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43
#942화
환자를 두고 왔습니다.
신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대답에, 황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설마.’
불현듯 숨이 막혔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완전히 비워 냈다고 생각했던 마음속에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른다.
침실이 아닌 전장에서 죽고자 다짐했던 자신의 각오가 흔들리는 것을, 황제는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러나 황제는 내심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한 인간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은 위기지만, 끝내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은 희망이니까.
그렇기에 황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잔잔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신의를 애써 외면했다.
“……병영에 합류할 생각이라면 구태여 말리지 않겠네. 머지않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테니, 그대의 의술이 크게 빛을 보겠지.”
“폐하.”
뭐라 말을 이으려는 신의를 남겨 둔 채, 황제는 조용히 돌아섰다.
촌각이 아쉬운 것은 태원진가를 지키기 위해 떠난 진태경 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삶.
길어야 몇 달에 불과한 그 짧은 시간 동안, 황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이었다.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가 떠난 후에도 이승에 남아 있을 소중한 이들을 위해.
‘그것이 짐의 유일한 사명이다.’
황제가 잠시 흔들린 각오를 다잡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압니다. 폐하의 그 마음.”
저벅.
거침없이 나아가던 황제의 발걸음이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그런 그의 귓가로 신의의 음성이 계속해서 전해졌다.
“찰나의 희망이 두려우시겠지요. 헛된 희망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으니.”
잠시 침묵하던 황제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는 신의와 마주했다.
“잘 아는군.”
“원치 않게도, 그리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대는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생사의 기로(岐路)에 선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났을 테니.”
“단지 그뿐만은 아닙니다.”
“하면?”
문득, 신의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흐릿해졌다.
“아주 오래전, 어느 젊은 목수가 있었습니다.”
“목수라. 그자 또한 죽을병에 걸려 자네를 찾았었나?”
“정확히는, 역병에 걸린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처자식이라.”
“열이 펄펄 끓는 안사람과 두 아이를 지게에 짊어지고 꼬박 사흘 밤을 새워 가며 산을 올랐다고 하더군요. 인근 화전민촌에 머무르고 있다는 용한 의원을 찾아가기 위해서.”
황제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산을 오르는 목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뇌까렸다.
“고되었겠군. 아주 많이.”
“폐하의 말씀처럼, 분명 그랬을 겁니다.”
“하나 그 목수는 피로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걸세. 처자식을 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으니.”
신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끝끝내 목적지에 다다른 후에야 지게를 내려놓고 쓰러졌지요. 그리고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앓았습니다.”
“하여, 그대는 목수의 처자식을 치료해 주었나?”
“불행하게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작게 탄식하는 황제를 향해, 신의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제가 마침내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모든 것이 늦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
“그렇기에 잘 압니다. 희망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 아래 낭떠러지에는 어떠한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지.”
황제는 침묵했다.
그리고 눈앞의 늙은 의원을, 오래전 역병으로 처자식을 잃고 새로운 길을 택한 젊은 목수를 한참을 응시하다 불현듯 입술을 뗐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진정으로…….”
숨기지 못한 격동이 담긴 떨리는 목소리로,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그 한 마디를 쥐어 짜냈다.
“짐을 치료할 방도를 찾았단 말인가.”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에 빛이 깃들고, 목소리에는 희망이 묻어 나온다.
신의는 그런 황제를 향해 길게 읍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아니, 진 공자의 도움으로 하나뿐인 생로(生路)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
진태경.
생각지도 못한 그 이름에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앞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진태경의 얼굴을 떠올리며, 들리지 않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잊지 않았군. 짐과의 약속을.’
진태경을 떠나보내면서도 원망하지 않았다.
약속에 관하여 일언반구 없이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지금껏 황실을 위해 해 준 일들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것이 이 나라의 군주로서, 아우를 둔 형으로서,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진태경은 끝끝내 황제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희망을 건네어 돌려보냈다.
‘이 빚을 갚으려면, 더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상관없다.
진태경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응할 수 있었으니까.
실소와 함께 눈을 뜬 황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해 보게. 짐이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순간, 신의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왠지 모르게 어색해지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러나?”
“그러니까. 음, 그것이…….”
“망설일 필요 없네. 그대의 말이라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따를 테니.”
“송구하오나, 아무리 그렇다 하셔도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황제는 자꾸만 머뭇거리는 신의의 모습에 충분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늘 있는 일이다.
그는 천하의 주인인 황제였고, 황실의 어의(御醫)들은 황제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이러한 후환(後患)은 천하제일의 의원이라고 한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관절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모르나, 그대가 생각하는 그 어떤 불상사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걸세. 짐의 이름으로……. 아니, 선황들의 무덤에 걸고 맹세하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다독이는 황제의 모습에, 줄곧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리던 신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신 말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십니까?”
“물론일세. 지금부터 짐은 천자이기 이전에 그대의 치료가 필요한 병자이니, 어떤 것이라도 믿고 따르지.”
