니, 그런 말씀은 왜 하십니까. 재수 옴 붙게.”
“쓸데없는 걱정일랑 집어치워라. 앞으로 오십 년은 더 살아 볼 작정이니까.”
“훨씬 낫네. 예. 당연히 그러셔야죠.”
애써 밝게 대답했지만, 이미 진태경의 마음 한구석에는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얹혀 있었다.
‘젠장.’
말없이 주위를 훑자 익숙한 동시에 낯선, 수많은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현재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얼굴들이.
긴장. 경악. 두려움.
그리고 그 무겁고 어두운 감정들 속에서 힘겹게 쥐어 짜낸 한 줌의 용기까지.
‘과연…… 이 중에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진태경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의문을 애써 지워 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앞의 적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이날이 오기를, 실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전장을 포위한 망자들의 군대. 그 선두이자 중심에 우뚝 선 동천마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자리의 모두를 향해.
아니, 황제를 향해.
“오늘 이 자리에서, 대국(大國)은 사라진다.”
그 순간.
스아아아악.
알 수 없는 한기(寒氣)가 뻗어 나왔다.
동천마군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희끄무레한 기운은 마치 연기처럼 전장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아니, 잠식했다.
어느새 동천마군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요령(瑤領)으로부터 흘러나온 방울 소리에 맞춰서.
딸랑.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그 스산한 방울 소리는 귓가가 아닌 뇌리로 전해졌고, 소리보다는 음파(音波)에 가까운 것이었다.
무공의 경지가 부족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동시에 더는 살아 있지 않는 이들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는 음파.
그리고 진태경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턱.
“노야!”
“그만두어라.”
동천마군을 향해 쏘아지려던 진태경의 어깨를 붙잡은 적천강이 침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늦었으니.”
“……!”
다음 순간. 진태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미 늦었다는 적천강의 한 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곧이어 시작된 변화를 통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드득. 드드득.
지면이 흔들린다. 점점 커지는 진동에 맞춰 핏물이 출렁이고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 그게 아니야.’
진태경은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삼켰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동자는, 자신의 발아래에서 조금씩 들썩이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시신에 못 박혀 있었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건…… 지면이 아니라 시체들이다.’
전장을 가득 메운 무수한 시체들. 수천에 달하는 그것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돌아와서는 안 될 이승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흐읍……!”
“이, 이게 무슨.”
“놈들이, 저 괴물들이 일어나기 전에 쳐라! 어서!”
퍽! 서걱!
차가워지는 공기와 함께 점점 더 농도를 더해 가는 공포.
그리고 미친 듯이 내리찍는 창칼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시체들.
그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적천강은, 이미 아득한 과거에 무림에서 지워진 모산파의 전설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이런 것들을, 네가 사는 그곳에서는 무엇이라 부르느냐.”
콰직!
발아래의 시체를 짓밟은 진태경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언데드(Undead).”
그. 아. 아.
목젖이 쩍 갈라진 시체가 피 웅덩이 속에서 고개를 든다. 이미 진태경에게 짓밟혀 척추뼈가 으스러졌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일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죽지 않은, 그러나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괴물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적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발음은 생소하나, 의미하는 바는 비슷하다.
천하에 산재한 수많은 문파와 무가(武家)들 중, 유일하게 모산파만이 간직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괴물들을 표현하는 말로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죽지 않은, 그러나 살아있지도 않은 괴물들이라.’
처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적천강 역시 호사가들이 지어낸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늘이 정한 순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그야말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전설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 믿을 수 없던 전설이, 이제는 눈앞에 있다.
“……강시(僵尸).”
신음하듯 뇌까린 적천강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화륵. 퍼어엉!
결코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음에도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은 광염이 터져 나온다. 돌아와서는 안 될 강을 건넌 그것의 살갗을 파고들어 뼈와 내장을 불태웠다.
푸스슥. 철벅.
잿더미가 되어 피 웅덩이에 녹아드는 시체를 짓밟은 적천강이, 자신의 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하의 그 무엇이, 열화문의 화염 앞에서도 성할 수 있단 말이냐.”
