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21
#920화
모든 것이 한순간이었다.
적어도 무너진 외벽의 잔해를 타 넘어, 선봉으로 돌격하던 동창의 고수들은 그렇게 느꼈다.
화아악.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찌 이토록 빠르고, 파괴적일 수 있는 것일까.
눈앞을 물들이는 휘황한 섬광에 그들은 잠시 넋을 놓았고, 그것이 이승에서 본 마지막 광경이 되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굉음이 귓가를 후려친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석상처럼 굳어 버린 육신을 휩쓸었다.
콰드득, 푸화아악!
들이닥친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진 섬광 속, 자신의 동료들을 따라 돌격하던 동창의 환관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시야와 함께 깨달았다.
조금 전의 그 섬광이, 누군가가 쏘아 보낸 강기(罡氣)였다는 것을.
그 무시무시한 기운이 수십여 명의 동료들을 휩쓸고, 자신의 한쪽 팔마저 앗아 갔다는 것을.
“아, 아아. 아아아……!”
턱이 덜덜 떨렸다.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잇새 사이로 넋 나간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죽었다. 아니, 도륙당했다.
이제는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한때 동료였던 자들의 흔적을 확인한 동공이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뇌로 전달했다.
마치 맹수에게 뜯겨 나간 듯, 처참하게 너덜거리는 어깻죽지로부터 뒤늦게 전해진 통증과 함께.
“크아아악!”
쩍 벌어진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쏟아졌다.
아니, 지금 이 순간 극심한 혼란과 고통에 사로잡힌 것은 비단 그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끄윽, 끄으으으.”
“사, 살려 주…….”
“우웁, 쿠에에엑!”
누군가는 잘린 두 다리를 부여잡고 신음하고, 누군가는 죽음의 끝에서 간절히 도움을 구걸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에 허리를 굽히고 토사물을 게우기도 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참혹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감에 몸을 떨며.
한 걸음 늦게 현실을 인지한 이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이미 오래전 동천마군에게 포섭되어 역모에까지 가담한 일부 금위군도, 그들을 이끌고 대연회장까지 들이닥친 동창의 환관들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일격.
단 일격에 오십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죽거나 전투 불능상태에 빠졌다.
주저 없이 선봉에 섰던 만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초일류에서 절정의 경지를 오가던 실력자들.
물경 삼천에 달하는 병력을 생각한다면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으나, 모두의 발걸음이 멈춘 이유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십여 명의 절정 고수들을 집어삼킨 저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아니, 악마와 같은 신위(神威)를 보인 고수의 존재였다.
‘도대체…….’
누구냐.
한 가지 의문이 모두의 뇌리를 관통했다.
대연회장을 휩쓸며 들이닥치던 삼천의 반란군도.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쓰러지지 않는 망자들과 맞서 싸우고 있던 금의위와 화룡각 대원들도.
심지어는 요령이 파괴됨과 동시에 더더욱 이성을 잃고 날뛰던 망자들도 본능의 경고에 따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섬광이 시작되었던 발원지(發源地)를.
그 무수한 시선의 끝에서, 꿈틀거리는 망자들의 사지를 짓밟고 우뚝 서 있는 누군가를.
솨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여인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소교……!”
삽시간에 주위에 내려앉은 침묵 속, 뒤늦게 울려 퍼진 비명 같은 외침에 여인은, 아니 소교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한 사람을.
진태경.
소리 없이 달싹인 입술과 함께,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 *
연단으로 이어진 수백여 개의 계단은 이미 무수한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일천에 달하던 망자들은 갈가리 찢겨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지가 토막 난 채로 버둥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이 질긴 목숨을 끊어 주길 바라는 듯이.
서걱.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의 섬광.
하나뿐인 팔로 엉금엉금 계단을 기어 올라오던 망자의 몸뚱어리를 반으로 가른 사내는, 쥐고 있던 검을 늘어트리며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후욱, 훅.
피와 땀에 절어 있는 전신이 들썩거린다.
예술품처럼 정교하고 화려한 황금빛 갑옷과 검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사내가 지금껏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과 자책의 무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없어야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재가 되어 스러진 금의위들 역시 죽음을 각오했었으니.
그들이 스스로 받아들인 희생을 동정하는 것은, 죽음 이상의 모독이었으니.
설령, 사내가 하늘 아래 그 누구보다 존귀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존재라 하더라도.
