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34
#933화
나는 정호군을 따라 이동하며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뭔가 극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황궁은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정갈한 복색을 차려입은 궁인들이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였고, 중무장한 금의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철탑처럼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큰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스윽.
건너편에서 다가오던 한 무리의 궁인들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갈 때만 하더라도 우연인 줄 알았다.
철컥.
삼엄한 기세로 경계를 서고 있던 금의위들이 갑옷을 두드리며 군례(軍禮)를 취했을 때도,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진 못했다.
그저 금의위 내부에서도 한 끗발 하는 정호군이 동행하고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명색이 천호(千戶)라서 그런가, 방귀깨나 뀌나 봐?”
하지만 장난삼아 던진 그 말에 돌아온 정호군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보기보다 눈치가 없는 편이군.”
“응?”
“저들이 예를 갖추는 이유는, 내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보였다.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감사와 존경의 뜻을 담은 그들의 눈빛이 오직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내가 머뭇거리던 그때, 막힘없이 나아가던 정호군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니, 그와 함께 온 모두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저벅.
칼 같은 움직임과 함께 묵직한 쇳소리가 울린다.
십여 장 앞, 건청궁(乾淸宮)이라 쓰여진 현판을 힐끗 바라본 정호군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이 한마디는 지금 해야겠군.”
깊게 눌러쓴 투구 사이로 비치던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일순간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소, 열화신룡 진태경.”
“……!”
나는 크게 뜨인 눈으로 정호군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굽혀지지 않았던 그의 허리가, 뻣뻣한 목이 나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포권지례(抱拳之禮)와 함께.
“다시 만날 그날까지, 부디 무운(武運)을 빌겠소.”
“부디, 무운을!”
차차창!
복명복창하듯 힘차게 외친 수십의 금의위가 검을 뽑아 역수(逆手)로 그러쥔다.
건청궁으로 향하는 방향을 따라 양옆으로 나란히 시립한 그들의 모습에, 나는 참지 못하고 풀썩 웃어 버렸다.
“거, 낯간지럽게 왜들 이러시나.”
하지만 이내 웃음을 그치고, 그들 모두를 향해 나 역시 두 손을 모아 포권지례를 올렸다.
“나중에 또 봅시다. 꼭.”
진심이 담긴 한 마디.
그거면 충분하다.
언제 다시 저들과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남은 이야기는 그때로 미뤄 두기로 했다.
만남과 인연에는 언제나 헤어짐이 있는 법이니까.
저벅. 저벅.
나는 정호군과 금의위가 만들어 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높게 솟은 건청궁의 처마 아래, 새로 생긴 흉터로 드디어 얼굴을 구분할 수 있게 된 쌍둥이 무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아무런 절차도 필요 없다는 듯, 막 계단을 오른 내 앞을 가로막지 않고 조용히 비켜섰다.
그들이 지키고 있던 거대한 철문은, 처음 왔을 때와 달리 활짝 열려 있었다.
* * *
황궁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건청궁.
바로 그 건청궁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그곳에서, 황제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왔나.”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어투와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
그리고 웃고 있는 눈매.
하지만 즉위 전부터 무수한 숙청과 비정한 결단으로 철혈(鐵血)이라고까지 불리는 황제의 환대에도, 나는 웃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웃지 못했다.
‘어째서?’
비록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감추지 못한 당혹스러움이 표정과 눈빛에 묻어 나온 모양이다.
할 말을 찾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가 피식 웃으며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군. 하긴, 명색이 천자라는 이가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황제는 상반신을 휘감고 있는 붕대를 툭툭 건드렸다.
입가에 맺힌 희미한 웃음으로 인해, 움푹 들어간 볼이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짐이 자네를 위해 조언 하나 해 주자면, 이럴 때는 고개부터 숙이는 게 좋아.”
사흘 전과 비교해도 말도 안 되게 수척해진 황제의 모습에 느낀 당황스러움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두 가지일세. 첫째로는 표정을 감출 수 있고, 둘째로는 아주 잠시뿐이지만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지.”
“그렇군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저도 한번 해 보죠.”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인 뒤, 십여 초가 지나기도 전에 슬쩍 들어 올렸다.
“표정이야 이미 들켰으니 어쩔 수 없고, 확실히 생각할 시간이 있으니 좋은 것 같긴 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어 볼 수 있겠나?”
“폐하께서 어째서 지금 같은 모습이신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 이유도 함께요.”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짐은 단지 그날의 전투에서 무리했을 뿐이야.”
황제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그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는 다음 순간 돌아온 내 대답을 듣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래서, 또다시 앵속(罌粟)을 하신 겁니까?”
“……!”
“알아차리는 게 좀 늦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폐하의 모습에 주위의 냄새까지 신경 쓰지 못했거든요.”
나는 굳어 버린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심호흡했다. 콧속을 통해 스며드는 진하면서도 특이한 향은, 분명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것과 일치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어느새 깊게 가라앉은 황제의 목소리에, 나는 건청궁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를 떠올렸다.
