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42
#941화
끝없이 펼쳐진 성벽과 북쪽의 출입을 통제하는 거대한 철문.
그리고 용이 아로새겨진 황실의 깃발을 높이 곧추세운 채 좌우로 시립한 일천의 금의위와 여러 조정 대신들의 선두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 인사도 없이 이대로 떠날 속셈이었나?”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나는 당황했고, 곧이어 웃고 있는 그를 따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셨습니까.”
“짐이 귀중한 시간을 뺏는 건 아니겠지?”
“귀중한 시간이지만, 아주 잠시뿐이라면 귀중한 만남에 쓰겠습니다. 때마침 직접 전해 드려야 할 것도 있었고요.”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황제가 입맛을 다셨다.
“마치 짐이 기다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어투인데.”
“솔직히 그것까진 예상 못 했습니다만, 이렇게라도 뵙게 되니 참 반갑네요.”
“그런 입 발린 소리는 집어넣게. 자네한테는 안 어울려.”
짐짓 눈살을 찌푸린 황제가 자신의 어깨너머를 턱짓하며 덧붙였다.
“평소처럼 솔직하게 대답하지 그러나. 실은 짐이 아니라 저들이 반가운 것이라고.”
맞다.
황도의 북문(北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저건.’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들.
어쩌다 보니 황실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자주 본 얼굴이 된 금의위 천호 정호군은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 황제와 더불어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 할 백연과 홍진은 물론, 지난 며칠간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상산왕, 아니 황태제(皇太弟).’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한때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저 아이가 지금은 하나뿐인 가족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사실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얼굴로 말안장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주표에게 살짝 웃어 보인 나는, 황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앞서 하신 말씀대로,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도 됩니까?”
“아니, 됐네. 생각이 바뀌었어.”
“저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확실히 폐하보다는 저 사람들이 더 반갑네요.”
“이자가 감히……!”
억눌린 음성과 동시에 삽시간에 가라앉는 공기.
그러나 순간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황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 신기하군. 아니, 희한할 정도야. 어찌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지존에게 이리 오만무례하게 굴 수 있는가?”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한낱 무뢰배에 불과한지라 호패도 없고 부모님도 따로 계십니다.”
거침없는 대답에 곳곳에서 헛숨 삼키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이 자리에 왜 왔는지 모를 조정 대신들은 이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황제는 여전히 웃고 있을 따름이었지만.
“확실히 알겠네. 자네는 짐의 신하도, 대국의 백성도 아니라는 것을.”
황제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만 정(正)과 의(義). 그리고 협(俠)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니, 가히 일세의 영웅이며 만인의 경애를 받아 마땅할 터.”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말을 몰아 코앞까지 다가온 황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자신의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스륵. 툭.
단단히 매어져 있던 끈이 풀어진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망토를 끌러 내게 내민 황제가 흐릿하게 웃었다.
“뭐 하나. 받지 않고.”
“……!”
“……!”
보이지 않는 파장이 모두를 휩쓸었다.
특히 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조정 대신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황금빛 용이 수놓아진 망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폐, 폐하!”
“그, 그것은!”
사방에서 빗발치는 외침.
그러나 그 다급한 목소리들은, 황제의 짤막한 한마디와 함께 바람에 파묻혀 사라졌다.
“그만.”
주위를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 속,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어서 받게. 별것 아닌 짐의 선물일세.”
재촉하듯 말하는 황제와 그런 그의 손에 들린 망토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그저 눈만 깜빡였다.
이 망토가 단순한 하사품이 아니라는 것쯤은,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이건…… 충분히 별거 같은데요.”
결코 평범한 망토가 아니다.
황제가 직접 착용했던 것부터가 도저히 평범한 물건일 수 없지만, 그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용.
망토에 황금빛 수실로 수놓아진, 한 마리의 용.
그것이 곧 천자와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장이라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기가 차서 대답했다.
“아니, 모를 수가 있습니까?”
“안다니 다행일세. 그럼 짐의 손이 떨어지기 전에, 더더욱 이 귀중한 선물을 받고 싶어질 테니.”
“잠시, 잠시만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는 머뭇거렸지만, 황제의 태도는 단호했다.
“부디 거절하지 말게. 그랬다간 아주 후회할 만한 일이 벌어질 거야.”
“예?”
멍하니 반문하는 내게, 황제가 짐짓 준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이것조차 거부한다면, 짐은 아주 섭섭해질 걸세.”
“그게 무슨.”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안심하게. 고작 이런 일로 설마 황실의 은인이 불편하게 만들겠나?”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는 건, 그저 제 기분 탓입니까?”
“정확하군. 맞네, 자네 기분 탓이야.”
나와 황제는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실소를 흘렸다.
비록 내가 그를, 그를 내가 알게 된 시간은 짧았으나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서로를 닮아 있다는 것을.’
나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 역시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다.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목숨을 판 돈으로 내던졌고,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서 있는 장소와 보이는 풍경만이 다를 뿐. 내가 그렇듯이 황제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도움에 감사할 줄 알고, 농담을 좋아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 한 사람.
