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18
#917화
화아악.
거센 광풍이 휘몰아친다. 지면에 켜켜이 쌓여 있던 새카만 잿가루가, 아직 꺼지지 않는 불씨가 바람을 타고 온 사방에 흩날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야를 차단한 그 희뿌연 장막 속에서, 화염을 머금은 일권(一拳)이 공간을 갈랐다.
퍼엉, 콰아아아!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간다. 달구어진 공기 너머로 백색 화염이 넘실거렸다.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불길이었다.
용의 숨결이었고, 포효였으며,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분노였다.
감히 자신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적들을 향해 쏟아지는 늙은 용의 화염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타올랐다.
이미 불멸(不滅)에 가까운 존재로 거듭난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아.’
동천마군은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어느덧 두려움과 경탄이 뒤섞인 회색빛 눈동자는 끊임없이 화염을 쏟아내며 다가오는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화왕(火王) 적천강.
바로 그였다.
오직 그였다.
저 드높은 하늘에 닿지 못했던 열 명의 왕.
그중에서도 가장 앞선 불의 제왕(帝王)이 비로소 숨겨 두었던 날개를 펼쳐 솟아오르고 있었다.
무신이라는 하늘을 장식한 세 개의 별들을 향해.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자신의 적들을 향한 분노를 토해 내며.
드드득!
전신을 두드리는 거대한 충격.
미증유의 힘이 실린 일장(一掌)에 동천마군의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뒤흔들린다.
만근의 힘으로 지면에 틀어박힌 두 다리가 깊은 고랑을 만들어 내며 밀려났다.
쾅! 쾅! 콰아앙!
나아가는 자.
그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자.
적천강이 전자라면 동천마군은 후자였다.
마치 신벌(神罰)처럼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벼락을 피해 한껏 몸을 웅크린 죄인이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이미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저 지친 육신으로 어찌 이토록 강한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저토록 분노할 수 있단 말인가.
동천마군은 혀끝에서 감도는 탄식을 삼켰다.
그리고 압도적인 기세를 흩뿌리며 다가오는 적천강을,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은 그의 극렬한 분노를 이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쾅!
가족을 잃고.
콰앙!
사문을 잃었다.
콰아앙!
그렇게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때, 텅 비어 버린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분노.’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낄 수 있기에 인간이라고 했다.
웃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즐길 수 있기에 생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천마군은 그중 셋을 잃어버렸다.
남아 있는 것이 오직 분노뿐이었기에, 마침내 스스로 인간을 포기한 괴물이 되었다.
복수귀(復讎鬼)라는 이름의 괴물이.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적천강을, 생사의 갈림길에 선 제자를 본 늙은 스승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일으킨 죽음의 기운마저 불사르려 하는 저 강대한 화염에 담긴 분노 역시도.
콰아아아앙!
그 순간.
동천마군은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적천강의 분노가, 자신의 분노를 넘어섰다는 것을.
쩌적.
균열을 알리는 그 소리가 동천마군의 귓가에 닿았다. 그의 몸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기운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의 시작점에 새하얀 광염(光焰)이 깃든 주먹이, 최후의 보루를 무너트리는 화염과 그보다 더한 열기를 줄기줄기 쏟아 내는 두 눈동자가 있었다.
“똑똑히 깨달아라.”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도 잿더미가 되어 버릴 듯한 안광.
“네놈이 무엇을 건드렸는지.”
그러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북해의 빙하처럼 차갑다. 동천마군의 등골을 얼리고 영혼에 스며들었다.
그가 죽음을 딛고 일어선 그날부터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공포를 깨웠다.
‘허.’
동천마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어쩌면 삼성(三星), 그 이상.’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늙은 용의 분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콰창!
마침내 갈라지고, 깨져 나간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동천마군은 시야를 물들이며 쏟아지는 백색 화염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후웅!
소리보다 앞선 움직임.
죽은 자와 산 자의 격돌.
새하얗게 물든 세상 속, 느릿하게 나아간 멸염신권(滅炎神拳)이 동천마군의 주먹과 맞닿았다.
아니.
휩쓸었다.
쾅!
한순간의 격돌. 거대한 굉음.
그러나 두 주먹이 서로를 향해 맞닿은 그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고, 힘의 균형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콰득.
이미 흐트러져 버린 사기(死氣)를 집어삼킨 열기가 살갗을 짓이긴다. 혈도와 힘줄을 녹이고 뼈마디를 부수었다.
동천마군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며 얻은, 더욱 강건해진 육체와 회복력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콰아아아!
적천강의 일권은 용암인 동시에 섬광이었다.
멸염신권이라는 명칭에 담긴 뜻처럼 그가 일으킨 화염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멸하며 쏘아졌다.
동천마군의 주먹으로도 모자라 그의 한쪽 팔 전체를 집어삼켰다.
화륵, 퍼어엉!
고점에 다다른 화염이 폭발한다.
하지만 마땅히 터져 나와야 할 피도, 그 흔한 살점과 뼛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모조리 증발하거나 잿더미가 되어 버렸으니까.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두 번 다시 회복시킬 수 없게 사라져 버렸으니까.
동천마군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적천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팟.
단 한 걸음.
적천강이 내디딘 발걸음을 따라 공간이 접혔다.
잘못 쏘아진 포탄처럼 뒤로 튕겨 나가던 동천마군이 이를 악물며 신형을 비틀었다.
콰득, 쾅!
