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5
#94화
“3억 5천만 원입니다.”
계산하는 직원의 목소리도 떨리고, 카드를 건네는 내 손도 떨린다.
세상에, 3억 5천만 원이라니. 개처럼 일하던 시절의 3년 치 연봉을 불과 한 시간 만에 다 써 버렸다.
‘아냐. 좋게 생각하자.’
감시자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쓰는 돈이다.
어차피 돈은 앞으로 계속 벌면 되고, 오늘 산 물건들은 두고두고 쓸 수 있다.
삑.
– 승인이 완료되었습니다.
“결제 완료했습니다.”
덕분에 이 아가씨만 로또 맞았군. 입이 귀에 걸린 김희선 대리에게 카드를 돌려받았다.
“그럼 끝난 거죠?”
“아, 주소를 알려 주시면 저희가 배송해 드립니다.”
“괜찮아요. 바로 가 볼 데가 있어서.”
배송은 무슨.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즉시 인벤토리에 보관하면 끝이다.
‘시스템이 이럴 때 편리하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쇼핑백을 양손 가득 받아 들었다. 물론 그냥 종이 쇼핑백이 아니다. 오우거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질기고 튼튼한 가죽 쇼핑백이다. 사은품으로 받은 건데 기쁘기는커녕 속이 쓰리다.
“그럼 수고하세요.”
“다음에 꼭! 다시 찾아 주십시오.”
“……아, 네.”
허리를 직각으로 푹 숙이며 내미는 그녀의 명함을 건네받았다.
실적에 미친 자, 그의 이름은 판매 사원.
* * *
근처 화장실에 들러 스토어에서 산 물건들을 인벤토리에 수납한 뒤 택시를 잡았다. 운전면허를 못 딴 게 후회되는 요즘이다.
“일산 A아파트로 가 주세요.”
조수석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정보를 검색했다.
검색어는…….
‘패밀리어.’
검색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관련 정보가 촤르륵 떴다.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는, 헌터 인증을 해야만 열람 가능한 정보도 상당수였는데, 그중 제법 시선을 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유머X 패밀리어 마법 쓰지 마라. 탈모 왔다.
그야말로 영혼을 울리는 제목이다. 클릭 안 할 수가 없지.
‘아, 여기 올라온 글이었네.’
글이 게시된 사이트는 유명한 국내 헌터 커뮤니티였다.
해당 게시글은 월간 베스트에 조회수가 10만, 댓글이 2천 개가 넘어가는 위엄을 보였다.
‘어디 한 번 읽어 볼까.’
클릭!
유머X 패밀리어 마법 쓰지 마라. 탈모 왔다.
현직 B급 마법사다.
나름 짬밥 좀 먹었고 프리랜서 헌터로 짭짤하게 돈 벌고 있다. 정확한 스펙을 밝히지 못하는 건 양해 바람.
아무튼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제목 그대로다.
나 패밀리어 마법 때문에 탈모빔 맞았다…….
아직 20대인데 정수리는 2천 년 된 미라랑 동기 동창이다, 시발 거.
태클 거는 새끼들 있을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우리 집안은 대대로 풍성충이다. 일제 강점기 때 찍은 증조할아버지 사진도 봤는데 조선의 라푼젤임.
각설하고, 패밀리어 마법. 이거 진짜 양날의 검이다.
나처럼 법사 하는 애들은 알 건데 정신계 마법이 흔한 게 아니거든. 민간인들도 기술 하나 배우면 먹고는 살잖아.
법사한테는 정신계가 딱 그래. 이거 하나 있으면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산다.
근데 시발, 머리가 빠져. 계속 빠져.
여기 상급 포션으로 머리 감아 본 놈 있냐? 난 해 봤다.
머리 한 번 감는데 몇천만 원을 썼다고 미친 놈들아. 그 정도로 별 지랄을 다 해 봤는데 그것도 잠깐이야.
하다 하다 안 돼서 민간 의사 찾아갔더니 이 새끼가 한숨 푹 내쉬면서 그러더라.
정신계 마법사시죠?
진짜 토씨 한 글자 안 틀리고 저랬음.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리얼 소름 돋는 얘기 해 주더라.
정신계 법사 중 90퍼 이상이 탈모고, 특히 그중에서도 난이도가 있는 패밀리어 마법 쓰는 놈들은 100퍼센트래.
머리를 존나 혹사시키니까 어느 순간부터 풍성충도 탈모충이 된다는 거지.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싶었는데 알아보니까 사실이더라고.
