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16
#915화
“빨리 왔군.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짧은 침묵 끝에 흘러나온 첫 마디와 함께, 동천마군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 일찍 죽게 되겠지만.”
차가운 회색빛 눈동자가 나와 적천강을 번갈아 응시한다.
정확히는 우리의 전신 곳곳에 아로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들을.
‘빌어먹을.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빨라요.’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느슨해진다. 나는 몸 곳곳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강시. 혹은 언데드.
도무지 무엇으로 정의 내려야 할지조차 모를 그것들을 몇 마리나 쓰러트렸는지 모르겠다.
그저 끝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고, 또 싸웠을 뿐이다.
손에 잡히는 거라면 뭐든 휘둘렀고, 그조차도 없으면 주먹과 발길질로 터트리고 부쉈다.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토록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아니었다.
일격만으로도 즉사시켰을 공격을 최소 서너 번은 쏟아부어야 했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전투 불능 상태에 빠트릴 수 있었다.
‘차라리 공력이라도 충분했다면 훨씬 수월했겠지만…….’
이미 나도, 적천강도 지속된 전투로 상당한 공력을 소모한 상태.
열화문의 비전 심법으로 축적할 수 있는 극양(極陽)의 열양지기는 망자들이 지닌 사기(死氣)와 서로 상극이지만, 무한정 끌어 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동천마군이라는 강적이 남아 있다면 더더욱.
“꽤나 지친 것 같은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건 어떻겠느냐.”
동천마군이 우리의 어깨너머를 힐끗 바라보며 덧붙였다.
“남아 있는 자들이 모조리 죽기 전에.”
꾸욱.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창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동천마군의 판단이 그만큼 정확했으니까.
나와 적천강이 포위망의 일각을 허물어트리고 왔을 뿐 등 뒤에는 아직 적지 않은 숫자의 괴물들이 남아 있었고, 정호군이 이끄는 금의위와 화룡각 대원들은 온 힘을 다해 분투 중이었다.
적들에 비하면 절반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머릿수.
게다가 그 적들의 정체는 지치지도, 쉽사리 죽지도 않는 진짜배기 괴물들.
하지만 그럼에도 저들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동천마군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이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이미 두 번에 걸쳐 시체를 일으켜 세운 동천마군이다. 그 두 번이 세 번, 네 번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죽겠지.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은 죽어 가고, 적들은 증식한다.
언제 도착할지 모를, 아니 황제가 준비해 뒀는지조차 모르는 지원군이 합류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두머리를 제거한다면 다르지.’
무림인이기 이전에 헌터로서 살아왔던 나는 알고 있다.
언데드 군단을 무너트리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은, 그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운 리치(Lich)를 제거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다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늦어도 일각(一刻).
그 안에 어떻게든 놈을 쓰러트려야 한다. 일각을 넘게 되면 나와 적천강이 빠진 빈자리는 아군의 시체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소교와 백연이 책임지고 있는 또 다른 전선이 허물어져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지금 유지되고 있는 이 양면전선(兩面前線)의 균형이 기울어지기 전에 동천마군을 쓰러트리는 것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을까. 그것도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는 불현듯 떠오른 의문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모르겠다. 이 선택이 옳은 것인지.
어쩌면 상산왕과 화룡각 대원들만이라도 구해서 이 빌어먹을 황궁을 탈출하는 것이, 그렇게라도 살아남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송곳처럼 마음 한구석을 찔렀다.
그어어어!
카카캉. 커헉!
애써 외면하고 있던 등 뒤의 괴성이, 사람들의 비명과 날붙이가 부딪치는 충돌음이 귓가로 선명하게 전해진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제기랄.’
흘러나오려는 욕설을 삼키며 창 자루를 터질 듯이 움켜쥔 그 순간.
– 할 수 있다.
“……!”
– 믿거라.
내 생각을 훤히 들여다본 듯한 적천강의 전음(傳音)에, 나는 흔들리던 마음이 놀라울 만큼 평온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맞다.
할 수 있다. 아니, 해내야 한다.
노야라면, 적천강과 함께라면 가능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이기에 그렇다.
설령 그 상대가 무려 셋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인간을 아득히 벗어난 괴물들이라 해도.
나는 싸워야 한다.
놈들을 쓰러트려야 한다.
– 지금!
귓가를 파고드는 힘 있는 한 마디와 함께, 나와 적천강은 동시에 발걸음을 떼었다.
팟.
찰나의 순간 속에 지워지는 공간에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약속했던 것처럼 일장(一掌)을 뻗었다.
화륵, 콰아아아!
맹렬한 화염이, 공기를 살라 먹었다.
* * *
콰아아앙!
끔찍하리만치 뜨겁고, 위협적이다.
삼파전(三巴戰)이 되어 버린 전투의 흐름 속에서, 불길을 피해 신형을 날린 동천마군은 문득 떠올렸다.
지금의 이 상황이, 세 발 달린 솥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한쪽 다리라도 꺾이면, 솥 전체의 균형이 허물어진다.’
물론 전체적인 전황은 동천마군에게 유리했다.
가장 주의해야 할 소교는 백연과 함께 물경 일천이 훌쩍 넘어가는 괴물들을 상대하느라 발이 묶여 있었고, 정호군이 이끄는 금의위와 화룡각 대원들은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그러나 한 개의 다리라도 사라지면 허물어지는 세 발 솥에도 가장 중요한 다리는 있었다.
바로 동천마군 자신이다.
‘그걸 위해, 이토록 무리하면서까지 포위망을 뚫은 거겠지.’
콰앙!
빗나간 일격에 이어, 이격(二擊)도 어렵지 않게 피해 낸 동천마군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사람을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저들은 순식간에 핵심을 파악했다.