옆구리를 스친, 정확히는 스친 것만으로도 한 뼘이나 되는 살점과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일권이 지면을 강타했다.
동시에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구덩이가 패었다.
오싹.
동천마군은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과연 자신이 평범한 인간처럼 통증을 느꼈다면, 그렇게 지금의 적천강과 맞섰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도대체 몇 번째 죽음을 맞이했을까.
‘이건.’
스스로 불사의 존재라고 여겼다. 이미 오래전 사라져 버린 무신이 아닌 이상, 그 누가 온다 해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동천마군은 살고 싶었다.
이미 한 번 죽은 몸이라 해도 이 삶을 이어 가고 싶었다.
적어도 증오스러운 피를 이어받은 황실과, 태조의 업적이자 유산인 이 대국을 허물어트려야 했다.
복수가 끝날 때까지,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가족과 사문의 사람들.
그리고 이날만을 위해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동천마군 자신을 위해서라도.
‘난. 나는…….’
으득.
동천마군은 이를 악물었다. 더는 남아 있지 않은 핏물 대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결코 쓰러질 수 없다.’
동천마군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분노인지. 복수에 대한 집념인지.
아니면 일생일대의 대적(大敵)을 맞닥트린 무인이 발휘한 마지막 투혼인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서 적천강이 그러했듯이 동천마군 역시 기존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
슈확!
찰나의 순간. 벼락처럼 공간을 가로지른 지풍(指風)이 적천강의 목을 관통했다.
아니,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
연신 물러서는 동천마군을 향해 한 줄기 불꽃이 되어 들이닥치던 적천강의 신형이, 관통당한 목에서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야 할 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흐트러지기 전까지는.
“……!”
이형환위(移形換位).
그 네 글자가 섬광이 되어 뇌리를 스친 순간, 동천마군은 뒤로 돌아섬과 동시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에 들린 요령을 휘둘렀다.
후웅!
세찬 파공성과 함께 내리그어지는 요령이 사기를 머금고 빛난다.
단 일격. 일격이라도 제대로 적중시킨다면 그 누구라 해도 온전할 수 없다.
그것이 초인이라 불리는 초절정 고수들의 싸움이니까.
화왕과 동천마군. 초절정이라는 세 글자로도 그 무위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괴물들의 싸움이니까.
하지만.
콰득.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어쩌면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도달하지 못할 새로운 경지를 맛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였더냐.’
그건 소리 내어 전해진 육성도, 전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동천마군은 똑똑히 들었다. 보았다.
화염이 깃든 손으로 요령을 붙잡은 채 자신을 응시하는 적천강의 안광에서, 차갑게 다물린 그의 입가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동시에 다음 순간 불길에 휩싸이는 자신의 팔을.
화륵, 콰아아!
산기슭에 번진 화마(火魔)는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지만, 주인의 의지를 따라 일어난 열양지기는 아니었다.
끔찍한 열기를 머금은 그것은 찰나에 시작되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동천마군의 마지막 팔을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리며.
하지만 분노한 스승의 응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콰직!
동천마군의 시야가 흔들렸다.
팔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림과 동시에 옆구리를 후려친 일권이, 살과 뼈마디를 부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래전 썩어 버린 그의 오장육부로 화염을 쏟아붓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적천강의 일격, 일격을 허용할 때마다 죽음 역시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상황.
쐐애애액!
앞서의 공격으로 상반신의 절반이 새카맣게 그을린 동천마군은 튕겨 나가는 힘을 거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성한 두 다리에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다.
이미 두 팔과 요령도 잃었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차며 나아가는 그의 발목을 잡아채는, 만근거력(萬斤巨力)을 느꼈다.
콰직.
살을 짓이기고 뼈를 부수는 힘.
그와 동시에.
후우우웅!
세상이 뒤집혔다. 뭉개지는 바람 사이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지면이 그를 반겼다.
콰아아앙!
귓가를 먹먹하게 물들이는 굉음과 함께 땅거죽이 솟아오른다.
이미 화강암 지대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곳에, 흙과 바위를 부수며 깊숙이 처박힌 동천마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장장 반백 년을 훌쩍 넘어서는 긴 세월.
황궁에서 암약하며 수많은 초절정 고수를 보았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속도와 힘, 어느 것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지금의 적천강은, 자신보다 앞선 영역에 있다는 것을.
콰드드득!
단 한 줌의 통증조차 없다.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에게 남아 있던 두 다리 중 하나가 지금 막 뽑혀 나갔음을.
그리고 그 사실은 곧 한 가지를 의미했다.
‘이제는…… 더 물러날 곳도 없군.’
동천마군은 실소를 흘렸다.
비로소 코앞에 닥친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미소?
아니었다.
오랜 세월 기다린 복수와 목숨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결국 최후의 순간에 뽑아 들고자 숨겨 두었던 복검(覆劍)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자의 씁쓸한 웃음이었다.
― 나오게, 천살(天殺).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한 줄기의 전음이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순간.
스륵.
텅 빈 허공이 일렁였다.
흩날리는 잿더미와 불씨 사이로 떨어져 내린 살수(殺手)가, 절름발이라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섬광처럼 쏘아진 노인이 적천강의 정수리 위로 비수를 내리그었다.
솨악!
완벽에 가까운. 아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암습이 성공하려던 그때.
쐐애애애액!
한 자루의 창이, 한 줄기의 화염이 되어 공간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