부랴부랴 정신계 법사 카페 가입해서 나 같은 놈 있는지 찾아봤는데 뭔 카페 회원 100명 중에 98명이 탈모야.
내 상황 듣더니 이미 늦었다고, 포션 그거 일시적으로 세포 회복시켜 주는 거라 자주 쓰면 모발 세포만 죽는대.
카페 게시판에 진료 후기 써 주면 등업 시켜 준다는 거 쌩 까고 탈퇴 후 나만의 치료법을 찾고 있다…….
세줄 요약.
1. 정신계 마법사 좋다. 근데 그 대신 머리 빠짐.
2. 포션 써 봤자 헛수고다. 차라리 탈모 방지 샴푸에 민간 병원을 가라. 모발은 마음과 간절함으로 치료해야지, 마법으로 치료하려고 하면 안 됨.
3. 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 이만.
“…….”
다 읽고 나니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항상 부러워했던 마법사들, 다 가졌을 것 같던 그들에게도 이런 고충이 있었다니.
“손님, 괜찮으세요?”
“전 괜찮…… 으흡.”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 상황에 하필이면 택시 아저씨도 대머리다.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스마트폰을 향해 고개를 떨궜다.
게시글 아래 2천 개가 넘어가는 댓글이 보인다.
익명#232 : 한 줄 요약해 주라.
└ 작성자 : [심한 욕설로 블라인드 처리된 댓글입니다.]
익명#112 : 첫 댓글 사람 새끼 맞냐? 난 울었다. 응원할게 힘내.
└ 작성자 : 고맙다…
익명#1512 : 다른 건 모르겠고 두 번째 댓글도 탈모인인 듯. 근데 쭉 읽어 보니까 돈 많이 버는 것 같던데 모발 좀 없어도 되지 않냐. 가발 좋은 거 쓰면 되잖아.
└ 작성자 : [심한 욕설로 블라인드 처리된 댓글입니다.]
익명#4885 : 와, 패밀리어 법사를 여기서 보네.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작성자 리얼 귀족임. 같은 B급이어도 수입 면으로는 비교가 안 된다. 대우도 그렇고.
└ 작성자 : 돈 많으면 뭐 하냐. 머리가 없는데.
└ 익명#4885 :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 작성자 : 위로해 줄 거면 끝까지 해,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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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 축하드립니다! 인기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 익명#5252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익명#8984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작성자 : 이걸 웃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
└ 익명#2652 : 지금 모발이 없는데 웃음이 나와?
└ 작성자 : [심한 욕설로 블라인드 처리 된 댓글입니다.]
작성자 : 열화와 같은 성원 고맙다. 월간 베스트 찍고 명예의 전당 가게 생겼네. 혹시 궁금한 점 있으면 아래로 댓글 달아라. 지금 일 중이긴 한데 틈틈이 들어와서 대답해 줌.
└ 익명#9665 : 프리랜서라고 했는데 주로 어떤 일 함?
└ 작성자 : 말이 좋아서 프리랜서지 하는 일은 흥신소랑 비슷해. 일급 범죄자(물론 헌터) 추적도 해 봤고 졸부 집 불륜 사건도 맡아 봤다.
└ 익명#915 : 오… 많이 벌겠네. 수입 얼마나 되냐.
└ 작성자 : 그거야 어떤 의뢰냐에 따라 다르지. 그래도 몇 년 일해서 서울에 건물 하나 올렸다. 지금 사는 집도 내 명의로 된 거고.
└ 익명#5252 : 집 인증해 봐.
└ 작성자 : 일 중이라 밖에 나와 있어. 나중에 제대로 인증할 테니까 그때 봐라.
└ 익명#9882 : 일 중인 거랑 뭔 상관이냐. 패밀리어 어차피 원격 조종 아님?
└ 작성자 : 아무리 원격 조종이어도 거리 제한이 있지 병신아. 넌 미국 여행 가서도 너희 집 와이파이 쓰냐?
└ 익명#9882 : ㅈㅅ
└ 작성자 : 패밀리어 연결 거리는 최대 500미터가 한계야. 조금씩 거리 늘리고는 있는데 힘들더라. 강제로 링크 해제되면 속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음. 마나 역류 위험도 있고.
└ 익명#9882 : 그럼 500미터 안에는 무조건 있어야겠네.
└ 작성자 : ㅇㅇ 안전하게 작업하려면 한 300미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되니까. 아마 대부분이 그럴 거야.
댓글들을 쭉 읽어 내리다가 멈칫했다.
지금 뜻하지 않게 중요한 정보를 발견한 것 같은데?