“……!”
“끝없이 불태워라. 죽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잿더미로 만들어 쓰러트려라. 본문의 선조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적천강을 바라보던 진태경이, 짐짓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거야말로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건데.”
스승과 제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따라 웃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밀려드는 시체들을 향해 쏘아졌다.
한 줄기의 불꽃. 아니, 두 줄기의 불꽃이 되어.
딸랑. 딸랑.
끝없이 울려 퍼지는 음산한 방울 소리를 들으며.
콰아아아!
* * *
그것은 죽은 이와 산 자들 간의 격돌이었고, 계란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바위를 보는듯한 광경이었다.
그아아아!
언데드. 강시.
혹은 또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르는 시체들은 살아남은 인간들을 향해 사방에서 송곳처럼 쏘아졌다.
그들은 강시처럼 뻣뻣하거나 느리지 않았고, 언데드처럼 나약하지도 않았다.
바로 그렇기에, 강했다.
콰드드득!
“막아라!”
“황제 폐하를 위하……!”
카카캉! 서걱!
충성스러운 외침이 흔적도 없이 파묻힌다.
마치 방패처럼 원진을 그린 사람들을 덮친 수천의 시체들은 생전의 모습처럼 민첩하게 움직였고, 방울 소리에 사로잡힌 그들의 영혼은 더는 부상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콰직!
“끄아아악!”
선홍빛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폐부를 쥐어 짜낸 듯한 비명은 오로지 산 자들의 것이었다.
검기에 의해 팔이 잘리고, 다리가 베이고, 가슴이 관통당해도 끝없이 일어서서 나아가는 망자들은 조금씩 인간들의 진영을 허물어트리고 있었다.
점점 더 빠르고 가파르게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를 따라. 그것의 주인이 명하는 바를 위해서.
딸랑, 딸랑.
동천마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삼보를 비롯한 수백의 망자들이 그를 따라 움직였고, 그들이 향하는 방향 끝에는 높게 솟은 연단이 있었다.
아니, 황제가 있었다.
“길고 치열했던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저물어 갈 때, 내 나이는 고작 열셋이었지.”
노래하듯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동천마군은 뇌까렸다.
느슨하게 움직인 회색빛 눈동자에, 황제의 곁에서 몸을 떨고 있는 어린 왕의 모습이 비쳤다.
고작 십 대 초반.
한 사람의 노인이자 인간을 벗어난 괴물이 되어 버린 그에게도, 한때 소년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다. 난세에 태어났다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와 고작 십대였던 두 형님이 함께 전장에 끌려나갔던 날. 동천마군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불행은 죄를 지은 이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물이 없고, 힘이 없고, 맞서 싸울 창칼이 없다면 그것이 죄라는 것을.
“그러나 정작, 무고한 백성들을 창칼 앞에 세운 위정자(爲政者)들은 죄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곧 하늘이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전장에서 수천, 수만의 목숨이 사라져도 쌀과 고기로 배를 불리는 이들이었지.”
난세의 마지막 불꽃은 화려했다. 스스로를 일국의 왕이요, 천자로 자처하는 이들은 낭떠러지 끝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그 불꽃 속에서 잿더미로 화한 무수한 생명 중에는, 어린 동천마군의 아버지와 두 형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열세 살에 불과한 동천마군을 징집하기 위해 찾아온 병사들에게 맞섰다가, 겁간당하고 죽음을 맞이한 그의 어머니도.
바로 그날부터, 소년은 울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 년 후, 가장 날카롭고 강한 창칼로 난세를 종결지은 최후의 승자가 황위에 오른 뒤에도.
떠돌이 생활을 하던 동천마군의 자질을 알아본 어느 도사가 자신의 제자로 삼아 문파에 데려갔을 때도.
그렇게 스승을 만났다. 사형제들을 알았다.
모산파에서 찾은 것은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불과 몇 년 만에 끝났다.
“알고 있었느냐?”
동천마군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수백 개의 계단 위에서 자신을 굽어보는, 원수의 핏줄을 향해 물었다.
“네 조부가, 태조(太祖)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