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46
#945화
크르륵. 큭.
이걸 뭐라 불러야 할까.
신음? 아니면 괴성?
그게 무엇이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저 장한이, 평범이라는 단어와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
“이자는……?”
남궁룡이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장한을 바라보았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가 도착하기 전, 장한은 우연히 마주친 적천강에게 뭣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일권에 기절한 상태였으니까.
“산적입니다.”
“산적?”
“예. 그중에서도 이거죠.”
대답과 함께 머리를 툭 두드리자, 즉각 의미를 알아들은 남궁룡의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가 왜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겠군.”
동시에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장한을 응시했다.
“저것이 평범한 산적 우두머리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아아아.
열기를 머금은 숨결이 주위를 감싸 안는다.
악문 잇새 사이로 수증기와도 같은 입김을 뿜어내는 장한을, 나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확히는 지금 막 그의 정수리 위로 떠오른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을.
[Lv.60 장삼]흔해 빠진 이름에, 척 봐도 산적 같은 얼굴.
하지만 잠깐 사이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극명했다.
허옇게 드러난 흰자위나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입김뿐만이 아니라, 이름 앞에 붙은 숫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다.’
물론 이러한 레벨 변동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반박귀진(返朴歸眞)의 경지에 올랐거나, 그에 준하는 고수들은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기에 [기감]으로도 정확한 레벨을 파악하기 어려우니까.
그러나 눈앞의 산적 두령은 다르다.
저자는 반박귀진의 고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달음을 얻어 레벨이 상승한 경우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무려 20레벨씩이나 한 번에 오르는 경우는 없지.’
40레벨에 불과했던 촌구석 산적 두령이 스무 계단이나 껑충 뛰어오른 기현상.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 좀 해 보지?”
그리고 물음을 건넨 그 순간.
후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커다란 주먹이 머리 위를 덮쳤다.
쾅!
단 한 걸음.
옆으로 슬쩍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지면이 푹 꺼지고 풀과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기절하기 전이었다면 결코 보이지 못했을 위력.
나는 어느새 상당한 공력까지 지니게 된 놈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거, 완전히 맛이 갔구만.’
허옇게 드러난 흰자위를 보면서 내심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거의 이성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어쩌면 기절 상태에서 깨어난 것조차 자의식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정신이 멀쩡한 놈이라면, 죽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내게 덤벼들지는 않을 테니까.
“크아아아아!”
“……이런.”
이쯤 되니 별수 없다.
나는 또다시 맹수처럼 달려드는 놈의 품으로 파고들어, 부드럽게 손을 내뻗었다.
툭.
가슴과 맞닿은 일장(一掌).
그와 동시에 애써 억누르고 또 억누른, 미약한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뛰쳐나왔다.
퍼엉!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대포알처럼 튕겨 나간 팔 척의 거구가 공간을 가르며 나무에 처박혔다.
콰아아아앙!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너머, 미동도 없이 널브러진 신형을 한 손으로 붙잡아 질질 끌고 오는 내 모습을 본 산적들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시간 없으니 긴말 안 한다.”
경악과 두려움 속,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는 거 다 털어놔. 살고 싶으면.”
* * *
남자들은 저마다의 로망을 가슴 한구석에 품은 채 살아간다.
그것이 억 소리가 절로 나는 빨간 스포츠카일 수도 있고, 성공한 사회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서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십 대 시절, 나는 바이크를 향한 로망이 있었다. 여자친구를 뒷자리에 태우고 실컷 밟아 보는 게 꿈이었다.
물론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자친구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잔인한 사실을.
그리고 잘 빠진 바이크도, 뚜껑 열리는 빨간 스포츠카도 아닌 친환경 사륜구동 준마에 올라탄 채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허리 좀 꽉 붙잡아. 이 새끼야. 말안장에서 떨어지고 싶어?”
“예, 예!”
“그렇다고 너무 세게 잡지 마라. 살 찝히면 너도 죽는다.”
“히익! 죄송, 죄송합니다!”
두두두두!
거센 말발굽 소리와 울음 섞인 목소리가 뒤섞인다.
남궁룡과 관부에서 이미 손을 써 두었는지, 쉼 없이 말을 몰아 내달리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이라고는, 자꾸만 등 뒤에서 훌쩍이는 사내놈뿐이다.
“그래서, 장퀴네스.”
“……예.”
내게 지게 잃은 나무꾼 행세를 하다가 본업을 들켰던 산적, 장일이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 년이 넘도록 산적 생활을 했다는 장일은 무리 내에서의 위치는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다른 산적들에게 없는 특이사항이 존재했다.
“십 년 전부터 그놈을 알고 있었다고?”
당연하게도 여기서 말하는 ‘그놈’이란, 지금쯤 남궁세가로 끌려가고 있을 산적 두목이었다.
“예. 소인이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요. 한때는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었지요.”
“산적 주제에 형제는 니미. 아주 지랄 염병을 떠는구먼.”
나란히 달리는 와중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적천강의 소신 발언에, 미간을 좁힌 궁성이 작게 혀를 찼다.
“괜히 끼어들지 말고, 마저 얘기하게 두죠.”
