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27
#926화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최소한 인생을 살면서 몇 번.
아니, 일상 속에 존재하는 사소한 것까지 포함하면 수천 번까지도.
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한들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이를 발판으로 다음에는 더 올바른 길로 향하면 된다.
물론, 바로 그 ‘다음’이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의 이야기지만.
“나, 나는 아무런 죄가 없소! 오해요!”
“폐하! 폐하!”
“네 이놈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두려움. 간절함. 분노.
제각각의 감정에 휩쓸려 목소리를 높이는 수십여 명의 사람들.
한바탕 죽음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도 윤기를 잃지 않은 비단옷과 피둥피둥한 살집은 그들의 신분이 얼마나 높은지를 말해 주고 있었지만, 지금껏 누려 왔던 부귀영화도 지금 이 시간 부로 끝장이었다.
대역죄인(大逆罪人)의 말로는 그런 것이니까.
“모조리 추포하라!”
“충(忠)!”
쉬쉬쉭!
백연의 엄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금의위들이 포승줄이며 검집을 휘두른다.
이미 체념한 어느 문관은 조용히 포박당했고, 휘황찬란한 갑옷을 걸친 늙은 장군은 제법 뛰어난 무공을 펼치며 저항했다.
그리고 뚝배기가 깨졌다.
빡!
“네놈들이 감…… 커헉!”
“벌써부터 진 빼지 말고 조용히 갑시다. 소리는 앞으로 실컷 지르시게 해 드릴 테니.”
“나, 나를 어쩔 셈이냐!”
“이미 아시잖소. 도독첨사(都督僉事) 영감.”
“……!”
금의위의 입가에 걸린 서늘한 미소에, 늙은 장군은 넋 나간 얼굴로 주저앉았다.
지금 자신의 정수리를 뜨뜻하게 적시며 흘러내리는 핏물이, 앞으로 흘려야 할 양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 난장판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마지막에 봤을 때는 저한테 불알도 없는 고자 새끼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한 명.
“저 안 잊으셨죠? 아, 처음 본다고? 개소리 집어치워. 난 다 기억하고 있거든.”
두 명.
“어머, 이게 누구야. 너무 살이 쪄서 못 알아볼 뻔했네. 괜찮아요. 이번에 내가 홀쭉하게 만들어 드릴게.”
“…….”
멘트 치는 것마다 살벌한 거 봐라.
홍진이 마치 십 년 만에 동창회에 참석한 사람처럼 반갑게 말을 건넬 때마다, 황금빛 갑옷을 걸친 다이어트 보조제들이 걸어와 사람들을 끄집어냈다.
한동안 비어 있던 금의위 형옥을 한가득 채워 줄 뉴비들의 야한 냄새에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 잠깐! 홍 첩형(貼刑)!”
“나 첩형 아니에요. 산서성 도지휘동지로 임명된 지가 언젠데. 괜히 시끄럽게 사람 부르지 말고 먼저 가 있어요. 아, 불알 잘 닦아 놓고.”
과거 홍진에게 불알 없는 고자라며 사실 적시 명예 훼손죄를 가한 누군가가 질질 끌려 나가자, 초면임을 어필했던 두 번째 인물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홍 동지.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누가 당신 동지야?”
“예?”
“당신 나 알아? 그리고 오해는 무슨. 당장 이 역적 새끼 끌고 가서 형옥에 처박아요.”
눈앞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내심 중얼거렸다.
‘피바람이 불겠군.’
몇이나 죽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수백? 수천?
아니면 지난번처럼 수만 명?
모르긴 몰라도 오늘 이 자리에 없는 배반자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더한다면, 그야말로 대규모 숙청(肅淸)이 벌어질 터였다.
“저들을 동정하는 것이냐?”
불쑥 들려온 황제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 새끼들이야 죽을죄를 지었으니 당연한 족쳐야죠.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역모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이 희생당할까 봐 신경 쓰이는 거겠지.”
“…….”
“어쩔 수 없다. 국법은 지엄한 것이니. 그것이 역모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압니다. 충분히 이해하고요.”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만약 이 숙청에서 원한을 품은 자가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한다면, 또 다른 재앙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다.
동천마군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간혹 예외도 있을 수 있지.”
뜻밖의 선언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그 말씀은…….”
“모든 인과 관계를 명명백백히 하여 죄 없는 이들만큼은 구명해달라. 조금 전 표아(標兒)가 짐에게 했던 말이다.”
황제가 흐릿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황태제(皇太弟)이자 아우로서 처음으로 건넨 부탁이기도 하고.”
“……!”
“저 아이는 태평성대를 이룩할 성군이 될 것이다. 누구보다 백성들을 아끼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성군이.”
웃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었나.
언제나 차갑고 음울했던 황제의 얼굴은 훨씬 밝아져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직 어색한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상산왕.
아니, 이제는 황태제가 된 주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온기가 뚝뚝 묻어 나왔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결국 어쩔 수 없는 형이라는 건가.’
내심 실소를 흘린 내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분명 성군이 되실 겁니다.”
“무예 역시 출중하니, 언젠가는 저 장성(長城)을 넘어 드넓은 초원을, 북해의 고토와 사막 또한 정복할 것이다.”
“예?”
“왜 그러지?”
“음. 아닙니다. 가능하죠.”
무예랑 그거랑 뭔 상관이냐 묻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그런데 왜 슬슬 진위경이 생각날까.
