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37
#936화
황제가 혈혼고에 중독되었다는, 실로 중차대한 소식을 접한 적천강의 감상평은 짧고 굵었다.
“아프겠군.”
“……?”
“왜, 노부의 말이 틀렸느냐?”
“그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단순히 아픈 정도가 아니잖아요.”
누가 들으면 혈혼고가 아니라 감기인 줄 알겠네.
황당해하는 내 모습에 적천강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거나 그거나. 결국에는 아파서 죽을 지경까지 왔다는 것 아니냐. 저 쓸데없이 입 무거운 돌팔이 놈도 못 고칠 만큼.”
적천강의 갑작스러운 지목에, 앞서 내가 이야기하는 내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의가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기에 환자의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왜 돌팔이입니까?”
“의원이라는 자가 병을 못 고치면 돌팔이지. 오늘부로 신의라는 이름표도 떼라.”
“붙인 적도 없습니다. 애초에 제 것도 아니었고요.”
“기왕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묻자. 만약에…….”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설령 스승님이 오시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묻고 싶었던 부분이었지만, 한 박자 먼저 흘러나온 신의의 대답은 침착하고 단호했다.
“혈혼고는……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극독과도 궤를 달리합니다. 오직 숙주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독물(毒物)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말입니다.”
적천강이 침음을 흘렸다.
“말인즉슨, 해약(解藥)이 없다?”
“본래 독과 약은 한 뿌리나 다름없으니, 치료법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지요.”
맞다. 황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가고 있다.
사흘 전, 대연회장에서의 전투가 끝난 직후 그가 유난히도 지치고 피로해 보였던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이미 기력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은 더 버틸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신의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이미 영약이나 공력으로도 독기를 막을 수 없을 지경까지 왔다는 뜻이다.
마치 계속해서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은 구멍 난 항아리처럼, 황제의 생기(生氣)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얼마 안 가서 죽고 말겠지. 황제가 급사하면 대국이 뒤엎어질 테고.’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황제는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온갖 오욕(汚辱)을 뒤집어쓰고도 별다른 잡음 없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국을 통치해 온 그다.
더군다나 동천마군이 이끄는 강력한 반대 세력이 있음에도 황위를 지켰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 군주인지 증명하는 부분이었다.
‘반드시 살려야 한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이미 황궁 밖은 숯불 위 가마솥처럼 끓어오르고 있다고 했다.
내가 깨어나기 이틀 전, 다시 한번 대규모 숙청을 거행한 황제가 황도 곳곳에 수백 장이 넘는 방을 붙였기 때문이었다.
옥새(玉璽)의 날인이 선명히 찍힌 그 커다란 종이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진상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른바 암천(暗天)이라 불리는, 극악무도한 역적들을 토벌하겠다는 황제의 일갈도 함께.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된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황제의 의지는 분명했고 암천을 향한 백성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암천이란 삶의 터전과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외적(外敵)에 지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맞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모두를 이끌 지도자가 필요하다.
냉정하며 빈틈없고,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밀어붙일 수 있는 위엄을 지닌 강력한 지도자가.
거기에 더해 여러 전장을 전전했던 경험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다.
“진 공자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연 신의를 향해,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야 어떻게든 살려 내야죠.”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시간이 충분치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마도 제가 시도하려는 방법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거라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는 건…… 뭔가 제가 모르는 묘책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맞아요. 있습니다. 기가 막힌 묘책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대답하는 내 모습에, 말없이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적천강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네놈이 말하는 묘책이라는 게 혹시.”
“지금 생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
“이런, 깜빡하고 있었군. 그래, 그 귀물(貴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뒤늦게 한 물건의 존재를 떠올린 적천강이 이마를 탁, 치자 그제야 신의도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설마, 만독지환(萬毒指環)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예. 당연한 거 아닙니까?”
“허어.”
낮게 탄식하는 신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혈혼고라고 해도 만독지환이면 충분한 가능성이. 아니, 확실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잠시나마 적천강의 위협했던 무형지독마저 어렵지 않게 흡수했던 만독지환이다.
당시 살성과 함께 적천강을 치료했던 신의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지금까지도 만독지환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희한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많이 정신이 없으셨나 보네.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어요.”
“그, 진 공자.”
“괜찮다니까요. 다만 아시다시피 상산왕. 아니지, 황태제에게 잠시 맡겨 두었으니 곧바로 찾아오겠습니다. 잠깐이면 되니까 그때까지 치료 준비나 해 두시면 될 것 같네요.”
“진 공자?”
“아이고, 사람이 살다 보면 깜빡하고 그럴 수도 있죠. 뭘 또 자꾸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세요. 전 이만 갑니다.”
나는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아니, 정확히는 돌아서려고 했다.
어느샌가 신의의 손에 들려 있는 무언가를 보기 전까지는.
“……?”
잠깐만. 저거 뭐야.
매우 익숙한 형태의 반지를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짧은 침묵을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하네요. 내가 아는 뭔가랑 많이 닮았네.”