“왜? 이젠 혼잣말도 못 하나?”
“당신은 정말 여전하군요. 머리털만 사라졌지,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
“지금 말 다 했나?”
적천강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최근 들어 봄철 새싹처럼 슬금슬금 고개를 내미는 머리카락을 애정 어린 손길로 가꾸고 있던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두 분은 그만하시고. 넌 계속 얘기해.”
초절정 고수 두 명이 차가운 눈빛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말은 계속해서 달린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장일이 입을 열었다.
“하, 하여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두령을 따라다녔습니다. 안휘성으로 산채를 옮긴다고 하자 모두가 미쳤다며 떠날 때에도, 소인은 믿음과 의리 하나만으로 따라왔습죠.”
“안휘성으로 산채를 옮겼다고?”
“예에. 원래는 호북(湖北) 인근이었는데, 두령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결정해 버렸지 뭡니까. 다들 반발이 극심했지요.”
그때가 떠오르는 듯, 입맛을 다신 장일이 말을 이었다.
“사실 소인도 말은 안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이 바닥 생활 접고 떠날 생각까지 했습니다요.”
“어째서? 산채를 옮기는 게 그 정도로 큰일인가?”
“어휴, 모르시는 말씀을. 짐 싸 들고 가는 거야 잠깐의 수고로움이니 그렇다 쳐도, 안휘에는 남궁세가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언뜻 듣기에도 장일의 말이 영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유가 못 되지. 원래 자리 잡고 있던 호북에도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있었을 텐데.”
장일이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명문 대파가 몇 개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인근에 어떤 명문 대파가 있느냐를 봐야지요.”
“아.”
“무당파나 제갈세가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라, 어지간해서는 피를 보지 않고 마무리 짓습니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문득 말꼬리를 흐린 장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래서인지 안휘성의 무림인들도 인정사정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일이 틀어지면 목 날아가는 것도 각오해야지요.”
우습다 못해 기가 찬 일이다.
산적 주제에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져 가며 일을 하다니.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두령의 선택은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남궁세가로도 모자라 황도가 인접한 절강과 안휘의 경계선에 산채를 차렸으니까.
“그렇게 산채를 옮긴 시점이 언제지?”
“아마…… 석 달? 그쯤 된 것 같습니다.”
“그럼 함께 있던 산적들은?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전에 있던 놈들은 다 도망간 것 같은데.”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한다더니, 막상 와 보니 녹림맹 소속도 아닌 주제에 안휘성에서 산적질을 하는 간 큰 놈들이 있지 뭡니까.”
“그래서, 그놈들을 새롭게 휘하로 들였다?”
“그렇지요. 어느 날 저만 남겨 두고 홀로 떠나더니, 작은 규모의 산채 두 개를 흡수해서 돌아왔습니다.”
장일이 서글프게 덧붙였다.
“덕분에 여기 와서도 말단 노릇이나 하고 있지요.”
나이 든 중늙은이의 신세 한탄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 나는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아무리 규모가 작다지만 산채 두 개를, 그것도 단신으로?’
당연히 개소리다.
레벨이 오르기 전에 봤던 놈의 모습은, 어떻게 쌓았는지 모를 콩알만 한 공력과 타고난 용력(勇力)만 믿고 날뛰는 어중간한 이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잘 쳐줘야 일류 문턱. 그 정도로는 턱도 없지.’
수십 명이나 되는 다수를 상대로 승산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초일류 어림부터다.
그것도 적들의 수준이 최소 한 수 이상 뒤떨어진다는 전제하에.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
“예?”
“네가 두령으로 섬기는 그놈. 분명 그렇게 강한 놈은 아니었을 텐데? 갑자기 무슨 자신감으로 안휘성으로 옮기고, 두 개나 되는 산채를 규합했지?”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장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내심 희한하긴 했습니다. 소인의 기준에서야 강하지만, 두령의 무공이 딱히 강한 것은 아니어서…….”
천하 어느 곳이든, 일대에서 두각을 드러낸 산적은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제법 뛰어난 무공을 믿고 깝치다가 명문 대파의 제자들에게 토벌당하거나, 녹림맹(綠林盟)에 소속되거나.
‘수적의 경우에는 장강수로맹이고.’
자고로 대기업 이기는 골목상권은 없는 법이다.
녹림맹의 인증을 받은 공식 가맹점주가 되면 상당한 세금을 바쳐야겠지만, 대놓고 패악질을 벌이지 않는 이상은 명문 대파의 토벌은 피할 수 있다.
단순한 도적놈에서,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공생(共生)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놈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지.’
지난 십 년 동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놈이, 황도가 위치한 절강성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산채를 차렸다.
아무리 중양절이라는 대목을 노리고 한탕을 취하려 한다 해도 이건 상식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갑자기 훌쩍 강해진 그 모습처럼.
‘이건 기연(奇緣)이라도 부를 수도 없어.’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나로 하여금 이미 일 년도 넘게 지난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풍양. 적풍단주 풍양.’
항산검문을, 아니 산서성을 노렸던 마적단의 두목.
그리고 놈에게 그 거대한 야망을 안겨 주었던 한 가지 물건.
‘잠력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