“백연.”
사내, 황제는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선황과 황실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애썼고 자신이 무너질 때마다 호된 질책으로 일으켜 세워 주었던, 그렇기에 신하보다는 동료였던 황실 제일의 무관에게 명령이 아닌 부탁을 건넸다.
“북을, 전고(戰鼓)를 울리게.”
“……!”
백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어느 때보다 지치고 피로에 젖어 있는 황제의 모습을 눈에 담은 그는, 깊게 고개를 숙인 뒤 이 연회의 시작을 알렸던 커다란 북을 향해 일장(一掌)을 뻗었다.
두웅!
웅혼한 공력이 실린 북소리가 끝없이 뻗어 나갔다.
오늘날을 위해 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던 무장의 마음을 담아. 황제의 뜻을 담아.
한 번.
또다시 한번.
그것은 대연회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울림이었다. 아니, 대연회장을 넘어 황도 전체를 휩쓸 듯한 파도였다.
두우우웅!
세 번째 북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도 물경 삼천에 달하는 반란군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이 모든 일련의 상황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니까.
갑작스럽게 선봉을 휩쓴 소교의 막강한 무력에,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에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압도되었으니까.
심지어는 이 역모의 시작이자 중심인,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어야 할 동천마군조차 진태경과 적천강의 발치에 참혹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으니까.
‘무엇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동천마군이 사로잡혔다. 마삼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미 황실과 대국을 배반하여 암천의 휘하에 들어간 금위군과 동창의 수뇌부는 당황했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외궁을 손에 넣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아군이 황도를 휩쓴 틈을 타, 황궁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남아 있던 수비 병력을 격파할 때만 해도 새로운 하늘이 열리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마주한 현실은, 진즉 승기를 잡았어야 했을 전황(戰況)은 달랐다.
처음 대연회장에 들이닥칠 때만 하더라도 힘차게 흩날렸던 깃발은, 이제 그들의 마음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둥. 두웅.
다시 한번 울려 퍼진 북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닿았다.
본능처럼 전신을 솜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등골을 서늘하게 엄습해 왔다.
앞서 들려온 것보다 크지도, 그렇다고 웅혼한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 네 번째 북소리.
그러나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 반란군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 이유는 단 하나였다.
등 뒤.
저 멀리 보이는 백연이 아닌, 자신들의 등 뒤 어디에선가 들려온 북소리.
그것에 그치지 않고, 곧이어 사방으로 퍼져가는 그 울림.
두둥. 두두둥.
너른 들판을 휩쓰는 불길처럼 번져가는 그 무수한 북소리는 어딘가에 부딪혀 되돌아온 메아리도, 환청도 아니었다.
이 길고 참혹했던 연회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고, 마침내 덫에 걸린 먹잇감을 포위하는 사냥꾼들의 발걸음이었다.
드드득.
언제부터였을까.
저토록 많은 군세가 도대체 어디에, 무슨 이유로 지금껏 나서지 않고 숨어 있던 것일까.
‘함정!’
한 줄기 벼락이 정수리를 관통하는 듯한 충격과 동시에, 반란군들은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대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보았다.
마침내 사방에서 높이 솟아오른 수백여 개의 깃발을.
펄럭이는 깃발을 따라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황금빛 수실로 수놓아진 한 마리의 용을.
“……!”
“……!”
보이지 않는 경악과 기쁨. 그리고 절망감이 대연회장 전체를 휩쓸었다.
누군가는 가슴이 터질 듯한 고양감에 사로잡혔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피가 나오도록 이를 악물었다.
삼천의 반란군은 후자(後者)였다.
수천. 혹은 수만.
정확한 적들의 숫자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혀 오는 적들의 기세가 자신들을 압도하리라는 것.
반란군들은 엄습해 오는 살기를 느꼈다.
출렁이는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들의 얼굴을 보며, 곧 들이닥칠 불길한 미래를 떠올렸다.
그러나 동시에,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떠올렸다.
모든 것의 중심이며, 시작이자 끝.
이 광활한 천하에서 가장 드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지존.
“황제를…….”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희미한 목소리는, 이내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비롯된 거대한 외침이 되어 터져 나왔다.
“황제를 사로잡아라!”
성즉군왕 패즉역적(成卽君王敗卽逆賊)이라.