신의가 짜게 식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닮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역시 대륙이라 그런지 모조품 하나는 끝내주네. 어디서 사셨어요?”
“산 거 아닙니다.”
“아, 선물로 받으셨구나.”
“선물도 아닙니다. 잠시 빌렸습니다.”
“누구한테?”
“황태제 전하께 대강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받아왔습니다. 중요한 일에 필요하여 진 공자를 대신해 왔다고 하니, 자세히 묻지 않고 내주시더군요.”
눈앞이 아찔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혹시…….”
“뭐겠습니까. 오늘 건청궁에만 두 번 들렀습니다.”
“폐하께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굳이 그런 말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럼 결과는……?”
“앞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전보다도 훨씬 무겁고, 숨 막히는 침묵이.
그리고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적천강의 나지막한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기가 막히다 못해, 코까지 막힌 묘책이었군.”
“…….”
“…….”
그러게.
이제 어쩌냐.
* * *
퀘스트
[닥터 최태경]당신은 병마로 고통받는 황제에게 치료를 약속하여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이에게는, 섣부른 희망보다 잔인한 것은 없습니다.
남아일언중천금. 약속을 지키십시오.
황제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혈혼고를 제거하여,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혀 왔던 고통에서 해방시키십시오.
만약 황제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등급 : 초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성공적인 치료 (미완료)
보상 : ???
실패 : ???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홀로그램 창을 껐다.
머릿속에는 이미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조졌네.’
진짜 조졌다.
설마하니 만독지환까지 안 먹힐 줄 누가 알았겠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내 다그침에도 신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실패했습니다.’
‘아, 될 것 같았는데?’
‘아닙니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니까, 될 것 같았는데 한 끗 차이로?’
‘그게 아니라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냥 안 먹힙니다. 오히려 만독지환의 기운을 느낀 혈혼고가 위기를 느끼고 더욱 몸부림치더군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릅니다.’
‘거짓말. 이런 질 나쁜 장난이나 치고. 이 개구쟁이.’
‘……진 공자. 잠시 저쪽에서 이야기 나누시겠습니까?’
신의의 소매 속에서 뭔가가 반짝하길래 봤더니, 코끼리 발바닥도 뚫을 것 같은 대침(大針)이더라.
나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져서 도망치듯이 처소로 돌아왔던 것이 불과 일각 전이었다.
‘이런 제기랄.’
내가 무슨 배짱으로 황제에게 무사 퇴원을 약속했겠나.
다 만독지환이라는 사기템을 믿고 했던 말이다. 무형지독도 어렵지 않게 해결했는데, 그깟 벌레 한 마리 못 잡아 죽일까 싶어서.
그런데.
“망했다.”
그래, 망했다.
심지어 망해도 보통 망한 게 아니다.
단순히 퀘스트를 떠나서 황제의 죽음은 막아야 하는데, 만독지환이라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자 눈앞이 샛노랬다.
“도대체…… 이걸 어떡해야 하지?”
이제는 익숙해진 천장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린 그때,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혁무진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습니다, 조장님. 다 괜찮아요.”
“무진아.”
“예.”
“너, 뭐 알고 씨부리는 거야?”
“알죠.”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인 혁무진이 말을 이었다.
“주 소저께 차이신 거 아닙니까?”
“…….”
“허허. 아닌가 보네요,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속도만큼은 초절정 고수 그 자체다.
광속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 녀석은 아직도 미련이 뚝뚝 묻어 나오는 눈으로 내 목에 걸린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세요?”
“무진아. 말을 할 때는 눈을 봐야지. 시계를 보지 말고.”
“빛이 워낙 영롱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뒤통수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기운도 없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황제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그러니까, 중병에 걸린 누군가한테 다른 누군가가 치료를 약속했다 이거네요.”
“그래.”
“그런데 한바탕 호언장담을 해놓고, 아무런 대책이나 방법도 없는 거고요.”
한 마디, 한 마디가 뼈아프다.
타격감에 몸을 움찔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보탰다.
“맞긴 한데, 정확히는 있었다가 없어졌다고 봐야지.”
“그래 봤자 결국은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음. 알겠습니다. 감 잡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혁무진이 준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거, 아주 씹새끼네요.”
“……!”
“조장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겨우 맘 잡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한테 그따위로 희망을 주면 어떡해요. 뭐 하나 확실한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되먹은 새낀지는 몰라도…….”
그 순간, 파르르 떨고 있는 내 모습을 본 혁무진이 확연히 줄어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으로 잘생기고, 위엄이 넘치며, 언제나 다른 이에게 희망을 심어 주는 올바른 청년이라고 생각합니다.”
“…….”
“…….”
“……다했냐?”
“……더 할까요?”
“……아니.”
더 비참해지니까 그만해, 이 새끼야.
슬픈 눈빛으로 들리지 않는 한 마디를 건넨 내가 차마 혁무진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그 순간.
타다닥.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중요한 일이라길래 최대한 빠르게 처리했…… 어머, 분위기 왜 이래요?”
홍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