‘500m를 벗어나면 패밀리어와의 연결이 끊긴다고?’
최대 거리가 그 정도고 안전한 작업을 위해서는 300m라니.
즉, 작성자의 댓글이 사실이라면 어제 패밀리어를 부린 놈들은 우리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머리가 벗겨져 있겠지. 완전히 대머리거나.’
가발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알고 있어서 나쁠 건 없다.
나는 그 후로도 계속 패밀리어 마법에 관한 정보를 검색했고,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할 수 있었다.
‘B급 마법사 기준 패밀리어 연결 거리는 최대 500m. 안전 거리 300m. 패밀리어가 죽을 경우 강제로 링크가 해제되며 시전자도 약간의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하나 더, 왜 굳이 몸값 비싼 패밀리어 마법사로 나를 감시하는지도 깨달았다.
‘뭐야, 이거. 초소형 패밀리어는 어지간한 탐지 마법에도 안 걸린다고?’
예를 들자면 그런 거다. 탐지 마법은 그물이고, 파리나 쌀벌레 같은 소형 패밀리어는 그물에 걸리지 않을 만큼 작으니 걸릴 리가 없다.
물론 그것까지 잡아내는 최상급 탐지 마법이 내장된 제품도 있긴 한데 찾아보니 여름 특가로 5억 5천이란다.
“…….”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여름 특가인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앞으로 돈 나갈 구석도 많은데 5억은 얼어 죽을.
‘직접 잡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문득 다른 길드원들에게도 생각이 미쳤다. 과연 패밀리어가 우리 가족에게만 붙었을까?
사주한 범인의 정확한 정체도 아직 모른다. 상동 길드는 유력한 용의자일 뿐이다.
“8천 4백 원이요.”
“아, 네. 여기요.”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항상 똑같았던 아파트 단지 입구가 오늘은 좀 낯설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감시자의 존재가 거슬렸다.
‘최 팀장한테 연락을 해 봐야 되나.’
스마트폰에 저장된 그의 번호를 보며 고민하던 그때였다.
“오빠!”
낯익은 초록색 추리닝에 동그란 안경. 떡 진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백조 한 마리가 날 보며 손을 흔든다.
“어, 으응.”
“뭐야, 그 반응은?”
“왠지 밖에서는 알은척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부끄럽다고나 할까…….”
“하나뿐인 여동생이 부끄러워? 어?”
“옷이나 사 입어라.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산 옷은 놔뒀다 뭐 하고 또 추리닝이야?”
“오빠나 잘해. 맨날 비슷한 옷만 입고 다니는 주제에.”
하연이의 일침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 3억을 결제했는데 입고 있는 옷은 아직도 청바지와 티셔츠뿐이다. 27년 동안 박혀 있던 소시민의 묵은 때가 덜 벗겨진 모양이다.
“아, 아무튼. 어디 가는 길이야?”
“어디 가냐고? 편의점!”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뚱해 있던 하연이가 이번엔 실실 웃기 시작한다.
얘가 왜 이래? 난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렇게 신났냐? 편의점 털어 올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
“털어 오긴 무슨. 참치 통조림 사 올 건데.”
“참치 통조림? 오늘 점심 참치 김치찌개야?”
“아니! 아닌데!”
“……오늘 왜 이래, 진짜? 술 마셨어?”
“오빠도 얘 보면 그렇게 될걸.”
내 반응에도 평소와 달리 히죽거리기만 하던 하연이가 추리닝 지퍼를 내리고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하얗고 노란, 조그마한 털 뭉치 하나가 손바닥 안에서 꼬물거린다.
야오옹.
“……새끼 고양이?”
“귀엽지? 아까 분리수거 하러 갔는데 누가 박스에 버려 놨더라고. 기르고 싶은 사람 기르라고.”
“…….”
“어떤 놈이 버렸는지 몰라도 불쌍하잖아. 얘는 뭔 죄야? 안 그래, 오빠?”
“……그래. 동물이 무슨 죄냐.”
“엄마한테 허락받아서 잠깐이라도 임시 보호 하기로 했어. 오빠도 괜찮지?”
“나?”
“응, 우리 김 여사가 장남한테 껌뻑 죽잖아. 오빠 허락도 받으라는데 이따 들어가서 말 좀 잘 해 주라.”
“글쎄.”
“뭐야. 어릴 땐 동물 좋아했잖아.”
좋아했지. 아니,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하연이의 손바닥에 얌전히 안겨 있는 이 녀석은…….
[Lv.2 고양이 – 패밀리어]좀, 다르다.