이미 절벽 끝에 몰린 그들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어리는 움직이지 못하는 법.
황제를 비롯한 그 일가를 생포하여 이 반란을 성공시키는 것만이, 그들 앞에 놓인 유일한 활로(活路)였다.
“황제와 그 일가를 생포하는 자, 열후(列侯)가 되어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리라!”
그 순간.
드드드득!
수천의 인마(人馬)는 파도가 되어 나아갔다.
드높은 계단 위에서 노쇠한 얼굴로 자신들을 굽어보는 황제를 향해.
동시에 그 앞에 우뚝 선 한 여인에 대한 두려움을, 악에 받힌 함성으로 애써 지워 내며.
“으아아아아!”
“돌격하라! 멈추지 마라!”
비명과도 같은 그 고함이, 무수한 발걸음과 거센 말발굽 소리가 깊은 밤을 깨웠다. 사방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짙은 어둠을 뚫고 퍼져나갔다.
멀리, 더 멀리.
크고 또렷하게.
그러나 필사적으로 달려 나가는 그들의 움직임과 함성은 너무나도 느리고, 멀게만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서로를 마주한 어느 청년과 여인에게는 그랬다.
그가 그녀를,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백여 장의 거리는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허공에서 부딪친 이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를.
하지만 상대의 진정한 정체를 깨달은 것은, 오직 소교뿐이었다.
‘그래, 너였구나.’
뜻 모를 한 마디를 삼킨 소교는 말없이 발아래 펼쳐진 전장을 바라보았다.
거대했다. 동시에 참혹했다.
종횡으로 수백여 장에 이르는 대연회장은 핏물로 잠겨 있었다. 주인 잃은 병장기가, 팔다리가 굴러다녔고 부릅뜬 눈동자에서는 생명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나마 울려 퍼진 풍악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고, 그 위에 새로운 죽음을 덧칠하기 위해 밀려드는 이들 또한 있었다.
솨아아아.
적들이 내지르는 거대한 고함 속, 어디선가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섬단 같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다.
바람을 타고 콧속 깊숙이 스며드는 혈향(血香)은 사방에 고여있는 선홍빛 핏물처럼 진했다.
세월에 잠겨 있던 과거의 편린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낼 만큼.
잊고 싶었으나 잊을 수 없었던, 그 참혹했던 기억을 되살릴 만큼.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던 해답이자 열쇠를 찾아냈음에도, 조금의 기쁨조차 들지 않는 것은.
이 길고도 참혹했던 연회를 끝낼 때가 왔다는 확신이 든 것은.
스륵.
고요함 속에서 움직인 소교의 양손이, 핏물로 말라붙은 손아귀에 감겨있던 두 개의 곡도(曲刀)가 하늘과 땅을 향해 겨누어진다. 이내 서로를 향해 맞물린다.
스르릉, 철컥.
어느 장인의 수 없는 담금질과 두드림으로 완성된 강철이 서늘한 소리를 토해 냄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홈과 그 안에 심어진 쇠붙이가 두 개의 병장기를 연결했다.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곡도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던 것처럼.
우우우웅.
긴 세월 만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것이 주인의 손안에서 몸을 떨었다. 깊숙이 스며드는 익숙한 기운과 공명(共鳴)하며, 빛을 닮은 눈물을 흘렸다.
지이잉.
파르르 떨리는 공기.
보는 이로 하여금 곡도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비스듬히 꺾여나간 양 끝자락 사이로 새하얀 섬광이 이어진다.
오랜 과거의 모습 그대로.
누군가에게는 천벌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었던 그 시절의 위용을 간직한 채로.
“그래, 오랜만이구나.”
소교는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애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수천, 수만 번도 넘게 그러했듯이 끝과 끝을 이은 섬광을 그러쥐고, 힘주어 당겼다.
스아아아.
허공에서 그려지듯 나타난, 섬광에 걸린 휘황한 빛줄기.
동시에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멀리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한 사람의 옛 기억을 일깨웠다. 먼지로 뒤덮인 과거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일으켜 세웠다.
그 누구보다 거대한 활로, 벼락과도 같은 강기를 쏟아내며 전장을 지배했던 어느 노파를.
“궁성(弓星)……!”
바로 그 순간.
슈화아아아악!
소교, 아니 궁성의 손끝을 떠나 쏘아진 빛줄기가 대연회장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