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41
#940화
모래 먼지를 머금은 서늘한 밤바람에 초원의 게르가 몸을 떨던 그때, 만 리 밖에 세워진 거대한 성벽 뒤의 사람들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기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이른, 사방을 에워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두두두!
깊은 밤을 깨우는 거친 말발굽 소리.
무려 백여 기에 이르는 전령(傳令)들은 그 어떤 절차도 없이 일곱 개의 문을 빠져나갔고, 앞서 날려 보낸 수십여 마리의 전서응(傳書鷹)이 그러했듯 제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명령을 내린 한 사람은, 파리한 안색으로 속속들이 도착하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모든 전령들이 지금 막 칠문(七門)을 통과했습니다!”
“육부(六部)에 속한 중신들에게 지엄하신 황명을 하달했나이다!”
“도찰원(都察院)이 폐하의 명을 기다립니다!”
“한림원(翰林院)과 통정사(通政司)의 신료들이 칙령을 준비 중입니다!”
“오호도독부(五虎都督部)에서 보고드립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즉각 군함 삼백 척을 비롯한 수군 십만과 금위군을…….”
“그만.”
불현듯 흘러나온 황제의 한 마디에, 주위의 모든 소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천자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비록 이제 고작 삼대(三代)에 접어든 대국의 역사였으나, 작금의 황제가 지닌 힘은 천하를 통일한 태조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소란스럽구나.”
황제의 낮은 뇌까림에, 모두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엎드려 부복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죽여 주시옵소서!”
스륵.
작게 고개를 내저은 황제는 말없이 길게 늘어진 옷소매를 펄럭였다.
무언의 명령을 읽어 낸 이들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뒷걸음쳐 사라지자, 드넓은 대전(大殿)에는 어느새 단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무슨 말만 하면 죽여 달라고 난리로군. 일각만 더 저런 소리를 들었다면 짐이 스스로 혀를 깨물었을지도 몰라.”
씁쓸하게 웃는 황제의 모습에, 금의위 지휘사 백연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어차피 농담인데 뭐 어떤가. 더군다나…….”
황제는 비스듬히 옥좌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여전히 창백한 안색이었으나,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그의 안광은 야광주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이로군. 이리도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이야.”
백연은 황제의 말에 십분 동의했다.
암천(暗天).
이름부터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저 반역도당의 무리는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고, 또한 치밀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과거 그가 선황을 모시던 시절, 머나먼 서쪽 땅으로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어느 종교 세력보다도 더.
“오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마교(魔敎)라 불리는 자들이 중원으로 향한 것이.”
“정마대전(正魔大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황제는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비록 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지만, 물경 십만에 달하는 사이비(似而非)들이 중원 땅에 발을 디뎠다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들이 단지 듣기 좋은 말에 홀린 촌무지렁이들이 아니라, 굳건한 신앙심과 창칼로 무장한 군대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마교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정파에 속한 무림인들이 선황 폐하께 주청을 드렸습니다. 저들은 대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외적(外敵)이니, 황군을 일으켜 토벌을 명해 달라는 청이었지요.”
“짐도 알고 있네.”
황제가 백연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참전에 가장 크게 반대한 이가 바로 백연, 자네라는 것도.”
백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조정의 중신들을 며칠간 치열한 갑론을박을 주고받았고, 토벌령을 진지하게 고심하던 선황은 이전에 보인 적 없던 백연의 간곡한 모습에 뜻을 접어야만 했다.
“소장이 왜 그토록 반대했는지, 폐하께서는 짐작하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크게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하네. 그중 첫 번째는 마교가 대국의 힘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창공(廠公), 그자 때문이었겠지.”
“맞습니다. 저와 달리 창공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외적을 물리치자고 주장했습니다.”
“옳은 선택이었네. 그때 아바마마께서 창공의 손을 들어 주었다면, 대국 또한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했을 테니.”
“황실의 힘을 약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반대할 수밖에 없었지요.”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도 상처 없는 승리는 없다.
한 사람의 무인이기 이전에 일군을 이끄는 장수였던 백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 힘을 다해 대국의 참전을 막았다.
창공. 아니, 동천마군은 그 무렵부터 이미 요주의 인물이었으니까.
물론 그의 반대로 인하여 수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희생되었지만, 백연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와 대국을, 더불어 백성을 위한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무림맹과 마교라는 두 바위가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부딪치는 것을 지켜보다가 개입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결과는, 공멸(共滅)에 가까운 정파의 승리였다.
“그때, 소장은 차라리 마교가 승리하길 바랐습니다.”
백연의 말을 들은 황제가 혀를 찼다.
“자네, 오늘따라 지나치게 솔직하군.”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파에 속한 무림인 중 상당수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어 토벌할 명분이 없지만, 살아남은 것이 마교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커다란 바위는 옮기기조차 버겁다.
