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38
#937화
“중요한 일이라기에 최대한 빠르게 처리했…… 어머, 분위기 왜 이래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상 기류를 감지한 홍진의 물음에,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니긴. 척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혁무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홍진이 문득 진중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그거구나? 음. 그런데 그 문제는 어쩔 수 없죠.”
“……?”
“괜찮으니까 너무 상심하진 마요.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뭐지. 설마 홍진도 알고 있었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현재의 그는 동창 태감이니, 황제의 병환을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난 사흘 동안 신나게 역적들 주리를 틀어 대면서 그에 관한 정보를 들었을 수도 있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해 낸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홍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쩌다 보니 들었어요.”
“극비 사항인데…… 생각보다 아는 사람이 많네요.”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아무리 꽁꽁 싸매고 감추려고 해도 결국에는 새어 나가기 마련이죠.”
하긴. 황제만 입을 다문다고 모든 비밀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건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어 있고, 가해자에게도 입은 달려 있으니까.
이미 죽거나 혹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역적들.
홍진과 금의위의 손을 거친 그들 중에는 동천마군의 최측근으로서 황제가 혈혼고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죄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모양이군요. 그중 누구누구였습니까?”
“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죄인들 말입니다. 동천마군과 분명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텐데요.”
“어, 그게…….”
아무래도 언급하기에는 민감한 사항이었을까.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내가 손사래를 치려던 그때, 조용히 눈을 깜빡이던 홍진이 말을 이었다.
“나는 태산 소협한테 들었는데?”
“아. 그렇구…… 잠깐만. 누구요?”
“태산 소협이요. 덩치 엄청나게 큰 그 사람.”
“……?”
아니, 이거 뭔가 이상한데.
침묵하는 나를 대신해서 혁무진이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그 태산이 맞습니까?”
“응.”
“이름만큼이나 덩치가 산만 하고.”
“그렇지.”
“평소에는 멍청하다가 먹는 얘기만 나오면 똑똑해지고.”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오향장육에 미쳐 있는.”
“그건 확실해요. 사실 어제 첩보가 하나 들어왔는데, 수하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황실 숙수들이 그 사람 음식에 독을 타려고 했다더라고.”
황실 숙수 선정 암살 일 순위라면 내가 아는 그놈이 맞다.
나는 극심한 혼란을 느끼며 물었다.
“아니, 걔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긴. 봤으니까 알지.”
“그럴 리가요. 못 봤을 텐데?”
“똑똑히 봤다던데?”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갑자기 죄인은 뭐고, 문초 얘기는 왜 나온 거지?”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던 홍진이 말을 이었다.
“진 공자가 막 깨어났을 때 있었던, ‘그 일’을 얘기하는 거 아니었어요?”
“예, 예?”
“지금 많이 불안정해 보이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그래요? 진심으로 괜찮다니까 자꾸 왜 그래.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기운이 넘치는 것뿐인데.”
“……!”
아니, 미친.
삽시간에 눈앞이 캄캄해진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걸, 그걸 어떻게.”
“이미 소문이 파다해요. 몰랐어?”
“소문이 파다……?”
“그나마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늦게 안 편이에요. 진 공자 깨어나고 두 시진도 안 되어서 내궁(內宮) 사람 절반은 그 소식을 들었을걸.”
숨이 막힌다. 손발이 벌벌 떨리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치 어느 날 심심해서 TV를 틀었더니, 공중파 채널에서 내 몽정 파티를 열어 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병에 걸린 사람처럼 경련하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태산이, 태산이 그 새끼 당장 잡아 와.”
입을 딱 벌린 채 굳어있던 혁무진이 대답했다.
“이런 말씀드리기 정말 죄송한데, 태산이가 저보다 더 센데요.”
“어떻게든 잡아 와!”
“아니, 조장님도 아시잖아요. 걔는 두 손으로 사람을 찢어요.”
“나는 한 손으로도 널 찢어.”
“앗. 아앗.”
짧은 탄성을 흘린 혁무진이 후다닥 달려나가자, 무거워진 공기를 느낀 홍진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 공자님. 너무 그러지 마.”
혈혼고 치료에 관한 근심도 지금만큼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상황.
위로를 건네는 홍진에게, 나는 탄식하듯 대답했다.
“남 일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아요. 나 같은 상황이 되어 본 적이나 있어요?”
내 날카로운 물음에, 홍진이 슬픈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상황이 있을 리가 없지. 난 이미 오래전에 잘랐잖아.”
“…….”
“그냥 좋게 생각해요. 난 오히려 진 공자가 부러운걸. 특히 장마철에는 거기가 쑤셔서 앵속 없이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 때가…….”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그만하세요. 제발.”
심심할 때마다 꺼내는 고자 가불기로 내 입을 닥치게 만든 홍진이 품에 들고 있던 뭔가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나도 바쁜 몸이라 부탁받은 물건만 건네주고 가려고 온 거야.”