“그렇지. 가능하고말고.”
“암요.”
“그뿐이 아니다. 황금으로 도시를 세우고, 천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대제국을 건설하겠지.”
“……천 년은 좀.”
“설마 지금 무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무리 아니냐.
하지만 그 순간 가늘어진 황제의 눈매에,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나는 눈부신 순발력을 발휘했다.
“좀, 짧게 잡으셨다고요. 전 만 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 년은 무리지.”
“…….”
“무림인이라 그런지 확실히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군. 좀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기르거라.”
이 시벌놈 보게.
애써 맞장구 쳐줬더니 정색을 해 버리는 황제의 모습에 내가 말문이 턱 막혀 버린 그때, 누군가의 손길이 은밀하게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쿡.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 안다.
나는 황제를 향한 분노를 누그러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 괜한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그렇지, 설마 황제를 두들겨 패겠습니까?
적천강 역시 전음(傳音)으로 대답했다.
― 네 녀석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놈인 건 맞다만, 노부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다.
― 그게 아니라면, 설마?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돌린 나를 향해, 적천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설마 노야께서 직접 때리시게요?
― …….
― 세상에, 또 노망나셨어요? 안 됩니다. 황제한테 손대면 싹 다 끝장이에요. 우리한테 열 받아서 암천이랑 눈 맞으면 대국이 아니라 암천국이 돼 버린다니까? 그런데 이제 지옥을 곁들인.
영등포역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포교사처럼 필사적으로 설득을 이어 가고 있던 그때, 적천강이 짜게 식은 눈빛으로 내 어깨 너머를 향해 턱짓했다.
― 그 개눈깔 뽑아 버리기 전에, 저 뒤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나 보거라.
그리고 고개를 돌린 나는, 저 멀리서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로 이곳을 응시하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궁성(弓星).’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자, 언제부터인가 전신을 감싸고 있던 안도와 기쁨이 순식간에 씻겨 나가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 폐부로 스며드는 알 수 없는 한기(寒氣)와 함께.
― 그래, 너였구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그 목소리가 새벽에 불어온 바람처럼 아스라이 귓가를 맴돌았다.
― 무신(武神)께서 말씀하셨던, 선택받은 자가.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어떤 진실이 숨어 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파르르 떨려오는 눈빛.
그런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궁성이, 조용히 신형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어딘가로.
지금껏 숨겨온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은밀한 장소로.
* * *
나는 궁성을 따라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대연회장에서 벌어진 전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넓고 깨끗하던 황궁 곳곳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와 핏물로 가득했다.
그러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황궁을 가로지르는 나와 궁성을 막아서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멈칫하며 이내 목례와 함께 길을 텄다.
그들도 알아본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황제와 동천마군 중 누구의 편에 서서 싸웠는지.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나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뜻 모를 궁성의 말에 담겨 있던 의미도.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한 존재에 대해서도.
‘무신.’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홀연히 사라졌던, 정마대전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아니, 천하 무림을 굽어보는 하늘 그 자체가 된 인물.
세인들은 말하곤 했다.
무신과도 같은 이는 지금껏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삼성(三星)과 십왕(十王)이라 불리는 강자들이 있으나, 무신은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다고.
그렇기에 하늘이며, 신이라 불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무신은 이제 없다.
무림의 상징이자 중심이었던 그는 무림맹을 해산한 직후,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를 기다려 왔던 것처럼.
그렇게 무신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세월이 흐르자, 온갖 소문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났다.
누군가는 그가 천마(天魔)와의 마지막 생사결에서 입은 내상을 회복하지 못해 죽었다고 했고, 혹자는 무신이 어느 심산유곡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뿐인가.
깨달음을 얻은 끝에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는 설.
무신이란 본래 중원을 수호하는 신수(神獸)와 같은 존재라, 더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허무맹랑한 소문들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에 둘러싸인 무신은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그와 관련된 영웅담은 신화처럼, 설화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무신이라는 존재를 보고 접했던 이들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데…….
‘바로 그 무신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등장하다니.’
무신의 새끼손가락조차 보지 못한 나지만, 그 별호가 언급된 것만으로도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춘 지금 이 순간에는 더더욱.
사박.
어느덧 깊은 밤을 지나 새벽으로 나아가는 시각.
축축하게 젖은 풀잎이 스치는 소리마저 서늘하게 울려 퍼진 그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궁성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곳, 와 본 적이 있지?”
겉모습만 보자면 이제 갓 이립 어림에 접어든 젊은 여인이지만, 궁성은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노강호.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예.”
“죽일 듯이 달려들던 네 모습이 생각나는구나. 제법 인상 깊었어.”
궁성이 손을 뻗어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톡, 하고 건드렸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기화요초(琪花瑤草)로 가득한 이곳은, 며칠 전 그녀와 내가 마주쳤던 바로 그 버려진 공간이었다.
“속이 답답할 때마다 이곳에 와서 거닐곤 했지. 금지(禁地)처럼 인식되는 바람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으니까.”
“그럼 그날도…….”
“맞아. 한 가지 고민이 있었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서 이곳을 걸으면서 생각해 볼 참이었지.”
궁성이 돌아섰다. 그녀의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가, 그 안에 숨어 있는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신께서 말씀하신 선택받은 자인 네가, 죽음조차 피할 수 있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지녀야 했을 네가…… 어째서 회복 불능의 상태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