하지만 수없이 깨지고 부딪친 끝에 남은 돌멩이라면.
그리고 그 돌멩이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만큼 뾰족하다면, 백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망치를 들어 그것을 부쉈을 것이다.
무림(武林)이라는 무법자들의 울타리를 완전히 허물어트렸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네 말대로 되었다면 오늘날에 이르지도 못했겠지.”
황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넓은 대전을 울렸다.
맞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이지만, 바로 그 무림인들의 도움으로 역적들을 처단하고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순을 바로잡을 때였다.
“온 힘을 다해 도울 생각일세. 그들을,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해서.”
쿵.
백연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곧 정마대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혈풍(血風)이 몰아칠 것이다.
암천은 마교보다 강력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존재였다.
단순히 무림에만 국한되지 않은, 천하(天下)를 뒤엎을 전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천하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께 감히 아뢰옵건대, 신에게 명을 내려 주소서.”
깊은 밤 진태경으로부터 전달받은 정보는 뜻하지 않은 불행이었으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끝마쳐 두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수백 척의 함대와 수천의 장수.
그리고 황실의 깃발을 휘날리는 수십 만의 대군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금의위 지휘사 백연에게 명한다.”
준엄한 음성과 함께, 황제는 천천히 병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금빛 수실로 용을 아로새긴 새하얀 침의(寢衣)가 아닌, 육중한 갑옷을 걸친 그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대전을 가로질렀다.
철컥, 철컥.
한 걸음. 또 한 걸음.
옥좌를 내려온 황제가 백연을 손수 일으켜 세우며 입을 열었다.
“짐의 친정(親征)을, 전군에 알려라.”
“……!”
동요를 감추지 못한 백연의 눈동자가 일순간 파르르 떨렸다.
황제의 친정이 가진 파급력 때문만이 아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제의 각오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폐하.”
그러나 백연이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끝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황제의 모습을 본 충신은, 그저 먹먹한 심정이 되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으니.
“신, 금의위 지휘사 백연……지엄하신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은 황제는 백연을 지나쳐 나아갔다.
활짝 열려 있는 철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아직도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미래처럼.
‘그래도, 이 또한 나쁘지 않군.’
비록 몸뚱어리는 죽어가고 있으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친정.
침대가 아닌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비극이 아닌 축복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잠시나마 삶의 의지를 되살릴 수 있었던 것 또한.
“가세, 백연.”
황제는 죽어 가는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짐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나는, 어느 무엄한 무뢰배를 배웅해 줘야 하지 않겠나.”
* * *
한 시진.
그것이 동천마군이 남긴 철궤(鐵櫃)를 처음 손에 넣은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귓가로 흘러들어온 혁무진의 보고에 나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평소와는 달리 깊게 가라앉은 녀석의 눈빛과 표정이,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듯했다.
“가자.”
그 외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짤막한 대답과 함께 전각 밖으로 나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움직였다.
이미 한 차례 운기조식을 했음에도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보름.’
고작 보름.
그것이 중양절(重陽節)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짧을 수도 있다.
동천마군이 보관하고 있던 전서에는, 암천의 본대가 북부 초원을 통해 산서성을 침공하는 시점은 중양절 이전이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어쩌면 열흘. 아니, 당장 내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삼켰다.
급박한 것을 넘어 위급하다.
이곳, 황도가 위치한 절강성에서 산서성까지의 거리는 무려 만 리.
제아무리 황실의 전서응이 빠르게 움직이더라도 최소 열흘은 걸릴 수밖에 없는 거리다.
‘과연 내가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까.’
모두와 함께 황궁을 나서면서도 마음속의 의구심은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 내 모습을 줄곧 물끄러미 바라보던 적천강이 문득 입을 열기 전까지는.
“한 오십 년쯤 됐나? 벽력도왕(霹靂刀王) 그놈과 사소한 시비가 붙어 크게 한판 싸웠던 적이 있었지.”
마치 혼잣말이라도 하듯, 내 시선을 슬쩍 피한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한참 아래로 보던 놈이라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막상 손을 섞어 보니 상당히 강하더군. 내색은 안 했지만, 상당히 놀라웠다.”
말고삐를 쥔 채 묵묵하게 나아가던 궁성이 말을 받았다.
“그는 강한 사람이에요. 아마 당신이 아니었다면 십왕(十王) 중에서도 으뜸이었겠지요.”
“음. 역시 그랬겠지?”
고개를 주억거린 적천강이 나를 힐끔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긴, 하북팽가가 괜히 오대세가겠나. 그만한 저력이면 어떤 놈들과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지. 하북은 물론 산서 쪽 상황도 훤히 들여다볼 만큼의 정보력도 있고.”
그제야 문득 알 것 같았다.
이 뜬금없는 대화가, 전부 나를 안심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려는 실소를 삼킨 그 순간이었다.
“그래, 인사도 없이 이대로 떠날 속셈이었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