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47
#946화
시간은 공평하다.
산 것에게도, 죽은 것에게도, 심지어는 형체조차 없는 무언가에도.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 불현듯 뇌리를 스친 누군가의 이름은 조금씩 색이 바래져 가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 그날에 있었던 치열한 혈투와, 승리 후 우연히 손에 넣은 한 가지 물건이 아니었다면 금세 잊어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잠력단(潛力團)……!’
벼락이 정수리를 관통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 뇌리를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나도 모르게 몸이 덜컥 굳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부정(否定)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을 스친 저 생각을 부정하는 이유는, 그만큼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놈이, 네 두령이 도대체 뭘 갖고 있었지?”
“예?”
“석연치 않은 비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희한한 물건. 그게 뭐든 간에 기억해 내란 말이다.”
“대, 대협, 그게 대관절 무슨 말씀이신지…….”
찰거머리처럼 등에 착 달라붙어 있던 장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말고삐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이곳에서 멈춰선 안 된다.
한순간이라도 더 달려야 한다.
지금 당장 말을 멈춰 세운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상한 점이 있었을 거야. 분명히.”
“자, 잠시만. 잠시만 진정해 주십시오. 대협.”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장일의 모습에, 차라리 혼절해 있던 두령 놈을 데려왔어야 했나 하는 후회를 품은 그때였다.
“……어?”
불현듯 귓가를 파고드는 얼빠진 목소리.
황급히 고개를 돌린 내 시선에, 눈이 동그래진 장일의 모습이 닿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웬 비단 주머니를 항상 갖고 다녔습니다.”
“비단 주머니?”
“예에. 똑똑히 기억 납니다요. 몇 달 전 호북에서 재수 없게 저희 산채를 지나가던 과객에게 통행료 대신 받은 물건인데, 그 후로 늘 신줏단지처럼 품고 다니길래 귀한 사향(麝香)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요.”
호북에서 만난 과객.
신줏단지처럼 품고 다니던 정체불명의 비단 주머니.
그리고 그 후에 두령이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저어, 혹시 그 비단 주머니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향 특유의 향이 안 나서 소인도 조금 의심스럽긴 했는데.”
나는 장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불길했던 짐작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더불어 장일에게서는 더 이상의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음을 알았다.
과연 그 비단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의 원주인이었던 과객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는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틀림없다. 잠력단이야.’
잠력단은 말 그대로 몸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힘을 끌어올리는 단환.
과거 풍양을 상대하며 그 위험성을 몸소 겪은 바가 있는 나로서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으득.
“무슨 일이냐.”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장일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적천강을 바라보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혹시 과거 산서성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십니까?”
“과거라면, 언제를 말하는 것이냐?”
“항산검문을 습격한 마적 집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렸던.”
정확히 말하자면, 적천강이 산서성에 발을 디딘 것은 항산검문의 일이 마무리된 직후다.
그러나 그 역시 풍양과 잠력단에 관한 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혹시.”
무언가를 짐작한 듯, 크게 뜨이는 두 눈동자.
“예.”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정황상 틀림없어요.”
“이런 염병할.”
적천강이 탄식하듯 욕설을 흘린 그때, 가라앉은 눈빛으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궁성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 해괴한 단환(團丸)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구나.”
“……!”
“그렇게 볼 것 없다. 과거라고 한들 이제 고작 일이 년 남짓. 항산검문과 적풍단의 일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궁성은 놀란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입단속을 제법 철저히 한 건 알고 있다만, 살인멸구(殺人滅口)가 아닌 이상 진실은 새어 나가는 법이지.”
잠력단에 관한 충격으로 잠시 잊고 있었다.
궁성이 왜 굳이 황제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 광활한 천하에 흩뿌려진 황실의 눈과 귀가 얼마나 많은지도.
“이미 알고 계신다니, 굳이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은 내 모습에 궁성이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물론 그 흐릿한 미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사라져 버렸지만.
“항산검문에서 있었던 일련의 상황들은 나로서도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적풍단을 이끌던 풍양이라는 자에 관한 추가 정보를 입수하고 난 후에는 특히나.”
모든 것을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날, 적지 않은 이목이 지켜보는 앞에서 풍양은 초절정에 버금가는 힘을 드러냈으니까.
