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17
#916화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찰나를 쪼개고 쪼갠 짧은 시간 속, 그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섬광처럼 시작되고 끝났다.
푹!
적천강은 똑똑히 듣고, 보았다.
귓가에 닿은 한 줄기의 섬뜩한 파열음을. 동시에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끈적한 무언가를.
투둑, 촤아아악.
그 순간, 적천강이 바라보던 세상이 멈췄다.
사방이 붉었다. 얼굴을 뒤덮은 핏물은 뜨거웠다.
그리고…… 아팠다.
그 어느 때보다.
‘어째서.’
머릿속에 떠오른 공허한 의문이 맥없이 흐려진다.
아니, 어쩌면 흐려지는 것은 적천강의 의식일지도 몰랐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광경을 인식한 머리가, 가슴에서 들끓어 오르는 통증과 감정이 그를 난생처음 겪는 혼란과 분노로 몰아가고 있었다.
스륵.
쓰러진다. 기울어진다.
느려진 세상 속, 선홍빛 핏물을 뿜어내며 천천히 튕겨 나가는 익숙한 뒷모습이 부릅뜬 적천강의 두 눈동자에 화인(火印)처럼 틀어박힌 그 순간.
“……!”
화왕 적천강은 온전히 깨달았다. 받아들였다.
눈앞에서 벌어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늘그막에 거두어들인 두 번째 제자가, 적천강 자신에게 있어 어떤 의미였는지를.
더불어 이러한 마음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툭.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따라 나아간 손이 익숙한 등을 지탱한다.
단단하고, 따뜻했다.
위기에 처한 스승을 구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몸을 내던졌던 제자의 마음처럼. 쩍 갈라진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처럼.
‘이런 멍청한, 멍청한 놈 같으니.’
장장 일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다. 광활한 천하에서 수많은 인간군상을 보았고,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으며, 그 안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했다.
그렇게 걸어온 한 걸음, 한 걸음이다.
늘 단호했고, 거침없었다.
하지만 그런 적천강조차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알 수 없었다.
스승을 대신해 강기에 몸을 내던진 저 겁 없는 놈에게, 감히 스승보다 먼저 떠나려 하는 불효막심한 제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다만 한 가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제자가 목숨을 내던져 얻은 이 순간을 결코 헛되게 만들지 않는 것. 어떤 수라장에서도 기적처럼 살아온 녀석의 생명력을 믿는 것.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들리지 않을 당부와 함께, 늙은 스승은 아직 꺼지지 않은 양손의 불꽃을 더욱 거세게 피워올렸다.
치이익.
타들어 가는 공기. 증발하는 수분.
그 속에서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끝에.
화아아아악.
죽음마저 집어삼키는 거대한 화염이 있었다.
* * *
고오옹.
그 순간, 모든 이들은 보았다.
아니, 오감(五感)을 통해 받아들였다.
그들은 끔찍한 열기에 일그러지는 공간을 목격했고, 먹먹해지는 귓가에서 고통을 느꼈으며, 뜨겁게 타들어 가는 공기와 바람 사이로 불현듯 다가온 공포에 몸을 떨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살아 있는 이도, 죽어 있는 이도.
심지어는 달려드는 괴물들을 쉴 새 없이 베어 내던 소교와 핏물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진태경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던 동천마군조차 등줄기를 엄습하는 한기를 느꼈다.
아니,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듯한 열기를.
‘이건.’
그 순간 동천마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일격에 담겨 있는 것은 단순한 공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라는 것을.
늙은 스승의 슬픔이, 분노가, 그 모든 것이 그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잠재된 기운을 끌어올렸다는 것을.
‘죽는다.’
잊고 있던, 동시에 두 번 다시 떠올릴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깨어난다.
십여 년 전, 소교를 상대하며 느꼈던 것보다도 더욱 짙고 끔찍한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동천마군 자신은 물론, 그들 모두를 향해.
“피-”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비명과도 같은 동천마군의 외침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새하얗게 타오르는 불의 기둥이 뻗어 나왔다.
콰득, 드드드드득!
화룡(火龍)이 몸부림친다. 지면을 녹이고 모든 것을 불태운다.
시야를 뒤덮으며 파도처럼 들이닥친 화룡은 그 거대한 몸에 닿는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씹어 삼켰다.
한 줌의 수분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태우고 증발시켰다.
주인을 잃고 나뒹굴던 날붙이도,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도, 그 아래에 숨어 있던 토양과 바위도.
심지어는 이미 한 번 죽음을 초월한 육신까지도.
콰아아아!
동천마군은 똑똑히 보았다. 틀림없이 들었다.
자신의 권속으로 거듭난 금우궁(金牛宮)이, 살아 있을 적에도 황도십이궁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고강한 무위를 지닌 초절정 고수가 백색 화염에 휩싸이는 광경을.
그가 내지르는 단말마를.