“좋습니다.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 역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황제는 깨달았다.
왜 신의가 이토록 망설였던 것인지.
더불어 그가 앞서 말했던 ‘약간의 오해’가 얼마나 축소된 표현이었는지.
“사실, 폐하를 살릴 방도는 없습니다.”
“……?”
“치료를 위해서는 일단 한 번 죽으셔야 됩니다. 그것부터가 시작……. 폐하?”
황제는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린 보검이 보였다.
“아니, 이게 갑자기 왜.”
“폐하, 폐하?”
“미안하네, 신의. 하지만 이건 짐의 의지로 뽑은 것이 아닐세. 검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어.”
“폐하아!”
지나가는 역적도 안 믿을 소리와 함께 검을 들고 다가오는 황제를 보며, 신의는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만일을 대비하여 미리 꺼내 두었던, 몇 시진 전 진태경이 건네주었던 ‘그것’을 황제를 향해 내밀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던졌다.
탁.
황제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날아드는 물건을 잡아챈 그 순간.
촤르르륵!
‘그것’을 고정하고 있던 끈이 풀리며 낡다 못해 반쯤 삭아 버린 죽간(竹簡)이 펼쳐졌다.
“……이건.”
찰나의 의문.
그러나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는 글자를 확인한 황제의 눈동자가, 이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모산파(茅山波).
백환강시공(白幻僵尸功).
그것은, 더는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사문의 옛 뿌리였다.
* * *
두두두두두!
거센 말발굽 소리가 어둠 너머로 울려 퍼진다.
한혈마(汗血馬)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준마는 그 명성답게 단 한 순간도 발을 멈추지 않았고, 나를 포함한 모두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저 언덕을 넘어가면 덕청현(德淸縣)이에요!”
불현듯, 세차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사이로 주화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불과 한 시진.
황도를 떠난 지 고작 한 시진 만에 두 번째 현(縣)에 도달했다는 희소식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아직이다. 지금 이 속도라면, 정오까지 달려도 안휘성에 닿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해.’
턱없이 부족하다.
속도도, 시간도.
약 반 시진 정도를 앞서 황도를 빠져나간 황실의 전서응과 전령들조차도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정호군!”
공력이 실어 터트린 부름에, 투구를 깊게 눌러쓴 정호군이 말을 몰며 앞서 나왔다.
“말해라.”
“산서성까지 예상되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쉴 새 없이 내달리는 말안장 위에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정호군이 짧게 대답했다.
“최소 열흘. 길면 보름.”
자그마치 닷새 차이.
게다가 보름이라는 저 수치도 결코 느긋하게 잡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더 자세히.”
“중간중간 역관(驛官)이 준비된 현에서 제때 말을 갈아타고, 최소한의 휴식을 취한다는 가정하에 보름이다.”
“제기랄. 그럼 열흘은?”
“그건 최소한의 직선거리로만 이동했을 경우다. 험준한 산맥이나 강을 넘어야 할 테니 때에 따라 말은 버려야 할 테고…….”
문득 말꼬리를 흐린 정호군은 말과 한 몸이 되어 맹렬하게 내달리는 일천의 금의위와, 그 뒤를 따르는 화룡각 대원들을 힐끗 바라보며 덧붙였다.
“휴식은 꿈도 꿀 수 없겠지.”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우려는 충분히 전해졌다.
아니, 나 역시 모를 수 없었다.
‘산서성에 도착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니까.’
암천이 산서성을 침공하는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하늘의 도움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도착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될 가능성도 차고 넘쳤다.
‘이미 암천이 산서성을 점령했거나, 혹은 전투가 막 시작된 시점에 도착한다면…….’
뒷말은 필요 없다.
나는 아까부터 줄곧 입안에 맴돌던 욕설을 씹어 뱉었다.
“이런 제기랄.”
서걱!
길가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잘라 낸 정호군이 입 안에 들어간 잎사귀를 뱉으며 대꾸했다.
“심정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단지 그 말을 하기 위해 부른 건 아닐 텐데.”
듣는 것만으로도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냉정한 말투에, 나는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개 같네. 빌어먹을.”
“좋아. 신세 한탄은 다 했나?”
“정 없는 새끼.”
“…….”
“공감도 더럽게 못 해 주는 놈. 그러니까 친구 하나 없지.”
“……아니, 그건 신세 한탄이 아닌 것 같은데.”
“전혀. 단순한 신세 한탄이었어.”
내 단호한 대답에 정호군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살짝 슬퍼 보이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된다면.’
정호군의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른 결단을 내렸다.
“덕청현을 지나는 즉시 분산한다. 병력이 너무 많아.”
“병력을 나누겠다는 건…….”
“너희 전부. 그리고 세 명.”
“뭐?”
반문하는 정호군에게, 나는 저 멀리 앞서가는 두 인영을 가리켰다.
“먼저 도착하는 건, 셋으로도 충분해.”
혹시 들어 봤는지 모르겠다.
좌화왕 우궁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