그리고 탈룰라의 덫에 걸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제야 홍진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철궤(鐵櫃)를 발견하고 그가 이곳을 다시 방문한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동천마군이 마지막 순간 알려 주었던 의미불명의 장소.
그곳에서 찾으라고 했던 물건.
“이건…….”
“보이는 대로 철궤예요.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뭔지, 누가 남긴 건지는 나도 모르지만.”
“안 열어 보셨습니까?”
“당연한 거 아냐? 진 공자와 약속한 부분인데.”
어깨를 으쓱해 보인 홍진이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내 실력으로는 저 철궤를 열 자신도 없었고.”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농담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철궤를 건네받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띠링.
– [매우 단단한 철궤]를 습득하셨습니다.
– 새로운 아이템을 습득하셨습니다. 아이템을 감정하여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홍진과 나 사이에 펼쳐졌다.
아이템창
[매우 단단한 철궤]등급 : 절정
제한 : 無
설명 : 소량의 만년한철(萬年寒鐵)을 혼합하여 제작된 철궤. 당연하게도 엄청난 강도를 지녔으며, 방패로 쓰거나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다만 다섯 개나 되는 자물쇠가 있어 자주 사용하기에는 다소 번거로울지도.
활자를 빠르게 읽은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니, 아무리 소량이라지만 무슨 놈의 철궤에 만년한철을…….’
만년한철은 매우 귀하고, 그만큼 더럽게 비싼 광물이다.
어느 정도 이름난 장인이 무기를 제조할 때 만년한철이 넉 냥만 들어가도 명검(名劍) 소리를 듣고, 그 이상이면 성질 더럽고 침 좀 뱉는다는 고수들이 아귀처럼 달려들 정도다.
한 마디로 돈이 있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도 없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정상인이라면 무기를 만드는 데 투자하는 물건.
그리고 한낱 보관함에 지나지 않는 철궤에 만년한철을 섞을 만큼의 재력을 지닌 정신 나간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있긴 하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철궤를 어루만졌다.
땅 깊숙이 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표면은 축축하고 곳곳에는 미처 털어내지 못한 흙이 진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대체 뭘까. 당신이 이렇게까지 숨겨 두려고 했던 것이.’
내가 철궤의 옛 주인을, 동천마군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뇌까린 그때였다.
“이만 가 볼게요. 괜히 더 있어 봤자 방해만 될 것 같으니까.”
눈을 찡긋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홍진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떠났다.
문을 닫기 전, 한 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고.
“아, 황태제 전하께서 이 말을 전해 달래.”
“어떤……?”
“하나뿐인 친구가 보고 싶다고. 지금은 사정이 있어 찾아가지 못하지만, 떠나기 전에 꼭 만나자고.”
하나뿐인 친구라.
건청궁에서 만독지환을 건네주며 했던 말이 떠올라,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저도 마찬가지라고 전해 주세요.”
살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홍진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주위의 모든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철궤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불현듯 손을 뻗었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띠링.
마음속으로 읊은 짤막한 명령어와 함께, 더없이 익숙하면서도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손아귀에 감겼다.
백염(白炎).
내 독문 병기이자 천하제일의 장인이 일 년의 고행 끝에 벼려 낸 신병이기.
그리고 동시에 단단하게 잠겨 있는 저 철궤를, 다섯 개나 되는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물리).
“어디 한 번 봅시다. 뭘 그렇게 꽁꽁 숨겨 뒀는지.”
작게 중얼거린 나는, 망설임 없이 창날을 내리그었다.
서걱.
한 줄기 섬광과 함께 잘려 나가는 금속.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하게 다섯 개나 되는 자물쇠를 한 번에 갈라 낸 나는 철궤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건…….’
철궤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벼웠던 무게만큼이나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단출했다.
낡다 못해 거의 삭아 버린 죽간(竹簡)이 십여 개.
거기에 더하여 비교적 최근에 채워진 듯, 희고 깨끗한 종이 뭉치들과 자그마한 비단 주머니 하나.
‘뭐지?’
어째서인지 그것들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동천마군의, 굳이 말하자면 유품(遺品)이나 다름없다.
분명 단순히 무게나 형태로는 측정할 수 없는 물건일 터였다.
황금보다 더 값지고, 화약보다도 위험한 무언가가.
그리고 내가 그 직감이 사실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불과 촌각(寸刻)이었다.
스륵.
가장 맨 위에 놓여진 종이 뭉치, 아직 새하얀 그것을 묶은 끈을 풀자마자 한 줄기 벼락이 정수리를 관통했으니까.
“……!”
나도 모르게 덜컥 굳어 버린 전신.
떨리는 동공으로 종이를 가득 채운 활자들을 읽어 내려가던 그때,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혁무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저기, 조장님. 아무래도 못 데려오겠…….”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듯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음성.
나는 격동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러와.”
“예?”
“다들 불러오라고. 어서!”
“……!”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혁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