그아아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어찌 저리 끔찍한 비명을 내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이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동천마군은 경악했고, 그와 동시에 영혼마저 태워 버릴 듯한 극양(極陽)의 열기를 느꼈다.
그 중심에서 붉게 빛나는 한 사람의 안광을 보았다.
“내 제자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화왕 적천강.
콰우우우!
황도 전체를 떨어 울릴 듯한 화룡의 포효를 들으며, 동천마군은 죽음을 각오했다.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 짜내어 끌어올렸다.
빌어먹게도 충직하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느라 멈추지 못했던 수하를, 그래서 화왕이라는 용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버린 스스로를 탓하며.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목숨도. 반백 년을 넘게 이어 온 그의 복수도.
스아아아아.
죽은 자의 사기(死氣)가 동천마군의 전신을 둥글게 감싸 안았다. 이미 늙고 지친 용이 토해 내는 불길이 그 위를 덮쳤다.
콰아아아!
* * *
모르겠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내게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이미 무뎌진 감각과 흐릿한 시야 속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땅. 먹먹한 귓가를 끊임없이 두드리는 굉음.
그리고…… 열기.
뜨겁다. 이미 내 의지를 벗어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뚱어리였지만, 그 열기만큼은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노야, 엄청 화났구나.’
소리 내어 낄낄 웃고 싶었지만, 다음 순간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웃음소리가 아닌 끈적한 무언가였다.
쿨럭.
피다. 그것도 작은 덩어리가 섞인 검붉은 피.
손으로 입가를 더듬자 느껴지는 물컹한 촉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게 내 입술인지. 아니면 내장 조각인지.
‘……빌어먹을. 뻔하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슬프기까지 했지만, 어차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한 가지 서러우면서도 희한한 점은, 정작 F급 헌터 시절에는 이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던 적이 없었다는 거다.
‘물론 강해진 덕분에 이 지경이 되고도 살아 있는 거지만.’
나는 힘을 쥐어 짜내어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먼지와 잿가루로 가득하다. 아직 걷히지 않은 그 여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몸뚱어리뿐이었다.
전신이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한 몸.
그리고 강기가 한바탕 헤집고 지나간, 살과 뼈가 처참하게 드러난 가슴.
쿨럭. 쿨럭.
다시 한번 피를 쏟았다. 이번에는 더욱더 검게 물든 핏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허용한 일검이 살과 뼈뿐만이 아니라, 오장육부에까지 미쳤다는 증거였다.
‘미친 짓이었지.’
그래, 그건 분명히 미친짓이었다.
제정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아니, 어지간히 미친놈이라고 해도 시도할 엄두조차 못 냈을 미친 짓.
하지만 나는 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보고만 있으라고.’
마지막 순간, 마삼보에게 등을 보이면서까지 몸을 내던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은 내가 아닌 적천강이었을 것이다.
동천마군은 망자들을 부리는 술사이기 이전에 엄청난 실력을 지닌 강자였고, 제아무리 적천강이라 할지라도 동천마군과 또 다른 초절정 고수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을 테니까.
물론 한편으로는 설마 했던 마음도 있었다.
동천마군에게 있어 나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적이기 이전에 천주(天主)가 원하는 누군가였으니까.
‘생포한다더니, 그걸 냅다 찌르네.’
나는 피거품을 토해 내며 웃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이다.
시체처럼 널브러진 채,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감각들을 느끼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
하지만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도박에서 실패한 것이 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전장에서 벌어진 거대한 도박의 승패는 나 혼자만의 목숨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구는 진 대가로 목숨을 내놓고, 누군가는 승리해서 살아남는다.
난 전자(前者)였고, 그뿐이다.
미련?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내 몸 상태는 나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것마저도 인간으로서 갖는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죽음.
놈이 보인다.
이미 우리 가족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아 갔던 그것이, 지금껏 내가 겪은 수많은 위험 속에서도 아슬아슬하게 피해왔던 불청객이 마침내 찾아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 쏟아지는 잿가루와 먼지 사이로 검은 형체가 일렁이는 듯했다.
‘오지 마.’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보지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얼마 안 되는 핏물과 가쁜 숨소리뿐.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의식을 부여잡고, 입안에 고인 핏물을 삼키며 정신을 일깨웠다.
두렵다. 죽음이.
두려웠다. 이대로 모두와 헤어지는 것이.
아직 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들과 함께하고 싶은 일들이 수도 없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왜 저 그림자는 내게 다가오는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걸까.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은데.
‘잠시라도. 아주 잠시뿐이라도.’
숨을 헐떡이며 부탁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설령 이대로 나를 데려가더라도 좋으니, 헤어질 시간이라도 달라고.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가족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신에게.
아니.
시스템에게.
“제……발.”
그리고 젖먹던 힘마저 쥐어 짜내어 내뱉은 그 한 마디가 새어 나온 그 순간.
띠링.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맑은 종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