이미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던 놈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강자였지만, 불완전하게나마 강기(罡氣)를 선보였다는 것부터가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절정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던 대장로가 선천지기(先天眞氣)까지 끌어올린 후에야 그런 힘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끝없는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막 시작한 초심자는 한 번에 몇 계단을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절정의 경지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다음 계단을 밟을 수 있다.
하늘이 내린 무재(武才)를 타고난 청풍조차 눈부신 속도로 강해졌을 뿐이지, 정해진 단계를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잠력단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지.’
물론 엄청난 효력만큼이나 부작용이 끔찍한 데다 유지 시간도 길지 않지만, 그야말로 순리(順理)를 뒤트는 힘.
풍양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입수한 궁성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당시에는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
궁성이 작은 목소리로 흘리듯 중얼거렸다.
“풍양. 과욕 끝에 죽음을 맞이한 그자가, 혹시 내가 찾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만약 그날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이 내가 아니라 풍양이었다면, 그리고 정말 그가 선택받은 자였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지.
그러나 마음속에서 불쑥 고개를 쳐든 그 의문을, 나는 조용히 억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현재 직면한 상황은 그만큼 심각했으니까.
“아무래도…… 과거 풍양이 사용했던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은밀히 유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게도 내가 말하는 누군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적천강과 궁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암천.
잠력단을 만든 장본인들.
놈들이 정확히 언제부터 이 상황을 준비했던 것인지는 모르나, 이제는 일개 산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하느냐? 노부가 들은 것에 비하면 효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은데.”
깊게 가라앉은 적천강의 물음에, 궁성이 나를 대신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을 막아섰던 그 산적은 일류의 경지에도 접어들지 못한 자였어요. 이후 그에게서 드러난 변화를 생각해 봤을 때, 가능성은 두 가지로 좁혀지겠죠.”
“두 가지라면?”
“복용자의 수준에 따라 그 위력도 달라지거나. 혹은…….”
흐려지는 말꼬리와 함께 이쪽을 향한 궁성의 시선에, 내가 입을 열었다.
“효력을 줄인 만큼, 그에 뒤따르는 부작용도 감소시켰거나.”
“……!”
짧은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눈빛으로 나와 궁성을 번갈아 바라보던 적천강이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후자가 틀림없겠군.”
“그것까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아니, 무슨 말을 가져다 붙여도 현실을 회피하려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은 적천강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세상 모두가 힘을 원한다. 부, 명예. 무력.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강자로 우뚝 서길 원하지. 하지만 모든 것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강렬히 소망하면서도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미래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행복과 달콤함을 희생해야 하니까.
“그러나 찰나의 힘을 얻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그 대가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어떻겠느냐?”
그 순간, 나는 적천강이 이토록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놈들이 그것을 만든 이유는, 단지 자신들의 전력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
“한낱 마적 떼를 이끌던 풍양이, 그리고 산적 나부랭이 따위가 어찌 그것을 손에 넣었겠느냐? 아니, 놈들이 어찌하여 그런 놈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쳤겠느냐.”
폭탄에는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는다.
자칫하면 작은 충격에도 터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그 폭발력에 의해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폭탄이 아닌 모닥불이라면 어떨까.
추운 겨울날, 원하는 것을 찾아 눈밭을 헤매던 이들은 그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 손을 뻗을 것이다.
설령 너무 가까이 다가선다 해도 괜찮다.
약간의 화상만 입을 뿐이니까.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모두가 손을 뻗을 수 있는 모닥불.
온기를 느끼기 위해 치러야 할 사소한 대가.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암천이 원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 광활한 천하에는, 그 사소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힘을 맛보고 싶은 미친 인간들이 사방에 깔려 있으니까.
그리고 정파(正波)라 불리는 이들 역시 예외는 아닐 테니까.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새로운 잠력단이 가진 진정한 위험성이었다.
그것에 담긴 매혹적인 힘은 십 년, 혹은 수십 년간 제자리걸음만 하던 이들을 유혹할 것이다.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을 중독시키고, 망가트릴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천주(天主)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에게, 아니 일회용 고기 방패나 다름없는 그들에게 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산서성을 향해 파도처럼 나아가고 있을, 무수한 암천의 무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