마침내 대면한 황제에게서 느껴졌던 왠지 모를 익숙한 향과 때마침 간혹 앵속을 피우던 누군가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던 순간도 함께.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자네가 어찌 알아차렸는지 모를 일이군.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도 없거니와, 무림인은 심신(心神)에 해가 되는 것을 멀리한다고 하던데.”
“아시는 바가 맞습니다. 확실히 그런 편이죠. 무림인은.”
나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환관들은 종종 한다더군요.”
“……홍진이로군.”
한 번 입은 상처의 유통기한은 길다.
그 원인이 심리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인간의 머리와 몸은 똑똑히 기억한다.
수십여 년이 흐르고 흉터조차 희미해진 뒤에도 과거의 상흔(傷痕)이 욱신거리는데, 하물며 중요 부위를 잘라 낸 환관들은 오죽하겠나.
홍진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통증을 이겨 낼 수 없을 때면 앵속에 손을 댔고, 그 덕분에 나는 뜻하지 않게 황제에 관한 한 가지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무슨 이유로 앵속을 하시는 겁니까.”
“글쎄. 그걸 자네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머리를 가리켰다.
“짐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 또한 없을 테고.”
“……설마?”
이미 체념한 듯한 태도. 거기에 더해 의미가 담긴 손짓까지.
눈을 부릅뜬 나를 향해, 황제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맞네. 지금 자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
“혈혼고(血魂蠱). 그 저주받은 독물이 이미 짐의 골수에까지 미쳤어.”
짐작이 확신으로 뒤바뀐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과도 같은 외마디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런 제기랄.”
“무엄하군. 감히 만백성의 어버이인 짐의 앞에서 그런 상스러운 말을 내뱉다니. 만약 이 자리에 백 지휘사가 있었다면 당장 형옥(刑獄)으로 끌려갔을 걸세.”
다른 누군가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손발을 벌벌 떨며 용서를 빌었겠지만, 나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옵니까?”
“짐이 농담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줬던가?”
“처음 듣습니다. 심지어 소름 끼칠 정도로 재미없어요.”
“그건 자네가 원체 재미없는 사람이라 그런걸세. 짐이 전장을 누비던 시절에는 밤마다 수하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었었지. 참 재미있는 시절이었어.”
“굳이 중환자한테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은데, 폐하 혼자만 재밌었을 겁니다.”
“그럴 리가. 짐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다들 배꼽을 잡았었는데.”
“……저런.”
그 시절의 수하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웃어 주느라 고생깨나 했을 것 같다.
물론 이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겠느냐마는.
눈치 없는 사단장, 아니 황제의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나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언제부터입니까?”
“십여 년 전. 정확히는 정변(政變) 직후였지.”
더는 감출 것도 없다는 듯, 황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믿고 있던 충복이 손을 썼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지.”
“폐하의 측근 중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일세. 백연과 소교. 아니, 이제는 궁성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군.”
황제가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알려져서는 안 될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차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살인멸구(殺人滅口)라도 하시려고요?”
“만약 시도하면,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있나?”
“전혀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짐이 훨씬 낫군. 황제씩이나 되어서 그런 추태를 부릴 수는 없지.”
그때였다.
작게 너털웃음을 흘리던 황제가 돌연 잔기침을 내뱉은 것은.
쿨럭.
붉게 물든 황금빛 옷소매. 갑작스러운 토혈(吐血)에 얼굴이 굳은 채 주위를 둘러보는 내 모습에, 황제가 한 박자 앞서 고개를 내저었나.
“괜한 짓 말게.”
“뭐가 괜한 짓입니까.”
“어의(御醫)라도 부를 생각이면, 그만두라는 말일세.”
“…….”
“그들의 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면 진즉 손을 썼을 거야. 하지만 짐이 어의들에게조차 이 사실을 숨긴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황제는 핏물에 젖은 옷소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세분의 형님과 든든하게 종묘사직을 위해 힘쓰시던 황실의 웃어른들…… 단 한 사람도 예외는 없었어.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
맞다. 그 누구도 혈혼고의 마수(魔手)를 피하지 못했다.
정변 이후 모든 것을 되돌려 놓으려던 그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선황이, 황후가, 황태자를 비롯한 여러 직계 황족들이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했고 정변을 일으킨 사황자는 용서받지 못할 폐륜아 이자 찬탈자로 낙인찍혔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네. 살기 위해 온갖 영약을 섭취하고, 뼈를 깎아가며 무공을 익혀 혈혼고의 독성(毒性)을 이겨 내야 했지. 그렇게 버텨 온 세월이 무려 십 년이야.”
비로소 깨달았다.
왜 그가,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군사를 발 아래 둔 그가 어째서 지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는지.
“십 년이 넘는 겨울을 버틴 끝에 바야흐로 봄이 찾아왔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지금 이 순간.
황제의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