이미 한 번 죽은 적들이, 동료들이 되살아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약점을 간파해 냈다.
그렇다면 그건 스승과 제자 중 누구의 판단이었을까.
적천강?
아니면 진태경?
‘전자라면 과연 화왕이다 싶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왜 그분께서 그토록 원하시는지 알겠군.’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대한 무위. 거기에 더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성과 전투의 핵심을 꿰뚫는 과감한 판단력까지.
물경 백만에 달하는 대국의 군부에도 맹장(猛將)은 많다.
하지만 명장(名將)은 드물다.
그리고 진태경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췄다. 고작 약관이 갓 넘은 나이에.
‘혹, 저 아이로 떠난 자들의 빈자리를 채울 심산이신가.’
지난 몇 달 사이 서천마군이, 남천마후가 죽었다.
비록 아직 동천마군 자신을 비롯한 여러 강자가 남아 있다고는 해도, 떠난 이들의 공백으로 비어 버린 전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야 한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남아 있는 대업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 동천마군의 눈에 비친 진태경은 그들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을 훌륭한 재목이었다.
물론 그 스승은 결코 살려 두어선 안 되겠지만.
딸랑.
물 흐르듯 회피하는 움직임과 함께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
그와 동시에 금위군 총사령관이자, 황도십이궁에 속한 초절정 고수인 금우궁(金牛宮)이 즉각 반응했다.
후웅!
어지간한 장정보다도 커다란 대검(大劍)이 공간을 가른다.
물러나는 동천마군을 향해 끊임없이 짓쳐 들던 적천강이 불길 같은 외침을 토해 냈다.
“네놈 따위가 감히!”
그 순간.
화륵, 꽈아앙!
생전의 위력보다도 강력해진 대검의 강기가, 멸염신권(滅炎神拳)의 열기와 만났다.
아니, 휩쓸렸다.
쩌적, 콰아아아!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미세한 소음.
그것은 끔찍하리만치 강력한 힘을 이겨 내지 못한 강기가, 대검이 파괴되는 소리였고 맹렬하게 일어난 화염은 수십여 개로 나뉜 파편을 녹이는 동시에 튕겨 냈다.
감히 화왕이라는 이름에 맞선 대검의 주인을 향해.
파파파팟! 푸푹!
마치 섬광처럼 살과 뼈를 부수며 틀어박힌 십여 개의 핏줄기.
그 충격에 금우궁의 육신이 흔들리고, 체내에 남아 있던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푸화악!
천하의 그 어떤 의원이 보더라도 즉사를 확신했을 부상.
그러나 금우궁은, 인간을 벗어난 괴물이 되어 버린 그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끈질긴 생명력과, 몇 번을 죽더라도 반드시 이뤄 내야 할 사명이 있었다.
– 화왕을 죽여라.
앞서 텅 비어 버린 의식 속에 선명히 틀어박힌 주인의 명령이.
방울 소리로 각인된 그의 유일한 사명이 비틀거리던 망자의 육신에 힘을 불어넣는다. 이미 잊어버린 통증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려들게 만든다.
바로 지금처럼.
그아아아!
새하얗게 드러난 흰자위와 듣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괴성.
한때 금우궁이라 불리던 금위군의 우두머리는, 생전의 명성을 증명하는 부서진 황금빛 갑옷을 번뜩이며 쏘아졌다.
후웅!
바람이 뭉개진다. 공간이 지워진다.
앞을 가로막은 화염에, 끔찍한 열기에 갑옷과 살갗이 녹아 하나가 되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금우궁이라는 그 이명처럼, 성난 황소가 되어 그저 온 힘을 다해 돌진할 뿐이었다.
오직 한 사람.
화왕이라 불리는 거인(巨人)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방패막이로 삼아 그 거인을 쓰러트리려 하는 주인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츠츠츠!
이제는 대검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고작 한 뼘밖에 남지 않은 검신 위로 솟구치는 강기.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적천강의 지닌 날 선 감각에는, 사각(斜角)에서 들이닥치는 또 다른 공격이 느껴지고 있었다.
“……!”
동천마군. 바로 그였다.
교활한 것만큼이나 고강한 무위를 지닌 그가, 스스로를 살아 있는 괴물로 만들면서까지 사문의 원한을 갚으려 하는 복수귀(復讐鬼)가 신형을 틀어 섬광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멸염신권의 화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또 다른 괴물과 함께.
‘제기랄.’
느려진 세상 속, 일순간 적천강의 눈동자 위로 갈등이 스쳤다.
불과 일장도 되지 않는 거리.
이미 물러서기에는 늦었다.
회피?
물론 성공한다면 최선이다. 그러나 만약 실패한다면, 그로 인해 여기서 더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된다면…….
‘죽는다. 틀림없이.’
그리고 적천강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싸우고 있는 한 사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음에도 마삼보를 상대로 몰아붙이고 있는,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제자였다.
‘노부가 이대로 쓰러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렇기에 코앞까지 들이닥친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회복하지 못할 부상을 입는다 하더라도, 설령 숨이 끊긴다 해도 이 격돌에서 이겨야 했다.
저 괴물들에게 두 번 다시 극복하지 못할 확실한 죽음을 내려 주어야 했다.
‘그래, 그래야만…….’
저 아이가 산다.
화륵.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한 줄기 불꽃이 아름답게 피어오른 그 순간.
‘죽여 주마. 죽을 때까지.’
화왕 적천강은 그 어느 때보다 강맹한 화염과 함께 두 팔을 떨쳤다.
꽈아아앙!
거대한 굉음이, 시야를 물들이는 섬광이 멈췄던 시간이 되돌렸다. 그 뒤흔들리는 시간 속에서 한 줄기의 검광(劍光)과 익숙한 외침이 뒤섞였다.
“노야!”
푹!
뜨거운 핏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