스륵.
나는 손을 뻗어 황제가 내민 망토를 받아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공손히 포권 지례를 취했다.
“귀한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 어울리는군. 하지만 한 가지가 부족해.”
망토를 두른 내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갑옷 사이에서 번쩍이는 은패(銀牌)를 꺼내어 내밀었다.
다음 순간 두 귀를 의심케 만드는 한 마디와 함께.
“천자의 이름으로 명하니. 태원진가의 진태경을 상산후(上山侯)에 봉한다!”
공력이 실린 목소리가 깊은 밤을 깨웠다.
끝없이 퍼져 나가는 그 외침에,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황제의 행차를 구경만 하던 백성들이 금의위들의 손에 들린 횃불을 향해 모여들었다.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황제의 준엄한 외침을 들으며.
“산서성의 태원(太原)을 포함한 혼주, 양천, 정양, 진중, 태곡, 교성 등 십여 개 현을 봉토로 내리며, 식읍(食邑) 일만 호와 금은 십만 냥. 그에 더하여…….”
스릉.
돌연 허리춤에서 솟구친 섬광. 황실의 보검을 뽑아 든 황제가 안광을 번뜩이며 외쳤다.
“금일 이 시간부로 금의위 천호(千戶)의 직위를 내리니, 속히 일천의 금의위를 이끌고 황명에 따라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외적(外賊)을 토벌하라!”
“……!”
“……!”
숨이 막힌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아니다.
좌우로 시립한 일천의 금의위가 힘차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각자의 병장기를 부딪치고, 갑옷을 두드렸다.
황제를 위하여.
아니, 나를 위하여.
‘아.’
나는 차오르려는 신음을 삼켰다.
이제야 깨달았다.
황제가 일천이나 되는 금의위를 거느리고 이곳에서 나를 기다렸던 목적은, 단지 호위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들은 황제의 명을 따라 결성된 토벌군이었다.
동시에 나를 위해 준비한 지원군이었다.
암천에 맞서 산서성을, 태원진가를 지켜 낼 방패이자 검.
와아아아아!
띠링. 띠링 띠링.
귓가가 먹먹했다.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그리고 모두가 내지르는 함성과 환호로.
그리고 그 중심에서, 황제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성공하면 군왕이요(成卽君王). 실패하면 역적이라(敗卽逆賊).”
혁명을 꾀한 것은 둘이나, 살아남은 것은 하나다.
역적들을 뿌리 뽑고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은 황제는, 떠나는 이들을 위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잊지 않았다.
“이렇듯 모든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 법. 어떤가, 짐이 준비한 선물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대답했다.
“끝내줍니다.”
“열후(列侯)의 반열에 올랐으니 마땅히 짐의 신하여야 할 것이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툭.
황제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몸 안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 가고 있음에도,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
“지금껏 해 왔던 것처럼, 그렇게 행하라.”
시선은 늘 올바름(正)을 바라보고, 뜻과 행동은 의협(義俠)에 따르라.
흐르는 물처럼 이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황제가 나직이 덧붙였다.
“짐의 백성도, 신하도 아닌…… 단지 이 천하(天下)를 밝게 빛내는 한 사람이 되어 주게.”
깊게 가라앉은 그 한마디는, 마치 마지막 유언처럼 귓가를 울렸다.
* * *
만남과 이별은 떼놓을 수 없는 단어다.
만남이 있다면 이별이 있고, 이별 뒤에는 또 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의 순간은 늘 씁쓸하고 아쉽다.
특히나, 크게 의지했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어린아이에게는 더더욱.
툭. 투둑.
말안장을 적시는 물기.
황제는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막내아우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떠나간 이들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도 슬프더냐.”
“아닙, 아닙니다.”
주표는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어린아이는 울어도 되지만, 황태제는 다르다.
대국의 후계자로서 전란과 맞서야 하는 주표는, 결코 울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그거 참 희한하구나.”
“예?”
“짐은 아쉽기만 하거늘, 지학(志學)도 되지 않은 너는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는지.”
순간 놀라서 고개를 든 주표의 눈동자에, 웃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표아야.”
대답도 잊은 채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주표를 향해, 황제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벌써부터 애써 삼킬 필요는 없다.”
“……!”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하나, 그렇게 쌓인 인내는 언젠가 독이 되는 법이니.”
“혀, 형님. 아니 폐하.”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거라.”
툭.
어색한 손길로 주표의 머리를 쓰다듬은 황제는 말고삐를 돌려 돌아섰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한마디와 함께.
“짐도, 너도. 결국 사람이니라.”
이내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황제는 생각했다.
주표만큼은, 막내아우만큼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짐은…… 너무나도 뒤늦게 깨달았지.’
그리고 황제의 입가에 흐릿하게 웃음이 맺힌 그 순간. 서서히 닫혀 가는 거대한 철문 너머로 한 마리의 준마가 달려왔다.
‘잠깐. 저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 황제는 되돌아온 한 사람을 보며 물었다.
“놓고 간 것이라도 있는가? 신의(神醫).”
“예.”
신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환자를 두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